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진단

20년 아프간전쟁이 미국에 남긴 것

2021-09-17 10:29:35 게재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정치학 교수

미국 피츠버그시 북쪽 외곽 마을인 클레이턴은 과거 세계 철강산업의 중심이었던 US스틸이 있던 곳이다. 이 철강소에서 비지땀을 흘린 청년들은 주말을 맞아 인근 산으로 사슴사냥(디어 헌터)을 떠난다. 이때 흐르는 주제곡 '칸바티나'는 주인공들의 슬픈 운명과 베트남 전쟁의 비극적 결말을 암시한다. 반론의 여지는 있지만, 베트남전을 다룬 대부분의 영화들이 특정 시기를 비추는 데에 비해 '디어 헌터'는 베트남전쟁 기간 전체를 관통하면서 미국적 에피소드와 전쟁의 흐름을 가장 조화롭게 결합시킨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아웃포스트'는 아프간전쟁이 안고 있는 치명적인 한계를 자연환경과 전략적 실수라는 소재와 결합시켰는데, 평소 경쾌함의 대명사인 올랜드 블룸이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절벽 같은 상황을 잘 연기한다. 베트남전의 경우 녹색 밀림에 뒤섞여 도저히 구분되지 않는 피아(彼我)가 넘사벽으로 다가왔다면, 아프간전쟁은 한치도 장악하기 어려운 산악 지형과 끝없이 이어지는 아프간 현지 정부의 무기력함이 문제였다. 요즘 아프간에서 베트남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정확히 사이공 함락 기준 46년의 시차만큼이나 미국의 접근법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네오콘이 시작, 네오뉴딜이 마무리

9.11테러 20년을 맞이해 지난 주말 내내 미국 언론들은 뉴욕 무역센터빌딩이 화염에 휩싸였던 장면을 내보냈다. 당시 부시행정부는 테러집단으로 지목된 알카에다의 본거지였던 아프간을 장악하지 않고서는 미국 주도의 세계평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테러'와 함께 또 하나의 주적을 규정했는데 소위 불법적 '대량살상무기'였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전쟁이 2001년의 아프간전과 2003년의 이라크전이다. 결과적으로 부시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동일 행정부에서 두개의 대규모 전쟁을 감행한 유일한 지도자라는 오명을 갖게 되었고, 이후 정확히 20년 동안 4개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9.11의 뒷수습에 시달려야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말인 8월 30일 철군 완료를 공식 선언했다. 선언 직후 실시된 미국 내 한 여론조사에서 미 국민 중 38%만이 철군을 지지한다는 발표가 있었지만, 베트남전보다 거의 두배 가까이 길어진 시간만큼 미국 국민들의 피로감이 극에 달했던 것도 사실이다. 철군 결정 자체는 전임 트럼프 대통령이 사인한 것이어서 바이든의 입장에서는 리더십의 훼손은 있겠지만 정치적 비난을 최소화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미군 철군 과정을 지켜봤을 때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일성으로 강조했던 '외교의 시간'이 무색하다는 점에 있다. 철군 이후 아프간 국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이끈 아프간정부가 얼마나 허술하게 무너질 것인지, 탈레반을 상대로 한 주요국의 외교전략이 얼마나 복잡하게 전개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바이든정부가 너무도 무방비 상태로 철군을 감행한 과정에 비난이 집중된 것이다.

20년 전 아프간전쟁을 결정했던 부시 대통령의 참모들을 '네오콘'으로 불렀다. 네오콘들은 미국이 선호하는 평화와 질서에 반하는 세력을 '야만인'으로 규정한 정치철학자 스트라우스의 주장을 신봉하는 정치세력으로, '힘'의 권위를 인정하는 수준이 공화당 전통주의 세력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아프간에서 후퇴를 결정한 세력은 소위 '네오뉴딜'(Neo Newdeal) 그룹이다. 물론 코로나와 트럼피즘으로 고갈된 미국 사회의 포용성을 다시 복원해야 하는 상황에서, 바이든행정부가 표방하는 네오뉴딜 혹은 '루즈벨트 2.0'을 명쾌하게 정의하기는 아직 어렵다. 예산의 추진, 정책의 우선순위, 국내 정치적 동력 확보 등 여러가지 난제들이 서로 맞물려 네오뉴딜의 실체를 정확하게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네오뉴딜'은 '신자유주의'와 '선택적 개입'이 적극적으로 결합한 사상이고, 이러한 사상이 외교로 구현될 때 결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좌우명이었던 '아메리카 퍼스트'와 동일한 결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2조3000억달러에 참전용사 복지비 부담

혹자는 바이든행정부가 선택한 아프간 철군 과정을 '지정학의 부활'이라고 얘기한다. 결국 중국을 관리하고 압박하기 위한 가용 외교안보 자원의 이동이라는 뜻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중국의 거대화에 위기를 느낀 오바마행정부는 그 유명한 '아시아로의 이동'(Pivot to Asia)을 외치며 외교전략을 다시 정렬했다. 하지만 트럼피즘과 코로나 위기가 연이어 겹치면서, 미중갈등을 모든 외교의 중심에 놓고 다시 가다듬고 있다는 설명이다.

지난 정부에서 '구상'(initiative) 수준에 머물던 '인도태평양 정책'이 바이든행정부에 들어 국가 에너지 투입이 배가되는 '전략'(strategy)으로 전환된 점은 아프간 철군과 맞물린 미국의 대중정책을 잘 설명해 주고 있기는 하다.

다만 20년 전에 첫 진군을 결정하던 시점에서도 유라시아 대륙의 배꼽에 위치한 아프간을 관리해야 한다는 미국 전략가들의 진중한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미국 석유회사의 로비스트 출신이었던 카이자이를 대통령으로 내세우면서, 역사상 모든 대규모 전쟁이 발발했던 유라시아 대륙을 미국의 손바닥에 올려놓지 않고서는 미국이 규정한 힘과 평화의 정의는 실현되지 않을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아프간을 떠나면서 바이든행정부는 국내 정치적으로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무엇보다도 경제가 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0년간 아프간에서 지불한 미국의 비용이 얼마인지를 놓고서 의견이 분분한데 브라운대학교 왓슨연구소는 대략 2조3000억달러로 추정한다. 정부 발표보다 약 2배 정도 많은 추정치인데, 아이비리그 멤버인 브라운대학 부설 왓슨연구소는 오래전부터 글로벌 차원의 돈세탁, 국가들 간 보조금, 국제테러집단의 수익사업 등에 정통한 연구를 해오고 있고 관련 자료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두루 통용되고 있다.

지난 20년간 사용된 천문학적 전비는 현재진행형으로 연결될 것이다. 남은 과제가 만만치 않은데, 대략 450만명으로 추정되는 이라크와 아프간 참전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각종 복지지원비는 앞으로 어마어마한 눈덩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간선거에 큰 영향 미치지 않을 듯

바이든행정부가 직면할 이러한 정치적 곤경이 공화당 혹은 트럼피즘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정치적으로 반격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까? 일단은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유권자들은 정치 지도자가 어떤 어젠다를 세팅하느냐의 문제보다는 어젠다를 대하는 태도를 더 문제 삼는 법이다. 철군 결정을 내렸던 트럼프 전 대통령은 최근 자신의 입장을 번복하는 말로 오락가락하고 있으며, 공화당을 이끌고 있는 케빈 맥카시 하원 원내대표 같은 인물도 아프간 철군 이슈를 포함해 유권자들에게 인상적인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간단히 전망하자면 중간평가의 특성 상 공화당 의석은 좀 더 늘어날 수 있지만, 지난 1월초 의사당 난입으로 실추된 우익 세력의 정치적 입지가 완전히 만회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20년 아프간전쟁은 일단락됐다. 공산국가와의 적대관계를 청산한 다음 잠시 길을 잃었던 미국은 서구 주도 문명권 밖에 머무르는 세력을 적대시했고, 그 결과가 아프간전쟁이었다. 이제 아프간전을 뒤로 하고 냉전 종식 이후 약 30년에 걸친 미국 주도의 '단극체제'가 막을 내리고 있다.

베트남 사례처럼 머지않아 미국과 아프간 사이에 외교관계가 복원되고 미군의 진군이 아닌 상품과 자본의 진출이 이뤄져서, 외교를 국내 정치 에너지로 전환하려는 바이든의 승부수가 통할 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