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론 파산 20년 … 투자자 여전히 취약

2021-12-03 11:36:49 게재

BBW "데이터 자동처리, 대면 회계실사 실종에 회계조작 적발 어려워져"

20년 전 오늘(미국 현지시각 2일) 미국 7대 기업 중 하나인 엔론사가 파산했다. 자본시장은 충격에 휩싸였고, 엔론의 재무제표 실사를 담당했던 미국 5대 회계법인 아서 앤더슨 역시 1년 뒤 해체됐다. 엔론사태는 역대 최악의 회계부정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향후 그같은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기업 회계감사에 대한 새로운 법률과 규정이 제정됐다.

20년이 흘렀다. 미국에서 엔론사태와 비슷한 규모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BBW) 최신호는 "당시와 비교해 현재 투자자들이 더 안전해졌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엔론사태 당시 아서 앤더슨은 이미 여러 건의 회계장부 사기 사건에 휘말렸다. 미국 최대 폐기물 처리업체인 '웨이스트 매니지먼트', 가전제조기업 '선빔프로덕츠', 종교자선단체 '애리조나 뱁티스트재단' 등이었다. 곧 더 거대한 사기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서 앤더슨의 또 다른 고객사인 통신업체 '월드컴'이었다. 웨이스트 매니지먼트 회계부정 사건의 책임을 물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아서 앤더슨에 700만달러 벌금을 물렸고, 앤더슨의 4개 파트너사를 제재했으며, 추가적인 사건의 발생을 막기 위해 영업 금지명령을 내렸다.

엔론사태가 불거지자 아서 앤더슨의 휴스턴 지점은 증권거래위원회 조사에 앞서 엔론사의 회계장부와 문서 등을 파쇄했다. 대중의 분노가 극에 달하자 미 법무부는 아서 앤더슨을 공무집행방해죄로 고발했다. 분쟁합의 과정에서 정부측은 아서 앤더슨이 일부 범죄를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앤더슨 경영진은 '그 어떤 법 위반도 없었다'며 이를 부인했다. 휴스턴법원은 2002년 앤더슨에 유죄를 선고했고, 미국 5위 회계법인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앤더슨에 대한 기소와 유죄 판결은 회계법인 업계를 뒤흔들었다. 기업 감시자여야 할 회계법인들은 사실상 고객기업들이 원하는 느슨한 회계관행을 가능케 해주는 조력자로 기능했다. 2002년 7월 기업회계개혁법인 '사베인스-옥슬리법'(Sarbanes-Oxley Act)이 제정됐다. 회계법인의 감독 의무를 한층 강화해 기업의 회계부정 여지를 크게 줄였다. 이후 수년 동안 앤더슨 파산의 망령은 회계법인 업계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2003~2005년 기업들의 재무제표 수정 사례가 크게 늘었다. 사베인스-옥슬리법과 매의 눈을 갖게 된 회계법인들이 기업의 그릇된 회계부정 관행을 몰아내는 듯 보였다.

하지만 2005년 미국 대법원은 '증거부족'을 이유로 아서 앤더슨에 대한 하급심의 유죄판결을 뒤집었다. 8만5000명을 고용하던 미국 5위 회계법인을 파산에 이르게 한 미 법무부는 당황했다. 대법원의 무죄 판결 이후, 미 정부는 딜로이트와 언스트앤드영(EY), KPMG,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 등 빅4 회계법인에 대한 조사와 기소를 주저하게 됐다.

예를 들어 절세라기보다 탈세에 가까운 기법과 상품을 판매한 혐의를 받았던 KPMG에 대해 미 정부는 2005년 기소유예를 선택했다. BBW는 "당시 기소됐더라면 KPMG는 치명타를 입었을 수 있다는 분석이 많았다"고 전했다.

회계감사와 컨설팅의 부적절한 결합

글로벌 금융위기의 뇌관으로 2008년 9월 파산한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는 '레포 105'(Repo 105)라는 악명 높은 회계부정 기법을 애용했지만 미 증권거래위원회로부터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레포 105는 일종의 환매조건부 채권 매매로, 현금 100달러를 빌리면서 105달러 상당의 채권을 담보로 제공한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2010년 3월 리먼브러더스 붕괴 원인을 규명하는 2200쪽짜리 보고서가 공개되면서 레포 105가 세상에 알려졌다. 보고서에 따르면 액면가 105달러짜리 채권을 담보로 100달러의 돈을 빌릴 경우 회계장부에 부채로 계상해야 하지만, 리먼브라더스는 이를 자산매각으로 처리해 부채를 숨기고 100달러의 현금만을 계상하는 방식으로 회계장부를 조작해 부채규모를 줄였다. 이를 감시하고 막아야 할 회계법인 EY는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뉴욕주에 1000만달러 벌금을 내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1998~2001년 증권거래위원회 수석회계사였던 린 터너는 "글로벌 4대 회계법인들은 대마불사처럼 행동하고 영업한다. 이를 규제해야 할 당국은 거대 회계법인이 조사와 기소 때문에 파산하는 게 아닐지 먼저 걱정한다"고 비판했다.

빅4 회계법인은 '지난 10년 동안 월드컴 규모의 회계부정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회계감사업계가 자정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BBW는 "최근 몇년 동안 제약사 '밸리언트', 스포츠의류기업 '언더아머', 식품제조기업 '크래프트 하인즈' 등이 회계부정 또는 부정의심 사건들에 연루된 사실은 회계법인 업계의 감시 시스템이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점을 증명한다"고 지적했다.

1990년대 다국적 회계법인들은 고객 기업들에게 다양한 사업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매출을 늘리기 시작했다. '회계법인은 감사를 통해 고객사의 사업활동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때문에 사업 확장이나 영역 확대 등에 대해 객관적 조언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대세로 자리잡았다.

기업과 회계법인의 관계가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회계법인에 대한 고객사의 입김이 커졌다. 앤더슨과 엔론과의 관계가 대표적 사례다. 2000년 엔론은 앤더슨에 주당 100만달러 이상의 보수를 지급했다. 앤더슨은 회계감사뿐 아니라 엔론사의 사업 전반에 자문과 조언을 제공했다.

같은 해 미 증권거래위원회 아서 레빗 위원장은 '회계법인들이 회계와 컨설팅 중 하나만을 선택'하도록 강제하는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워싱턴 정가에 회계법인들의 로비가 쇄도했다. 의원들과 저명한 기업 대표들이 증권거래위원회에 서한을 보내 그같은 주장을 철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엔론 CEO 케네스 레이도 2000년 9월 레빗 위원장에 서한을 보내 "앤더슨사는 회계감사뿐 아니라 컨설턴트로서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며 "기업 내부와 외부 일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회계법인보다 더욱 효율적으로 일하고 더욱 저렴한 보수를 제시한다"고 주장했다.

사베인스-옥슬리법은 회계법인이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 유형을 제한했다. 이를 계기로 빅4 회계법인 중 3곳은 컨설팅 서비스 부문을 없앴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방침을 바꿨다. 사업 컨설팅 기업을 인수해 다시 수익원천을 늘렸다. 이해관계 충돌 우려가 재발했다.

사베인스-옥슬리법으로 '상장기업회계감독위원회'라는 새로운 규제기관이 탄생했다. 10여년 동안 이 위원회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트럼프행정부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트럼프행정부가 임명한 위원들은 빅4 회계법인의 비위를 적당히 눈감아줬다. 회계감사에 경험이 없는 정치인이 상장기업회계감독위원장에 임명되자 행동주의 투자자들은 '회계법인 업계의 이익만 대변한다'며 거세게 비판했다. 바이든행정부가 임명한 증권거래위원장 게리 겐슬러는 상장기업회계감독위원들을 물갈이했다.

암호화폐 익명성, 회계업계엔 난제

최근 급격한 상황 변화로 회계감사 업무가 과거보다 더욱 힘들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글로벌 기업들은 지난 20년 동안 급격히 몸집을 키웠다. 때문에 회계법인들은 감사업무를 위해 기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졌다. 예를 들어 미리 정해진 시간에 고객사로부터 미가공 데이터 뭉치를 받아 맞춤형 분석프로그램에 넣어 돌리는 것 등이다. 회계법인들은 글로벌 제조사들과 마찬가지로 회계감사 오프쇼어링(업무의 해외 이전)을 단행하고 있다. 인건비가 미국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빅4 회계법인들은 인도 벵갈루루 등에 지사를 두고 통상적인 세금처리 업무와 회계감사 장부 분석업무를 위탁한다.

때문에 회계감사 인력과 기업 경영진과의 대면 접촉기회가 크게 줄었다. 이는 보통 회계감사의 주요한 부분으로 간주되는 대목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런 흐름을 가속화했다. 회계감사인과 고객사 경영진의 원격회의는 이제 표준으로 자리잡고 있다. 회계업계 전문가들은 고객사 현장에서 대면 만남이 줄어드는 것에 우려를 표한다. 회계감사인들이 현장에서 중간관리자나 직원들과 관련 대화를 나누면서 경영진의 부당한 지시 등을 파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같은 과정이 사라지고 있다.

뉴욕주 공인회계사협회에서 회계윤리 과정을 가르치는 데비 커틀러는 "원격 회계감사는 회계업계에 거대한 도전과제"라며 "줌 화상회의를 통할 수도 있지만, 대면만남을 대체하기엔 턱없이 못 미친다"고 말했다.

암호화폐 역시 회계업계에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하고 있다. 1999~2002년 아서 앤드슨의 파트너사였던 회계법인 '플로이드 어드바이저리'의 브라이언 로만은 "블록체인은 익명성을 원칙으로 한다"며 "회계감사인이 하는 일이란 자산을 확정하고 채권과 채무, 평가액 등을 검토한다. 이 모든 일은 '제3자의 객관적 확인'이라는 전통의 원칙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암호화폐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증권거래위원회 등 규제당국이 암호화폐 정보공개 규정을 제정해야, 회계업계가 이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회계법인들의 파산은 시장의 침체가 길어지면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닷컴버블이 꺼지고 엔론과 월드컴이 무너진 게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코로나19 팬데믹은 예외에 속한다. 부분적으로 미국 정부와 연방준비제도가 도움의 손길을 내민 거의 모든 기업을 구제한 덕분이다. 증권거래위원회 전 수석회계사 터너는 "과거의 역사를 보면 회계감사 업계는 약 30년 주기로 스스로 붕괴했다"며 "향후 10년 내 회계 부문의 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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