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기업가의 야성' 돌아오나

2021-12-01 11:43:16 게재

벤처자본 투자 크게 늘어 … 이코노미스트지 "변화의 바람 분다"

'유럽은 상대적으로 기업가에게 적대적'이라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과거엔 정반대였다. 17세기 유럽의 절정기 당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자본에 대한 끝없는 갈망에 대중을 상대로 한 증권시장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투자자들은 식민지 원주민에 대한 가혹한 처우를 거리낌없이 자행하기도 했다.

20세기 들어선 로레알이 만들어졌다. 오늘날 가장 돈을 많이 버는 뷰티기업이다. 그리고 세계 최대 컨테이너 선사인 덴마크의 AP몰러머스크도 당시 탄생했다.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고용하는 독일 경제의 핵심 '미텔슈탄트'(중소기업) 대부분이 이 시기 창립됐다.


하지만 두번의 세계대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유럽대륙은 20세기 후반부 고성장을 일궈낼 기업들을 별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지난 30년 동안 미국은 4곳의 공룡기업들을 탄생시켰다. 구글과 아마존, 테슬라, 페이스북(현 메타)이다. 시가총액 1조달러를 넘었거나 곧 달성할 기업들이다.

반면 유럽 젊은 기업들의 경우 시가총액 1000억달러를 넘는 기업이 없다. 2000년대 에스토니아의 '스카이프'가 유력 후보군이었지만 2011년 85억달러에 마이크로소프트로 넘어갔다.

다른 유망기업으로 스웨덴의 음악 스트리밍 및 미디어 서비스 제공 업체인 '스포티파이'가 있지만 현 시가총액은 480억달러에 그친다. 유럽에서 그나마 미국 거대기업들에 가장 근접한 곳은 세계적인 소프트웨어 회사 'SAP'로, 마이크로소프트보다 3년 앞선 1972년 설립됐다. 그러나 현재 시가총액은 1/15에 못 미친다.

하지만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에서 "유럽 스타트업 부문에 변화의 바람이 세게 불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따르면 글로벌 벤처투자자들은 유럽 스타트업들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 아직은 창업자 창고에서 운영되는 곳이지만 차세대 구글이 될 가망이 있는 기업을 알아내기 위해서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한때 벤처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던 유럽 기업인들은 이제 실리콘밸리보다 고향인 유럽대륙에서 사업을 시작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새로운 벤처자본의 유입은 달라진 분위기를 반영하는 증거다. 10년 전 유럽 스타트업들에 대한 투자금은 전세계 벤처자본액의 1/10도 안됐다. 당시 전세계 대비 유럽의 GDP는 약 25% 정도였다. 올해 전세계적으로 벤처자본 투자액이 늘었다. 특히 유럽대륙에 많이 쏠렸다. 데이터제공업체 '딜룸'에 따르면 글로벌 벤처자본 투자액의 18%가 유럽으로 향했다. 역대 최고 비율이다. 덕분에 유럽 스타트업 가치가 크게 상승했다. 유럽대륙엔 이제 65곳의 '유니콘 시티'가 있다. 10억달러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는 민간 스타트업을 보유한 도시들을 뜻한다. 전세계 어느 대륙보다 많다.

과거 유럽대륙에 벤처투자가 부족했던 건 수익이 적었기 때문은 아니었다는 지적이다. 초기 모험자본 대비 총수익(현재 포트폴리오 가치+투자자 귀속 현금) 측면에서, 지난 20년 동안 설립된 유럽 벤처자본 투자펀드의 평균 수익률은 미국 벤처펀드의 수익률보다 크게 낮지 않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둔 벤처투자기업 '인덱스벤처스'의 대니 라이머는 "그럼에도 미국 벤처투자자들은 대개 유럽에 대해 '스타트업을 시작하기 적당한 곳'이 아닌 '가족들과 여름 휴가를 즐기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제는 생각이 바뀌고 있다. 애플과 구글, 왓츠앱, 유튜브 초기 시절 이들 기업에 투자했던 미국의 유명 벤처투자 기업 '세쿼이어'는 지난해 "영국 런던에 첫번째 유럽 사무소를 개설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유럽 내 파트너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미국의 다른 벤처투자 기업들의 고민도 할지말지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진출하느냐의 문제다. 조만간 세쿼이어의 선례를 뒤따를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세쿼이어의 마이클 모리츠는 "스카이프와 스포티파이 등 유럽 기업들은 미국 벤처기업들처럼 아찔할 정도의 높은 가치를 인정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기업들은 유럽에서도 성공적인 테크 스타트업을 시작할 수 있음을, 속도감 있게 규모를 키울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유럽에서도 젊고 영리한 인재들이 대학을 중퇴하거나 졸업한 뒤 기술 스타트업에 들어가는 것에 눈살을 찌뿌리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미국 벤처투자 기업들은 유럽 스타트업들이 유망한 인재들과 노련한 경영진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왔다. 노련한 경영진과 유망한 인재가 결합하면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설립된 많은 유럽 스타트업들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벤처투자 기업 '혹스턴벤처스'의 후세인 칸지는 "더 중요한 건, 유럽 스타트업들 중 틈새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한 기업들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포티파이는 음악 스트리밍에서, 핀테크기업 '클라르나'는 후불결제 부문에서, '유아이패스'는 로봇 자동화 부문에서 승기를 쥔 스타트업이다. 이 기업들은 유럽에 있다"고 덧붙였다. 이코노미스트지는 "기술업계에선 1등기업에만 막대한 자본이 쏠린다. 그런 상황에서도 유럽 스타트업들이 수익을 내고 있기에, 글로벌 투자자들은 유럽을 매력적인 전망을 가진 벤처투자처로 여기고 있다"고 전했다.

프랑스 기술기업가 겸 투자자인 그자비에 니엘은 "창업을 거듭하는 것이 핵심이다. 창업가들이 새로운 기업들을 많이 세우고 있다"며 "이는 보다 많은 기업가들, 보다 많은 인재들, 보다 많은 자본들, 보다 많은 성공들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프랑스 벤처사업가 라쉘 들라쿠르는 그의 첫번째 회사인 'BIME 애널리틱스'를 2015년 4500만달러에 매각했다. 프랑스 남부 몽펠리에에서 공동창업한 지 6년 만이었다. 그리고 나서 지난해 기업들이 탄소배출을 쉽게 추적할 수 있도록 돕는 스타트업 '스위프'(Sweep)를 창업했다. 들라쿠르는 "두번째 창업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글로벌 기업으로 키울 수 있는지'를 처음부터 염두에 둘 수 있었다"고 말했다.

스타트업 창업 열풍이 불면서 직원이자 주주인 경우가 늘고 있다. 인덱스벤처스가 최근 350개 유럽 스타트업들을 분석한 결과, 평균 15~17% 기업들이 사원주주 회사였다. 5년 전 이 비율은 10%였다. 물론 아직까진 미국에 못 미친다. 미국 스타트업 중 사원주주 기업 비율은 20~23%에 달한다. 인덱스벤처스의 라이머는 "스타트업들이 스톡옵션 등을 통해 보수 일부분을 주식으로 지급하면, 전통의 대기업들과 인재 확보 경쟁을 벌일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기술 트렌드 역시 창업 비용을 낮추는 한편 창업을 꿈꾸는 이들이 캘리포니아 대신 유럽 본국에서 사업 기반을 닦도록 도왔다. 예를 들어 과거 인터넷 기업을 일구려면 값비싼 대형 서버와 이를 저장할 사무실 공간을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클라우드 컴퓨팅의 도래로 스타트업들은 아마존웹서비스 같은 클라우드 기업들로부터 초대형 프로세싱파워를 빌릴 수 있게 됐다. 과거에 비해 훨씬 적은 규모의 사무실에서도 기업을 운영할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화상회의 플랫폼 '줌'이 확산되면서, 스타트업과 투자자 사이 지리적 인접성의 중요성이 크게 낮아졌다.

그러나 유럽의 기업가 정신 르네상스를 두고 두가지 의문이 뒤따른다는 분석이다. 첫째는 유럽 스타트업들에 쏟아지는 자본의 성격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 금융시장엔 유동성이 물밀듯 쏟아지고 있다. 전세계 4대 경제국 중앙은행들이 모두 합쳐 9조달러 이상 현금을 글로벌 금융시스템에 주입했기 때문이다. 이는 채권수익률을 크게 낮췄다. 수익에 목마른 투자자들은 안정적 수익 가능성은 낮지만 대박이 날 경우 막대한 이익을 취할 수 있는 스타트업계로 눈을 돌렸다. 유럽대륙의 벤처기업들이 수혜자가 됐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하지만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본격적으로 유동성 규모를 줄일 경우 안전자산인 채권수익률은 다시 오를 전망이다. 유럽의 벤처자본 투자 붐이 빠르게 냉각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의문은 유럽의 스타트업들이 미국의 기술 거대기업처럼 자체적인 생태계를 구축할지, 아니면 중소 규모 기업에서 벗어나지 못해 유럽 이외 지역의 더 거대한 기업들의 인수합병 대상이 될지 여부다. 이는 유럽의 스타트업 르네상스가 한순간 타오르다 꺼질지, 아니면 지속적으로 확산할지를 결정하게 된다. 세쿼이어의 마이클 모리츠는 "관건은 사람들이 창업 자신감을 고양할 수 있도록 스타트업 성공사례가 꾸준하게 이어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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