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진단

인물정치의 끝판왕, 필리핀 대선

2021-12-02 11:31:29 게재
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 정치외교학과

필리핀은 선거의 나라다. 선거로 뽑는 선출직 공무원 수가 30만명을 훌쩍 넘는다. 우리 대선 날짜의 정확히 두달 뒤인 내년 5월 9일, 대통령과 부통령, 상원의원 1/3과 하원의원 전원, 그리고 주지사 시장 군수 구청장, 주·시·군·구의원까지 1만8000여명을 뽑는 대선과 총선이 동시에 실시된다. 나머지 29만4000여명은 기초자치단체 선거에서 뽑힌다. 우리의 지방선거는 군과 구 단위까지 내려가지만 필리핀은 동, 리 단위보다 더 아래 '자연마을'(바랑가이, baran-gay)의 촌장과 운영위원, 심지어 청년회 간부까지 선거로 뽑는다.

선출직 임기도 각양각색이다. 정·부통령과 상원의원은 6년, 주지사 하원의원 지방의원 그리고 바랑가이 캡틴은 3년, 바랑가이 위원은 5년 이런 식이다.

독특한 점은 모든 선출직에 임기 제한을 두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단임, 부통령과 상원의원은 연임 1회로 제한하며, 주지사와 하원의원을 포함한 다른 선출직은 세번 연속 당선되면 그 다음 선거엔 출마할 수 없다.

그러나 연임 횟수만 제한하지 총 재임 횟수나 연수를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임기제한이 걸리면 다른 선출직으로 옮겨가고, 거기서 연임제한에 이르면 또 다른 선출직으로 옮겨가거나 원래 자리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주지사를 연임한 뒤, 그 자리는 자기 친인척에게 잠시 넘겨주고 자신은 상하원 의원을 한번 한 뒤, 다시 주지사로 복귀한 예도 흔하다.

이렇다 보니 지방정치는 지역의 유지·토호 가문으로 구성된 이른바 '정치왕가들'(political dynasties)에게 장악되고 말았다. 지방정치에서 경력을 쌓은 명문가 출신들이 마닐라의 중앙정치와 중앙정부로 진출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두테르테 정치왕가의 교통정리

여섯달 뒤로 다가온 제17대 대선에서도 예외없이 정치왕가들이 등장한다. 43세의 사라 두테르테(Sara Duterte-Carpio) 다바오시장은 불과 두달 전까지만 해도 대통령 출마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인 현 두테르테(Rodrigo Duterte) 대통령의 권유도 있고 당시 여론조사에서도 1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후보등록일을 한달 앞둔 9월 대선에 나서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대통령 단임제 제한에 걸린 아버지가 부통령에 출마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재임 중 저지른 각종 범죄행위, 특히 최소 8000명의 마약사범을 법적 절차 없이 처단한 행위로 퇴임 후 처벌받을 위험에 처해 있다. 10월 2일 결국 사라는 다바오시장직 선거에 재출마하기 위해 등록을 마쳤다.

그런데 정작 아버지인 두테르테 대통령은 차기 부통령후보로 등록하지 않았다. 딸의 인기가 높아 대통령이나 부통령에 출마하면 당선될 가능성이 있다고 봤을 것이다. 11월 들어 다바오와 세부에 근거지를 둔 이 '왕가'의 교통정리가 끝났다. 사라는 시장직 후보를 사퇴하고 대신 다바오 현직 부시장인 동생 세바스찬(Sebastian Duterte)이 시장직에 출마할 것이며(11월 9일), 자신은 아버지가 출마하려고 했던 부통령 선거에 나선다고(11월 13일) 연속 발표했다. 그러는 사이 사라는 소속정당을 세 차례나 바꿨다. 아버지 두테르테는 후보교체 등록 마지막 날인 11월 15일 상원의원 후보 등록을 마침으로써 '두테르테왕가'는 불멸의 서곡을 알렸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름 전 이야기에 불과하다. 사라가 부통령 출마를 선언하자마자, 10월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대통령후보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2세 (Ferdinand R. Marcos, Jr.)의 러닝메이트가 되기로 합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봉봉은 20년간 필리핀을 철권통치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외아들로, '마르코스왕가'의 근거지인 일로코스노르테주에서 하원의원 주지사 상원의원을 두루 거친 뒤, 2016년 부통령선거에 출마해 0.64% 차이로 낙선한 바 있다.

하지만 딸과 달리 아버지 두테르테 대통령은 '봉봉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지금으로서는 내분인지 연막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정당들이 왕가의 인물에 밀려 힘을 못쓰는 필리핀정치는 거래와 타협, 이합집산이 너무 흔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현재의 여론조사 결과로 여섯 달이나 남은 대선 결과를 점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대통령 후보는 97명 부통령 후보는 29명

흔히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하지만 선거는 '민주주의의 그 자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는 핵심 제도로, '꽃'이라는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 그런데 필리핀에서 선거란 정치의 전부이고 '과잉적'이기까지 하다. 필리핀 선거의 특징으로 흔히 3G를 언급한다. 총기(Guns)와 건달(Goons), 금(Gold)으로, 폭력과 정치브로커, 금권선거가 판을 친다는 의미다. 총기소유가 비교적 자유로운 필리핀에서는 선거 때마다 총에 맞아 죽는 사람들의 수가 수백명에 이른다. 정치브로커나 금권은 필리핀뿐만 아니라 동남아 선거의 일반적 특징이기도 하다.

필리핀 선거는 '인물정치'(personality politics)에서 진면목을 드러낸다. 우리도 한때 3김시대가 있었지만, 필리핀에선 여전히 정당이 허울에 불과하고 인물이 핵심이다. 마르코스 독재 이전까지만 해도 국민당과 자유당이 양당정치를 펼쳤다. 하지만 이젠 양당정치는 물론 정당정치 자체가 필리핀의 현실과 동떨어진 듯하다.

특히 1986년 민주화 이후 인물정치가 굳건히 자리잡았다. 그래서 사라 두테르테 후보도 매달 한번씩 정당을 만들었다 버리고, 바꾸거나 옮겨다녀도 인물은 전혀 상처를 받지 않았다. 이번 대선에 출마한 대통령 후보가 97명, 부통령 후보는 29명이다. 얼마나 엉터리 후보가 많으면 선거관리위원회조차 이들 중 30명을 빼고는 모두 '하찮은 방해꾼'(nuisance)이라고 했을까?

필리핀 선거는 그냥 '보통' 인물이 아니라 '유명한' 인물만을 중시한다. 정치왕가들처럼 명문가의 자손이거나 다른 분야, 특히 방송이나 연예 분야에서 명성을 얻어야 한다. 요즈음 말로 '셀렙'(celebrity)이 되어야 한다.

이번 대선 후보 중 선두그룹에 속한 셀렙으로는 세계복싱사에 전무후무하게 여덟체급 세계챔피언에 오른 파키아오(Manny Pacquiao) 상원의원과 영화배우 출신 이스꼬 모레노(Isko Moreno) 마닐라시장이 있다. 이 두 후보는 봉봉 마르코스와 함께 여론조사에서 탑4를 형성하고 있다. 남은 한 사람은 인권변호사 출신 여성인 로브레도(Leni Robredo) 부통령이다.

부통령 후보군에서 사라 두테르테의 유일한 경쟁상대인 소토 3세(Vicento Tito Sotto III)는 세부의 정치명문가 출신이기도 하지만 정계에 진출하기 전 방송인, 가수 겸 작곡가, 볼링선수로 이름을 크게 날린 셀렙이었다. 이전에는 부패혐의로 쫓겨난 13대 대통령 에스트라다(Joseph Estrada)가 유명한 전직 배우였다.

엘리트정치에 대한 염증이 셀럽 선호로

그렇다고 대중적 인기만을 가진 유명인사들이 필리핀 정치와 선거를 좌지우지한다고 보는 것은 피상적인 해석이다. 필리핀 선거는 사회구조 선거제도 정치문화의 산물이며 후보의 인기도와 당선에도 국민들의 요구와 명령, 기대와 희망이 담겨 있다.

마르코스 이전 필리핀의 민주주의는 지역의 명문가들이 돌아가며 중앙정치를 장악하던 과두제적 엘리트 민주주의였다. 선거는 형식에 불과했다. 그러나 필리핀인들이 '혁명'(EDSA Revolution)으로 부르는 1986년 민주화 이후, 엘리트정치에 염증을 느낀 대중들의 열망이 선거에 반영되어 새로운 부류의 정치인들이 정치무대에서 힘을 얻어 가고 있다고 봐야 한다.

다만 진정한 개혁세력이나 정책지향적인 정당이 아닌, 셀렙 출신 인물들이 이 새로운 정치의 첫 무대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