기후변화위기가 금융위기를 촉발할까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각국 정부의 정책이 선명하고 일관돼야 금융혼란 가능성 줄어"
한편 미국 민주당의 진보적 정치인들은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연방준비제도(연준) 제롬 파월 의장을 재임명하지 말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등 하원의원들은 지난달 말 성명서를 통해 "연준이 파월의 리더십 아래 기후변화가 금융시스템에 미치는 위험을 완화하려는 조치를 거의 취하지 않았다"며 "조 바이든 대통령은 기후 위험을 제거하고 인종 문제와 경제적 정의가 개선될 수 있도록 연준을 재구성하기를 바란다"고 촉구했다.
그렇다면 기후변화가 금융안정성에 얼마나 치명적일까. 각국 중앙은행들의 스트레스 테스트, 금융기관들의 관련 정보제공 등은 그같은 질문을 조명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기후변화가 금융시스템을 붕괴시킬 수 있다는 증거는 미적지근하다. 하지만 많은 상황이 탄소세와 에너지효율성 기준 등을 통해 정부가 탄소배출을 줄이는 확실한 경로를 설정하는지에 달렸다. 그래야 은행들이 기후변화에 대비할 충분한 시간을 갖기 때문이다.
금융계 손실, 세계 GDP의 25% 될 수도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최신호에서 기후변화가 금융시스템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3가지 측면으로 설명했다. 첫번째는 '과도기 리스크'다. 정부가 강력한 기후변화 대책을 시행할 때 경제 전반이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과도기 리스크가 커진다. 자본은 화석연료산업 등 굴뚝산업에서 빠져나와 더 청정한 산업으로 흘러들어간다. 오염산업에 몸 담은 기업들은 대출이나 회사채 등에 대해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할 수 있다. 해당 기업들의 주가는 폭락할 것이다.
두번째 경우는 지구촌 온도 상승의 위험에 금융기관이 직접 노출되는 것이다. 개별 자연재해를 기후변화로 분석하는 건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다. 하지만 주요국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장 등이 참가하는 회의체인 '금융안정위원회'(FSB)는 기후 관련 재난으로 인한 글로벌 경제적 손실이 1980년대 2140억달러(2019년 달러가치 기준)에서 2010년대 1조6200억달러로 급증했다고 추산한다. 글로벌 GDP 대비 비중으로 보면 대략 3배 늘었다. 이러한 손실은 보험업계의 부담을 크게 가중시킬 수 있다.
마지막은 기후변화가 자산가격의 폭락을 촉발하면서 금융시스템이 광범위한 경제적 피해에 노출되는 경우다. 이 경우는 계량화하기가 더 어렵다. 녹색금융을 위한 중앙은행·감독기구 간 글로벌 협의체인 '녹색금융협의체'(NGFS)에 따르면, 관련 학계는 산업화 이전 시기 대비 지구온도가 3℃ 오르면 금융계 손실이 세계 GDP의 2%에서 25% 수준으로 급증하게 될 것이라고 추산한다. 이코노미스트지는 "게다가 기후변화가 국가간 무장충돌이나 대규모 난민 사태를 촉발한다면 현재 가장 암울한 시나리오도 장밋빛 전망이 될 수 있다"고 전했다.
금융시스템에 미칠 최악의 시나리오는 과도기 리스크가 갑작스레 구체화되는 동시에 금융시스템이 광범위한 경제적 피해에 노출되는 경우다. 2015년 마크 카니는 기후변화로 인한 '민스키 모멘트'가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미국 경제학자 하이먼 민스키의 이름을 딴 것으로, 과도한 부채 확대에 기댄 경기호황이 끝난 뒤 은행 채무자들의 상환 능력이 악화돼 결국 건전한 자산까지 내다팔아야 하는 상황을 말한다. 카니는 미래의 기후변화 정책이 급격히 조정될 것을 예상한 투자자들이 자산을 헐값 매각하면서 광범위한 리스크 재산정을 촉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금리 급등으로 번질 수 있다.
과도기 리스크에 노출된 금융자산 가치는 잠재적으로 매우 크다. 영국 소재 비영리 기후금융 싱크탱크인 '카본 트래커'에 따르면 글로벌 주식의 약 18조달러, 채권의 약 8조달러, 비상장 회사채의 약 30조달러가 탄소 고배출 산업과 관련돼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핵심이었던 '부채담보부증권'(CDO)의 시장 규모가 고작 1조달러에 불과했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손실의 규모는 누가 그 자산을 소유하는지에 달렸다. 금융당국들은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대형 은행과 보험회사가 탄소고배출 산업과 얼마나 연관됐는지를 주시한다.
스트레스 테스트에선 '관리 가능' 결과
주요국 중앙은행이 실시한 예비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는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기관들이 기후변화 충격을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올해 4월 프랑스 중앙은행이 공개한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에 따르면 프랑스 은행들의 과도기 리스크 노출도는 낮았다. 하지만 심각한 가뭄과 홍수 등의 결과로 보험업계의 부담은 크게 늘었다. 일부 지역에선 5배 넘게 상승했다.
ECB와 '유럽시스템리스크위원회'(ESRB)도 최근 보고서에서 비슷한 결론을 냈다. 유로존 은행과 보험회사의 탄소 고배출 산업 노출도는 제한적이었다. 물론 산업화 이전 대비 3.5℃ 상승하는 '뜨거운 지구'(hot-house world) 시나리오에서의 손실은 심각했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기업대출에 대한 은행의 손실은, 유로존 은행들의 정례 스트레스 테스트에서 나타난 손실에 비해 대략 절반 수준이었다. 은행들이 기후변화 위기에 대처할 정도로 넉넉한 자본을 확충하고 있다는 의미다.
네덜란드 중앙은행이 2018년 행한 조사도 비슷하다. 이 조사에 따르면 네덜란드 금융기업들은 과도기 리스크 충격을 관리할 수 있을 것으로 나타났다. 네덜란드 중앙은행은 가장 심각한 시나리오를 상정했다. 정부의 기후변화 정책이 급작스레 변경되고 신재생에너지 개발에 급속한 발전이 이뤄져 기업들이 이중의 충격을 받고 경제는 심각한 경기침체에 빠지는 상황이었다. 이 경우에도 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은 약 4%p 하락하는 선에 그쳤다. 이는 상당한 피해이긴 하지만 올해 유럽 금융당국이 은행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례 스트레스 테스트에서 예상된 피해에 비하면 양호한 수준이다.
문제는 기후변화 스트레스 테스트가 얼마만큼 현실적인가이다. 카본 트래커의 마크 캠퍼네일은 다소 회의적이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자산평가와 관련해 구식 모델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만약 감독기관들이 훨씬 낮은 국제유가를 적용해 기업자산을 평가한다면, 뒤따르는 자산 평가절하로 투자자 심리가 무너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스트레스 테스트에는 민스키 모멘트 리스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해당 스트레스 테스트는 다른 측면에선 보수적이었다. 대부분의 테스트에선 가속화된 시간범위를 사용했다. 네덜란드와 프랑스 중앙은행은 5년을 내다봤다. 그러면서 기업들이 현재 갖고 있는 자산을 5년 뒤에도 그대로 갖고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하지만 기후 전환기가 진행되면서 은행과 보험사들이 사업모델을 바꿔 금융시스템에 대한 충격을 억제할 것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프랑스 중앙은행은 향후 30년 기간을 설정해 두번째 스트레스 테스트를 진행했다. 금융기관들이 이 기간에 사업모델을 바꿀 것이라고 가정했다. 은행들은 화석연료 부문에 대한 대출과 투자를 현격히 줄이고 보험회사들은 보험료를 대폭 인상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결국 이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가 시사하는 점은 금융기관들이 기후변화 대처에 적응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정부 정책의 예측가능한 경로가 매우 중요하다. 프랑스 중앙은행은 정부의 기후변화 정책이 지지부진하다가 갑작스런 과도기가 올 경우 신용 손실이 최고조에 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기후변화가 금융안정성에 미치게 될 영향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시나리오는 각국 정부가 기후변화 대처에 미적대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급진적인 조치를 취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