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순환 경제사회

종이팩 재활용 급감 … 시장 변화, 시스템 전환 시급

2021-11-29 16:54:58 게재

유럽과 규모의 경제 다른 국내 특성 고려한 대책 마련 필요 … 과거 실패 답습 안돼, 다양한 수요처 개발도 병행

"최근 쓰고 난 멸균팩이 들어오는 비율이 너무 늘었어요. 게다가 황갈색 속지를 사용한 멸균팩도 증가하고 있어서 문제입니다. 이런 멸균팩이 살균팩과 섞여 들어오면 현 시스템으로는 재활용하기가 어려워요. 당연히 종이팩 재활용업체에서는 재활용 원료인, 사용한 종이팩을 가져가질 꺼려하죠. 참 갑갑합니다."

경기도의 한 회수·선별 업체에 다양한 재활용 원료들이 쌓여있다. 종이팩과 폐지 등이 다 섞여서 들어온 상태다. 최소한 종이팩과 일반 종이류는 분리해서 반입되는 게 맞다.


22일 종이팩 회수·선별업체 대표 A씨는 이렇게 말했다. 또 다른 종이팩 회수·선별업체 대표 B씨 역시 "우유팩 등 살균팩은 기본적으로 펄프를 원료로 하기 때문에 재활용가치가 높다"며 "선별·분리 작업만 제대로 되면 고부가가치 상품이지만 멸균팩 등 다른 재질들이 섞여버리면 다시 분리작업 단계를 거치는 등 단가가 높아지고 상품성도 떨어져서 시장에서 찾지 않는다"고 말했다.

과거 1980년대 학교에서 단체 우유 급식을 하던 시절만 해도 종이팩 재활용은 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재활용 품목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왜 재활용 시장에서 애물단지가 돼버린 것일까.

종이팩 재활용업체에 쌓여있는 재활용 원료들. 멸균팩과 살균팩이 뒤섞여 압축돼 있다.


◆멸균팩 출고량 증가, 재활용률 '뚝' = 국내에서 사용하는 종이팩은 크게 2종류로 나뉜다. 우유팩으로 주로 사용되는 살균팩(카톤팩)과 두유팩으로 쓰는 멸균팩(아셉틱 카톤팩) 등이다.

살균팩은 '폴리에틸렌(PE·인쇄면)+펄프 1+펄프 2+펄프 3+PE(내면)'로, 멸균팩은 'PE(인쇄면)+펄프+PE+알루미늄+PE+PE(내면)'로 구성된다. 겉으로는 동일해 보여도 사용한 재료가 다르기 때문에 섞이게 되면 재활용하기가 힘들어진다.

류정용 강원대 교수는 "종이팩을 재활용하기 위해서 물에 푸는 과정(해리)이 필요한데, 살균팩과 멸균팩은 해리 속도가 다르다"며 "멸균팩 살균팩을 각각 풀어내면 고민할 게 없지만 섞여 있어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종이팩은 압축과 해리 등의 과정을 거쳐 두루마리 화장지로 재활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멸균팩 등이 섞인 두루마리 화장지의 경우 미세한 알루미늄 입자가 박혀있게 돼 시장 선호도가 떨어져 경제성이 낮다. 멸균팩의 알루미늄 성분과 PE코팅 수준 차이로 살균팩과 혼합 재활용이 어렵다는 게 현장의 얘기다.


사실 저조한 종이팩 재활용 실적은 하루이틀 문제는 아니다. 종이팩 재활용률은 지난 5년간 10~20%대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최근 그 경향이 더 심해지고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환경부에 따르면 지난해 종이팩 재활용률은 15.8%로 2016년 25.7%보다 약 10%p 감소했다. 출고량은 2016년 6만8880톤, 2020년 6만6936톤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전문가들은 종이팩 재활용량 감소가 재활용이 어려운 멸균팩 출고량 증가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최근에는 비용절감을 위해 멸균팩에 미표백 황갈색 속지를 사용하는 경우도 늘고 있어 재활용 여건이 한층 어려워졌다는 분석이다.

◆종이로 만든 생수병이 재활용 어렵다? = 게다가 종이팩 재활용 실적은 점점 곤두박질치고 있는데 정작 소비자들의 친환경 의식은 높아지면서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플라스틱의 일종인 페트 대신 종이팩(멸균팩)으로 만든 생수병이 나오는 등 친환경 제품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들이 들려오지만 정작 종이팩 재활용업계에서는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미세플라스틱 문제 등을 줄이기 위해 페트 대신 종이로 생수병을 만드는 친환경 활동이 역으로 다른 분야의 재활용률을 끌어내리는 '이상 현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장은 "현재 종이팩 회수·선별 및 재활용 시스템에서는 멸균팩이 혼입될 경우 재활용하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그렇다고 멸균팩 사용량이 늘고 있는 추세에 역행해 멸균팩 사용을 금지하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인 만큼 정부는 멸균팩과 살균팩 분리배출·수거 시스템 구축 시기를 앞당기는 등 문제 해결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국순환자원유통지원센터의 '살균팩과 멸균팩 출고량 추이' 통계에 따르면 종이팩 중 살균팩 비중은 2015년 75%에서 2020년 58.7%로 급감했다. 반면 멸균팩 비중은 2015년 25%에서 2020년 41.3%로 껑충 뛰었다.

게다가 이 같은 추세는 계속돼 조만간 멸균팩과 살균팩 사용 비중이 역전될 거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앞으로 4~5년 내에 종이팩 출고량 중 멸균팩 비중이 절반 이상 될 것이라는 추정치도 있다. 환경부 의뢰로 배연정 서울대학교 그린바이오과학기술연구원 선임연구원이 연구 중인 재활용 시장 분석 중간 결과에 따르면 2025년 멸균팩 비율은 51.3%로 살균팩보다 많아질 전망이다. 또한 2030년에는 63.2%로 멸균팩 비중이 훨씬 높아질 것으로 예측됐다.

◆미국 60% 등 해외는 재활용 증가 추세 = 이처럼 종이팩 재활용에 어려움을 겪는 우리나라와 달리 해외는 관련 시장이 활성화되고 있다.

한국순환자원유통지원센터가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 의뢰한 '공동주택의 종이팩 회수·재활용 단계별 진단 및 개선방안 마련'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 종이팩 재활용률은 2015년 24%에서 2019년 26%로 꾸준히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국내 종이팩 재활용률은 전세계 평균보다 낮고 유럽 미국 캐나다 등 보다 저조한 상황이다. 2018년 유럽의 종이팩 재활용률은 49%, 미국은 60%, 캐나다 53% 등이다.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기에 우리나라와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종이팩 배출 단계에서부터 제대로 된 선별과 분리회수를 통해 재활용 효과를 높인다는 기조는 동일하다. '공동주택의 종이팩 회수·재활용 단계별 진단 및 개선방안 마련'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은 종이팩만 분리해 보관하는 선별박스나 선별백을 통한 회수를 확대하고 있다. 미국 역시 선별박스나 선별봉투를 통한 종이팩 회수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재활용품질을 높이기 위해 선별과정에 인공지능(AI) 로봇까지 도입했다. 캐나다도 종이팩만 분리해 보관하는 선별박스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국내 상황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들 국가는 우리나라와 달리 멸균팩과 살균팩 혼입 배출로 인한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다. 때문에 설사 종이팩을 다른 폐기물들과 분리해 배출하는 시스템을 정착시킨다 해도 우리가 겪고 있는 저조한 재활용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면밀하게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배 선임연구원은 "네덜란드 등처럼 멸균팩을 재활용하기 위해 국내에서도 한 업체가 크라프트지(갈색 종이봉투)로 재활용하는 방안을 시도했다가 품질 담보 문제 등으로 실패했다"며 "멸균팩 사용량이 워낙 많은 유럽과 달리 규모의 경제가 형성되지 않는 국내 시장에서 골판지와 비교했을 때 사용량이 현격이 적은 종이팩 재활용 설비를 따로 둘 기업들이 얼마나 있을지 고민해서 정책이 나와야 한다"고 지적했다.

배 선임연구원은 "시민들에게 멸균팩과 살균팩 분리배출 책임을 전가시킨다고 해서 100%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며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의 본디 취지를 제대로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종이팩 회수·선별 업체들이 자체적으로 멸균팩과 살균팩을 선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줘야 한다는 지적이다.

◆화장지 원단수입 증가, 악순환 반복 = 게다가 국내 멸균팩 비중이 늘면서 화장지 원료로 수입산 원단을 사용하는 비율이 높아지면서 그나마 있던 종이팩 재활용 수요처가 좁아지고 덩달아 재활용률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제지연합회와 수출입무역통계 자료 등에 따르면 화장지 원단 수입비율이 2016년 7.7%에서 2020년 16.9%로 2배 이상 급증했다. 반면 종이팩 재활용률은 계속해서 급감하는 추세다. 전문가들이 종이팩 재활용 시장 수요처 확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실제로 대만의 경우 종이팩을 화장지 재생원료(펄프) 뿐만 아니라 공원 벤치, 쇼핑백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재활용하고 있다. 종이팩의 알루미늄박을 자동차부품이나 건축자재, 가구 시멘트 및 에너지원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영국은 플라스틱필름 섬유 종이의 롤에 사용되는 산업용 코어와 튜브 등에 활용한다. 스웨덴은 종이팩의 폴리머와 알루미늄 성분을 회수해 다른 연료의 필요원으로 재활용하고 있다.

◆환경부 "지원금 차등화, 공공기관부터 의무 구입 추진" = 환경부도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해 종이팩 재활용 체계 개선을 위한 대책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환경부는 살균팩과 멸균팩의 재활용지원금(분담금)을 차등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또 종이팩 선별시 효율을 높이기 위해 업체에 광학선별기 설치 지원 등을 검토 중이다. 멸균팩 재활용이 불가능한 설비를 교체하기 위한 지원도 할 계획이다.

환경부는 "수요처 다변화도 추진 중"이라며 "재생화장지 외에도 사용한 종이팩 원료로 사용가능한 종이 종류를 더 발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양하게 개발된 재생 종이팩 활용 제품들이 시장에서 외면받지 않도록 공공기관부터 사용에 앞장서도록 할 방침이다. 재활용법과 환경표지인증기준 개정 등을 통해 공공기관 의무구매 근거도 마련할 계획이다.

김아영 기자 ay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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