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내각 출범 ②│ 경제·복지분야 과제
"분배 통한 성장" … 신자유주의 탈피 강조
막대한 국가채무와 낮은 노동생산성 극복 과제 … 반도체 공급망 확보에 사활 걸어
기시다 총리는 8일 취임후 처음으로 국회에서 소신표명 연설을 할 예정이다. 국정기조와 관련한 자신의 구상을 밝히는 새 총리의 연례행사다. 기시다 총리는 이 자리에서 코로나19로 타격을 받은 개인과 기업을 위한 지원대책과 함께 경제 및 복지제도의 지속가능한 대책을 일부 내놓을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소득세 인상 검토
기시다 총리는 4일 기자회견에서 금융소득과세 개선방안을 검토할 뜻을 내비쳤다. 현재 낮은 세율을 인상해 세수를 늘리고, 중간층과 저소득층에 배분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주장한 분배와 성장을 견인하겠다는 의지다. 이를 위해 정부 내에 전문가가 참여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회의'를 신설해 논의를 진행시킨다는 구상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7일 기시다 총리가 이른바 '1억엔의 벽'을 염두에 두고 금융소득과세 개선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1억엔의 벽'이란 대략 소득 1억엔을 경계로 소득세의 누진적 성향이 약화돼 세금 부담이 낮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연간소득 5000만~1억엔인 계층은 소득세 부담률이 27.9%로 올라가지만, 1억엔(10억 500만원)이 넘으면 세부담이 조금씩 줄어든다. 예컨대 연간소득이 10억~20억엔이면 20.6%, 100억엔 이상일 경우 16.2%로 줄어드는 식이다.
이에 따라 주식 양도차익이나 배당금 등 금융소득에 대한 과세를 현행 일률적으로 20%(소득세 15%, 주민세 5%)인 것을 인상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스즈키 쥰이치로 재무상은 4일 취임에 맞춰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연말 세제개편 과정에서 자민당 세제조사회와 논의를 하겠다"면서 "부유층일수록 소득세 부담률이 낮아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금융소득세를 인상하는 것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일본은 그동안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막대한 금융자산을 주식시장 등으로 유인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아베정부는 '저축에서 투자로'라는 방침을 내세우면서 주식시장 부양에 골몰했다. 실제로 일본 가계의 금융자산은 올해 2분기 현재 무려 1992조엔(2경920조원)에 달하지만 이를 대부분 현금이나 예금으로 보유하고 있다. 이에 반해 주식과 채권 등의 보유비중은 올해 6월 말 현재 326조엔(3425조원) 규모에 그치는 것으로 집계됐다.
재무성은 금융소득세를 일률적으로 5% 올리면 수천억엔의 세수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다만 그 효과가 제한적일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일본에서 소득 1억엔이 넘는 사람은 2만명 정도인데 이들에 대한 과세를 늘리면 투자의욕이 떨어져 주가하락 등의 부작용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옛 민주당 정권이 주식양도차익 등에 대한 세율을 10%에서 20%로 인상한 2014년, 닛케이주가는 1만6000에서 1만4000으로 하락하기도 했다.
더구나 일본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부의 격차가 크지 않은 편이어서 부자증세에 대한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OECD 통계에 따르면 상위 1%가 가진 자산의 비중은 미국이 42%, 영국은 20% 수준이지만 일본은 11% 정도인 것으로 나타났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의 부의 격차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크지 않은 편"이라며 "증세를 할 경우 투자심리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고 분석했다.
21세기판 소득배증계획
일본은 1960년 이케다 하야토 전 총리가 내세운 '소득배증계획'으로 국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했다. 소득배증계획은 당시 이케다 전 총리가 10년 내에 국민소득을 두배로 향상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실제로는 1967~1968년에 조기 달성했다. 기시다 총리는 이케다 전 총리가 만든 '고치카이'라는 파벌의 수장이다. 그는 평소 같은 히로시마 출신인 이케다 전 총리를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삼아왔다.
자민당 내에서 고치카이는 '경무장·경제 우선' 이라는 보수 본류노선으로 평가받는 이른바 '비둘기파'로 꼽힌다. 이에 반해 아베 전 총리가 속한 당내 최대 파벌 '세이와카이'는 경제보다 대외관계 등에서 강경노선을 주장하는 '매파'로 자민당 초기에는 보수 방계에 속했다.
기시다 총리는 이번 자민당 총재선거 과정에서 '분배를 통한 성장'을 강조했다. 그는 4일 취임 기자회견에서도 "분배없이 성장은 없다.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이뤄 국민이 잘살 수 있는 경제를 만들겠다"며 "코로나19로 큰 영향을 받은 분들을 지원하기 위해 신속하게 경제대책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내놓는 '매월 근로통계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실질임금지수는 2000년에 112.4였지만 지난해에는 98.6으로 떨어져 국민들의 임금수준이 거꾸로 가고 있다.
이에 따라 자민당은 이달 말 있을 중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한부모 가정과 비정규직 등에 대한 현금 지원 △중소기업 등에 대한 지원금 강화 △저소득층에 대한 집세 지원금 지급 등을 위해 수십조엔에 이르는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밖에도 △기업 생산성 향상을 위한 디지털화 추진 지원 △탈탄소화를 위한 전기차 구입 지원 △재난방지를 위한 전국토의 인프라 정비 확충 등의 대책도 함께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분배정책은 일본의 구조적 문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일시적 땜질 처방에 그칠 것이라는 경고도 있다. 올해 6월 말 현재 1220조6000억엔(1경2820조원)에 달하는 국가채무에 대한 개선 대책이 우선이라는 지적이다. 아베정권은 2025년을 목표로 균형재정을 강조해왔지만 지난해 이후 코로나19 대책에 수십조엔의 추경을 편성하는 등 부채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정부의 균형재정 목표는 2028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나온다.
일본 기업의 낮은 노동생산성도 문제로 지적된다. 일본의 노동생산성은 2019년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회원국 가운데 21위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무라총합연구소 키우치 타카히데 연구위원은 "아베정권 기간중 일본의 잠재성장률, 노동생산성 상승률은 일관되게 저하하는 경향을 보였다"면서 "기시다정권은 아베·스가정권이 남겨 놓은 과제인 구조개혁과 성장전략을 진전시켜 경제의 잠재력을 향상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경제안보·반도체 공급망 강화 안간힘
기시다 내각은 출범과 함께 경제안보를 담당하는 각료를 신설했다. 이는 미국 등 동맹국과의 반도체 공급망을 새롭게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기시다 총리는 자민당 총재선거 과정에서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의 제정을 공약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중국을 염두에 둔 첨단기술의 국외 유출 방지와 중요 물자의 공급망을 확대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는 4일 기자회견에서도 "전략기술과 물자의 확보, 기술유출의 방지를 위한 대처를 철저히 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인공지능(AI)과 5G 등 첨단기술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반도체의 경우 공급망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대만 반도체업체 TSMC의 일본 생산기지 유치 등 반도체산업 육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일본은 또 미국과 유럽은 물론 호주, 인도 등과의 연계도 모색하고 있다. 지난달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쿼드 정상회담에서는 세계적으로 부족한 반도체의 공급능력과 취약성을 점검하고 협력하기로 했다.
이에 앞서 올해 4월 미일 정상회담에서는 반도체를 포함해 공급망의 연계를 강화하는 데 합의했고, 지난 6월 주요7개국(G7)정상회담에서 반도체와 주요 광물 등에 대한 공급망의 리스크에 공동대처하기로 합의했다. 일본은 또 올해 의장국을 맡고 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통해 중국의 부상을 억제한다는 구상이다. 기시다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중국이 지난달 TPP에 정식으로 가입을 신청한 것에 대해 "TPP의 높은 레벨을 중국이 클리어하게 수용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고 했다. 이에 반해 대만의 TPP 가입신청에 대해서는 "환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