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종 칼럼

미중패권 경쟁도 바다가 가를 것

2021-12-07 12:38:00 게재
김수종 언론인, 전 한국일보 주필

"1905년 영국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를 결정지었다. 발트해에서 출발한 러시아 함대가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지 못하도록 차단함으로써 일본열도 근해의 전장에 합류하는 것을 방해했다. 러시아 함대는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가는 경로를 택해야 했으며 이 여정은 장장 8개월이나 걸렸다. 1905년 5월에야 러시아함대는 일본 근해에 도착해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해군에 참패했다."

최근 지인의 소개로 읽은 책 '바다의 시간'(Histoires De La Mer)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한국 근대사에 치명적 상처를 안겨주고 일본을 세계 무대에 올라서게 한 러일전쟁의 일화가 눈길을 끌었다. 사실 러시아 발트함대는 당시 지중해를 지배하던 영국해군의 러시아 견제 전략에 의해 일부만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었고 주력함들은 희망봉을 돌아 마다카스카르에서 합류해서 극동으로 향했다. 일사불란한 작전체계가 절실했던 러시아 함대는 긴 항해로 누적된 피로와 보급 문제로 균열이 생기면서 일본 연합해군에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이 책은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저술가 자크 아탈리가 2017년에 펴낸 저서다. 좌파 미테랑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우파 사르코지 대통령의 성장촉진위원회 위원장 등 여러 정권에서 정부 요직을 맡았던 아탈리는 국가 흥망성쇠의 관점을 바다에 맞추고 세계사를 바라봤다. 내용은 해양사의 개괄적 서술이지만, 인류 역사를 바다의 시각에서 종합적으로 조명했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적지 않다. 세계 역사 전개를 평원에서 펼쳐지는 보병대와 기병대의 이동 관점에서 읽어서는 안되고 바다와 항구에 대한 통제권을 누가 잡고 있는지를 보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영국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이유

아탈리는 프랑스인이면서도 바다를 지배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를 계속 놓쳤던 프랑스의 전략적 실패를 냉정하게 짚어낸다. 특히 14~15세기 영국과의 100년 전쟁은 해전에서 4차례나 엎치락뒤치락했다. 프랑스는 모든 좋은 조건을 갖췄는데도 이 전쟁의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해군 발전이나 항구 건설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반면 영국은 빠른 속도로 해군을 발전시키고 런던과 리버풀에 항구를 건설했다. 전쟁의 교훈을 바다에서 배운 영국이 해양을 제패하는 대영제국의 기반을 닦았다는 것이다. 아메리카 식민지 건설을 놓고도 프랑스가 미국남부와 캐나다를 차지하는 등 우위에 있었는데도 7년 전쟁의 해전에서 영국에 패함으로서 식민지 건설 주도권을 영국에 내주었다는 게 아탈리의 해석이다.

아탈리는 미국 독립의 역사도 바다가 결정했다고 본다. 1774년 미국독립선언이 영국군의 필라델피아 점령으로 하마터면 수포로 돌아갈 뻔했지만 프랑스 해군의 참전으로 영국해군이 패퇴하면서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제 세계의 관심은 미중패권에 쏠려있다. 여기에 세계의 평화뿐 아니라 인류의 생존이 걸려있는지도 모른다. 체제의 운명을 건 싸움이다. 40년 전 굶주림으로 얼룩졌던 가난한 인구 대국에서 G2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은 국제 정치에서 미국 등 서구가 만든 규범에 강력히 도전하고 있다.

아탈리는 이렇게 전망한다. "미래세계의 경제 대권은 옛 경제의 새 초강대국 중국과 새 경제의 옛 초강대국 미국이 나누어 가질 것이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보았을 때 두 강대국이 마주치는 바다, 결국 중국 주변의 바다와 태평양에서 지정학적 긴장이 발생할 것이다." 이건 아탈리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국제정치 전문가들이 공유하는 견해다.

주변의 바다란 바로 남중국해와 동중국해다. 두 바다를 합치면 넓이가 500㎢나 되는 광대한 해역이다. 중국은 이 두 바다를 내해로 삼고 태평양과 인도양으로 제해권을 확대해 나갈 요량이다. 중국은 3번째 항공모함 건조를 비롯해 막대한 예산을 해군력 증강에 투입하고 있다. 또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연안에 바짝붙여 소위 '9단선'을 일방적으로 설정하고 작은 암초를 인공섬으로 개조해서 비행장 등 군사기지를 만들었다.

대만은 남중국해와 동중국해 경계 상에 있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제해권이 미국보다 월등하게 우위에 서면 대만의 존립에 치명타가 될 것이다. 중국이 대만을 무력점령한다면 그 파장은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또한 남중국해와 동중국해는 한국의 생명줄인 상품 원자재 에너지 수송로다.

한국 바다의 중요성도 새롭게 정리해야

한국도 아탈리가 주장하는 바다의 중요성을 새롭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바다가 조선의 운명을 결정했다. 임진왜란을 단순히 조선과 일본의 전쟁으로 좁혀서 볼 게 아니라 국제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순신의 수군 승리에서도 전략적 가치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국가를 이끌겠다는 정치지도자들이 똑똑한 참모를 데리고 많은 생각을 나누겠지만, 전략적 사고와 함께 바다에 대한 현명한 투자를 구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김수종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