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스타트업, 중국그늘 벗고 비상할까
370억달러 상장 그랩 성공 여부 주목 … 중국 주춤한 새 아세안 기업 활기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거대 신흥시장을 배경으로 한 소비자기술기업들이 중국 밖에서 대거 등장할 것이라는 글로벌 투자자들의 오래된 희망을 동남아시아가 충족시키고 있다"고 전했다.
이달 2일(현지시각) 싱가포르 기업 '그랩'이 기업인수목적회사(SPAC) 합병을 통해 미국 나스닥에 상장했다. 370억달러 가치를 인정받았다. 스팩 합병을 통한 기업가치로는 역대 최고다. 또 다른 스타트업 '고투그룹'은 내년 상반기 같은 방식으로 상장할 계획이다. 이 기업은 인도네시아 승차공유기업 '고젝'과 전자상거래 기업 '토코피디아'가 합병해서 만들어졌다. 3개 스타트업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씨'는 2017년 가장 먼저 상장한 바 있다. 씨는 싱가포르 전자상거래 기업 '쇼피'의 모기업이기도 하다. 씨의 시가총액은 2019년말부터 7배 올라 현재 1450억달러를 기록중이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상장사다.
이들 3개 기업은 승차공유와 식음료배달, 금융서비스, 모바일게임 등 다양한 서비스를 한데 묶어 제공한다. 어떤 서비스를 조합하느냐는 기업마다 다르다. 하지만 사업의 핵심개념은 동일하다. 애플리케이션 하나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며 수억명의 소비자를 자사의 서비스 네트워크로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이는 '슈퍼앱' 또는 '앱클러스터' 전략으로 불리는데, 저마진이긴 하지만 막대한 거래량으로 만회할 수 있다.
각 기업들은 본국에선 이미 거대기업이다. 200만명 이상 운전자를 확보한 고투그룹은 지난해 220억달러 매출을 기록했다. 인도네시아 국내총생산(GDP)의 2%에 해당한다.
동남아시아 소비자테크기업 기상도는 지난 10년 동안 '맑았다' '흐렸다'를 반복했다. 현재 세를 불리고 있는 낙관론자측에선 빠른 경제성장을 이룰 준비가 된, 6억5000만명의 광활한 시장을 지목한다. 모간스탠리 증권분석가인 마크 굿리지는 "2019년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회원국의 전체 소매판매의 6%가 온라인소매였다. 같은 기간 미국은 15%, 중국은 30%였다"고 지적했다. 온라인 부문의 성장잠재력이 그만큼 크다는 것.
반면 회의적인 사람들은 동남아시장의 분절적 특성을 지적한다. 아세안 시장이 균일한 경제블록은 아니라는 것. 나라별 소득수준과 인프라 용량이 큰 격차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씨와 고투, 그랩 등 3개 기업의 손실은 지속적으로 쌓이고 있다. 올해 3분기 씨의 손실은 5억7100만달러였다. 전년 동기 대비 손실이 30% 이상 늘었다. 2018년 이후 그랩과 씨의 순손실을 합하면 170억달러에 달한다.
지속적으로 손실을 보지만 글로벌 투자자들은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그동안 투자자들은 동남아시장에서 기업간 합종연횡이 활발히 이뤄지길 원했다. 그래야 투자매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대개는 성사됐다. 동남아 기술기업들의 인수합병 활동은 올해 폭증했다. 올해 11월말 기준 인수합병 거래규모는 610억달러에 달했다. 지난 10년 간 인수합병액과 비슷했다. 그같은 거래 덕분에 소비자가 선호하는 슈퍼앱 전략이 가능해졌다.
고투그룹 대표인 패트릭 카오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건 더 빠르고, 더 깊이 있는 디지털 해법이다. 이는 분절된 방식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 소비자들은 6개의 디지털지갑을, 5개의 전자상거래 앱을, 3개의 식음료배달 서비스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고투그룹과 그랩, 씨는 강력했던 미국과 중국 경쟁기업을 밀어내면서 성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중국 알리바바가 전자상거래기업 '라자다'를 통해 여전히 동남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2년 전 시장을 주도하던 것과는 크게 달라졌다. 현재는 2선으로 밀려있는 상태다. 미국 우버는 2018년 시장에서 퇴각했다. 그랩이 우버 동남아본부를 인수했다. 미국 기업들은 전자상거래나 승차공유와 관련해 동남아에서 존재감을 상실했다.
인수합병과 그에 따른 규모의 경제는 이론상 이익으로 이어진다. 서비스를 한데 묶을 수 있고, 각기 다른 서비스들이 서로를 보완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랩 대표 밍 마는 "올해 2분기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태국의 이륜차 운전자 66%가 배달·배송 또는 운수송에서 일하고 있다. 전년 동기 58%에서 상승했다. 덕분에 코스트를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익전환은 얼마나 빨리 이뤄질 수 있을까. 그랩이 승차공유나 식음료배달이 성사됐을 때 수수료 명목으로 떼어가는 비율은 2018년 각각 9.5%와 5.6%였다. 올해 3분기는 각각 21.7%, 17.1%로 증가했다. 그랩이 선호하는 수익측정 잣대는 '이자·세금 및 감가상각 전 조정수익'이다. 이는 그랩이 자사의 재무상태를 보다 양호하게 보이도록 선택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승차공유 사업에서 그랩의 마진율은 최소 12%다. 우버의 5.5%보다 두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때문에 수익이 안나는 이유가 확장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라는 그랩의 주장은 나름 타당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랩과 씨, 고투 모두 금융서비스를 슈퍼앱 전략에 보태겠다는 계획이다. 이는 수익으로부터 더 멀어질 수 있다. 신용평가기관 무디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그랩의 금융서비스 편입 목표는 기업의 수익을 더 낮추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동남아 테크붐이 이들 3개 기업에만 한정된 건 아니다. 크레딧스위스에 따르면 아세안 국가들 내엔 10억달러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는 유니콘 기업이 35개 있다. 그중 19개 기업은 올해 유니콘 자격에 올랐다.
스타트업 투자기업 '아시아 파트너스'의 닉 내쉬는 "미국과 중국이 수백개의 유니콘 기업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 역시 지난 수년 동안 급속하게 이뤄진 일"이라며 "미국의 경우 2013년, 중국은 2014년 각각 단 10곳의 유니콘 기업을 보유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스타트업은 지속적으로 손실을 낸다는 예상을 깨는 기업들도 있다. 국가간 소매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싱가포르 'SCI이커머스'는 국제적 브랜드 기업들을 동남아와 동아시아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돕는 곳이다. 이 기업은 현재 동남아 지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기업 중 하나다. 글로벌 투자자들로부터 7000만달러 가까운 자금을 끌어들였다. 지난해 매출은 1억달러를 넘었다.
동남아시아에서 등장한 신흥 기술기업들이 승차공유나 소비자 전자상거래, 식음료배달, 온라인게임 등 일부 분야에서만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앞으로의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의사의 영상 진찰 서비스를 원격으로 제공하는 싱가포르의 '닥터애니웨어'와 중고차 거래 온라인장터인 말레이시아의 '카섬' 등 다양한 기업들이 상장을 준비중이다.
현재 대부분의 관심은 동남아시아 최선두 3개 기업인 씨, 고투그룹, 그랩에 쏠려 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관심사는 씨다. 최근 씨의 사업확대 움직임은 두드러진다. 씨의 게임 자회사 '가레나'는 '프리파이어'라는 모바일 게임을 운영중인데,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전자상거래 해외 확대도 주목할 만하다.
미국 보스턴 소재 리서치기업인 '앱토피아'에 따르면, 씨의 전자상거래 자회사 쇼피는 2019년 말 중남미에 진출했고, 지금은 가장 인기 있는 전자상거래 앱으로 발돋움했다. 올 가을 폴란드와 스페인에 상륙한 데 이어 인도에도 발을 들여 빠르게 이용자를 확보중이다.
동남아 기술기업들은 다른 곳에서 이미 검증된 사업모델을 따르고 있다. 중남미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인 '메르카도리브레'나 한국의 카카오, 쿠팡 등이다. 카카오와 쿠팡의 시가총액은 각각 500억달러 정도 된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중국의 기술부문 혼란상을 고려하면, 카카오와 쿠팡 등의 기업은 앞으로도 계속 인기를 얻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아시아 투자에 초점을 맞춘 JP모간체이스의 퍼시픽테크놀로지펀드는 15억달러 자산을 운용중이다. 올해 9월말 기준 이 펀드가 운용중인 4대 기업지분 중 중국 기업은 없다. 가장 큰 지분은 싱가포르 씨로, 전체 운용자산의 7%가 할애됐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아시아 기술업계에 벌어질 상전벽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일 수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