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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원전 속도조절론'과 세계 전력시장 패러다임의 변화

2021-12-02 11:36:07 게재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

최근 탄소중립위원회의 2030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발표로 사회각계의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원자력계나 일부 언론은 "미국과 유럽도 원전으로 회귀한다"며 '탈원전 속도조절론'을, 야당들은 '탈원전 폐기, 신규원전 건설'을 주장한다.

정치평론 수준에서만 본다면 원전확대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자는 논리는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는 세계 전력시장 패러다임 변화를 잘 모르는 데 따른 순진한 주장이다.

과거 전력시장은 '경제급전' 원칙에 따라 연료비가 저렴한 순서인 원전 석탄 가스발전 순으로 발전하는 관행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연료비 '제로'의 재생에너지가 등장하며 원전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증가한 국가들에서는 연료비를 발생시키면서도 출력조절이 어려운 어중간한 원전이 전력망 운영에 장애요인으로 떠올랐다.

전력망은 수요변화에 맞춰 공급량도 실시간으로 변화해 균형을 유지해야 정전이 일어나지 않는다. 실시간 출력조절이 안되는 원전은 그동안 가스발전 양수발전 등 이른바 '유연성' 발전기들이 대신 실시간 출력조절을 통해 수요공급 균형을 맞췄다.

전력망 운영 장애요인이 된 대형원전

그러나 지난 10년간 세계적으로 태양광 풍력처럼 실시간 출력조절이 어려운 재생에너지가 증가하며 기존 유연성 발전기들이 더 이상 원전을 챙겨줄 여유가 없는 시대로 변화했다.

예를 들어 지난해 영국은 전력망 안정을 위해 무려 5개월간 대형원전인 사이즈웰 원전의 출력을 50%로 낮춰 운전했다. 재생에너지 공급비중이 38%로 증가한 데다 유연성 발전기들의 가동량이 낮아진 상황에서 전력망의 '최대 단일 상정사고'인 대형원전 불시정지가 발생할 경우 정전사태로 이어지기에 애초부터 원전출력을 낮춰 전력망의 충격을 최소화하려 한 것이다.

수요하락으로 원전출력을 낮춘다는 것은 과거 상상도 못 했던 일인 데다 약 1200억원의 막대한 손실을 감수한 조치였다.

미국 캘리포니아는 이미 2016년 캘리포니아의 마지막 원전인 디아블로원전조차 수명연장없이 2025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외형적으로 후쿠시마사고 이후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이 결정의 원인으로 부각되었지만, 당시 전력당국은 이미 재생에너지가 증가하는 전력망에서 원전 운영이 어렵고 유연성 기술로 대체해야 한다는 기술검토를 마친 상태였다.

일각의 "미국과 유럽의 원전회귀" 주장도 실상은 대형원전 건설이 아니라 모두 소형원전(SMR) 연구개발 지원계획들뿐이다. 이는 SMR의 상용화 전망이 밝아서가 아니다. 재생에너지로 변화된 전력망의 현실을 절감한 선진국들이 전력망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원전정책이기 때문이다.

국내에는 24기의 원전이 가동중이고, 2030년에도 21기가 남게 되며 이중 6기는 특대형 원전들이다. 선진국들 대비 국내 원전비중은 훨씬 높아 재생에너지가 증가하는 전력망에서 기술·경제적 부담으로 인해 추가적 대형원전 건설은 비현실적이다.

SMR의 경우도 우리 정부는 이미 지난 25년간 이른바 '스마트원전'의 개발을 지원해왔고, 최근 SMR개발에 5800억원의 추가 투자계획도 밝혔다. 그러나 SMR은 원자력계의 주장과 달리 아직 에너지계획에 반영하기 어려운 연구개발단계의 기술이다.

반면 재생에너지 확대는 선택이 아닌 필수조건이 되었다. 애플 구글 BMW 등 340여개 글로벌기업들이 이미 5년전 기업경영 기준으로 'RE100'을 선언한 이후 국내 전자, 자동차 업체들 역시 재생에너지 100% 달성계획을 제출하지 않으면 수출하기도 어려워진 상황이다.

탄소중립 신질서에 적응 필요한 시점

우리는 지난 반세기동안 악조건에서도 국제환경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면서 눈부신 성장을 해왔다. 이제는 탄소중립이라는 신질서와 전력시장 패러다임의 변화 앞에 어렵지만 또다른 적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미 국내 기업들과 연구소들은 설치공간의 제약을 없애주는 태양광 신재료, 중동의 수소생산 설비사업, 암모니아로 변환된 수소를 운반하는 암모니아추진 선박 분야에서 세계 선두권에 있다. 우물 안 개구리식 정치공방으로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이들의 혁신을 지원하고 독려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