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사라졌지만 대체법안 없어 임신중지는 여전히 '의료 사각지대'

2021-10-13 11:14:15 게재

모낙폐, 임신중지 실태조사 보고서

"출처 불분명한 유산유도제 복용"

'낙태죄' 처벌 조항의 효력은 사라졌지만 대체법안이 마련되지 않아 임신중지가 필요한 여성들은 여전히 제대로 된 진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모낙폐)이 12일 발표한 '2021 임신중지 경험 설문·실태조사 및 심층인터뷰' 보고서를 보면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에도 여성들이 접하는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보고서는 6월 7일부터 7월 16일까지 37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내용과 14명(임신중지 경험자는 13명)의 심층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됐다.

설문응답자 370명 중 임신중지 경험이 있는 응답자는 79명이다. 이들은 외과적 방법(86.1%) 내과적 방법(8.9%) 내외과적 방법(5%)으로 임신중지를 했다.

심층인터뷰에서 자신의 임신중지 경험을 털어놓은 응답자들은 여러 측면에서 불편함을 겪었지만 공통적으로는 정보부족에 시달렸다.

예를 들어 인터뷰 대상자 중 4명은 유산유도제를 사용했는데 이들은 자신이 사용한 유산유도제의 이름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아직 정식 도입되지 않은 탓에 불분명한 유통과정을 통해 약을 얻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정확한 복용법이나 주의해야 할 부분을 숙지하기도 어려웠다.

실제로 인터뷰 대상자 중 한 여성은 2019년 중국산 미프진을 구해 복용했다가 한 달간 출혈을 겪었다. 그 후에도 임신중지가 되지 않아 수소문끝에 임신중지를 옹호하는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 2차 약물복용을 한 끝에 임신중지를 할 수 있었다.

이 여성은 "중국산 미프진이라고 해서 받았는데 전문의에게 받은 것도 아니고 친구에게 받았기 때문에 양을 얼마나 먹어야 할지 몰랐다"면서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출혈이 안 멈췄고 결국 병원을 찾아갔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안전한 유산유도제의 공식 승인과 도입에 불필요한 지연이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 "접근성 확대를 목표로 한 약물적 임신중지 의료전달체계(약가 설정, 처방, 복약 및 부작용 관리체계) 정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유산유도제 외에 외과적 수술을 통해 임신중지를 하는 경우에도 수술과정이나 회복 관련해 필요한 정보를 듣기가 어려운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특히 외과적 방법으로 임신중지를 할 경우 비용 문제는 큰 부담이었다. 심층 인터뷰 대상자 중 한 명은 "당장 150만원을 현금으로 가져와야 수술을 해준다고 해서 막막했다"고 자신의 경험을 털어놨다.

이서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부장은 "(이번 실태조사에서)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음성화되고 소극화된 의료행태를 일관되게 경험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면서 "특히 대다수가 비급여 영역에서 이루어지면서 가격형성이 일관되지 않고 현금결제로 이뤄지는 경향이 있는데 신속한 결정이 필요한 임신중지 의료의 특성상 짧은 기간 내 마련하기 어려운 목돈을 현금으로 마련하면서 경제적인 문제 및 갈등·폭력 등 이차적인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보고서는 안전한 임신중지가 보편적 의료서비스로 제공돼야 한다면서 △건강보험 전면 적용 △임신과 출산에 준하는 사회보장제도 적용 △정보 접근성 확대 △예비의료인 교육과정에 임신중지 의료에 대한 교육 포함 △임신중지 진료거부 금지 등을 제안했다.

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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