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혁명, 충전인프라에 성패 달려
영국 이코노미스트 "현재 추세라면 공공충전소 부족 … 낙관론-비관론 혼재"
전기차를 구매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다. 배터리 가격이 떨어지면서 전기차 가격도 하락추세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에 따르면 올해 600만명 정도가 전기차를 구매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전체 자동차 구매자 중 8%에 불과하다. 전세계가 2050년 탄소중립에 다다르려면 전기차 비중은 2030년 2/3, 2050년 100%로 커져야 한다. 전세계 탄소 배출의 약 1/4은 교통에서 나오고 육상교통수단은 그중 3/4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많은 투자자들은 그같은 상황이 순조롭게 전개될 것으로 가정한다. 이를 뒷받침하듯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는 1조달러 기업이 됐다. 전기트럭을 만드는 미국 신생 전기차기업 '리비언'이나 중국 럭셔리 전기차 기업들도 자신감에 넘쳤다.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 역시 호황이다.
그러나 전기차 혁명에 커다란 걸림돌이 있다. 전기차 혁명을 격찬하는 사람들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다. 각국 정부들도 이제서야 비로소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 급증하게 될 전기차를 어떻게 충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전기차 혁명에 커다란 걸림돌
전세계 공공 전기차충전소는 130만곳이다. 이 정도로는 빠르게 늘어나는 전기차의 충전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분석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추산에 따르면 2030년까지 공공 충전소 4000만곳이 필요하다. 이를 달성하려면 그때까지 매년 평균 약 900억달러를 투자해야 가능한 목표다. 만약 탄소중립 목표를 맞추려면 전세계는 2050년까지 그보다 5배 많은 공공 충전소를 갖춰야 한다.
시장조사기업 블룸버그NEF는 최근 전기차 보급이 둔화되는 상황을 가정하고 충전인프라에 소요되는 재원을 추산했다. 예를 들어 2030년 전세계 자동차 판매대수 중 전기차가 1/3 이하를 차지할 경우에도 충전 인프라에 소요되는 글로벌 재원은 대략 6000억달러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2050년 탄소중립을 이행하는 경우라면 충전인프라에 투자되는 누적 액수는 1조6000억달러에 달해야 한다.
주요국의 공식 데이터에 따르면 현재 시점만 놓고 보면 전기차 충전인프라는 충분히 구축돼있다. 유럽연합(EU) 위원회는 전기차 10대마다 1곳의 공공 충전소가 필요하다고 본다. '보스턴컨설팅그룹'에 따르면 EU와 중국엔 전기차 5대당 1곳의 충전소가, 미국의 경우 9대당 1곳이 설치돼 있다.
하지만 문서상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실적으로 쓰지 못하는 충전기가 많기 때문이다. 독일 자동차기업 폭스바겐이 중국 내 충전소를 조사한 결과 상당수의 인프라가 부주의 또는 내연기관차들의 고의적인 방해로 사용 불가능했다. 중국 내 100만대의 충전기 중 30~40%만 상시 이용이 가능했다. EU와 미국에서도 일부 충전기가 사용 불가능하다고 추산하는 게 타당하다.
운전자들 역시 전기차 충전과 관련한 어려움을 인식하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앨릭스파트너스'는 최근 전세계 전기차 판매량의 85%를 차지하는 7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전기차로 바꾸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전기차의 비싼 가격은 3위에 그쳤다. 1위와 2위, 4위와 5위는 모두 전기차 충전과 관련된 불만이었다.
전기차의 이점은 가정 또는 직장에서 충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 70%의 가정이 충전기를 설치할 수 있는 골목길에 차를 주차한다. 유럽과 중국에선 이 비율이 미국보다 낮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은 미국의 경우 2020년 가정과 직장에서 전기차를 충전한 비율이 전체의 3/4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유럽은 7/10, 중국은 3/5였다.
하지만 가정과 직장에서 충전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전기차 보급이 확산되면서 자체적으로 충전이 가능한 부유한 사람은 물론, 아파트에 사는 사람, 충전할 곳이 마땅치 않은 주택형태에 사는 사람들도 전기차를 소유하게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공 충전인프라가 절실해진다. 미국과 유럽, 중국 모두 2030년이 되면 공공 충전소의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공공 충전인프라엔 3가지 형태가 있다. 일반적인 형태는 차도 가장자리에서 충전하는 형태다. 기존 가로등을 전환하거나 전용 충전기를 설치하면 된다. 이곳에 전기차를 밤새 주차하며 충전할 수 있다. 또 다른 형태는 전용 충전소다. 쇼핑센터나 식당, 영화관 등 주차장 일부 면적에 충전기를 설치하는 것이다. 2가지 형태 모두 시간당 16~32km 주행거리를 충전할 수 있는 레벨2 충전기를 설치할 수 있다. 비용은 충전기 1대당 2000~1만달러다.
이와 달리 급속충전은 20분에 100~130km 주행거리 분량을 채울 수 있다. 도시를 잇는 간선도로나 고속도로에 필수적이다. 택시와 트럭 등 장거리를 주행하는 상용차들은 급속충전이 절실하다. 물론 비용 부담은 크다. 급속충전기 1대당 최소 10만달러가 든다. 테슬라의 내비게이션 소프트웨어는 운전자가 장거리 여행에 나설 경우 테슬라 전용 급속충전기인 '슈퍼차저'의 최적경로를 알려준다. 주요 전기차 업체의 신형모델들도 향후 이와 비슷한 기능을 담을 것으로 전망된다.
충전전문기업 관계자들은 전기차 보급과 충전인프라 확충 모두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무조건 비관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전세계 최대 전기차 충전기업 중 하나인 '차지포인트'의 팻 로마노는 "전세계 운행중인 자동차 100대중 전기차는 아직 1대꼴에 불과하다. 20년을 내다봐야 하는 장기여행의 시작일 뿐"이라고 말했다.
충전시장 선점 위한 치열한 경쟁
미래 공급이 달릴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경쟁에 나선 주체는 크게 3종류다. 그중 하나는 수직통합된 자동차 기업들이다. 테슬라는 자사의 슈퍼차저 네트워크에 얼마를 투자하고 있는지 함구하고 있다. 슈퍼차저는 전세계 3만 곳에 있다. 업계에서는 테슬라가 수십억달러를 투자하고 있다고 본다.
다른 자동차 기업들도 테슬라의 뒤를 따른다. 폭스바겐과 BMW, 포드 현대차 다임러는 유럽 전기차 충전인프라 기업인 '아이오니티'에 공동투자했다. 아이오니티는 현재 1500곳의 급속충전 네트워크를 2025년까지 7000곳으로 늘릴 계획이다. 폭스바겐은 2016년 불거진 디젤게이트 파문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미국에 전기차 충전기업 '일렉트리파이 아메리카'를 설립했다. 이 기업은 미국 2200곳에 급속충전기를 설치했다. 제너럴모터스(GM)의 경우 충전인프라에 7억5000만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자사 차를 판매하는 대리점 4만 곳에 충전기를 설치할 계획이다.
두번째 경쟁 주체는 전문 충전기업들로, 이들 역시 발빠르게 사업을 확대중이다. 여러 기업들이 지난해 상장했다. 아직 이익을 내는 곳은 없고 매출도 미미한 편이다. 하지만 주가는 계속 오르고 있다. 가장 가치가 높은 기업은 미국 '차지포인트'로 대략 70억달러에 달한다. 이 기업은 미국 공공 충전인프라 시장에서 44%를 차지하고 있다. 유럽시장에도 진출했다. 네덜란드 기업 'EV박스'는 전세계 30만곳에 충전소를 갖고 있다. 유럽 공공충전소 2레벨 충전기의 약 1/4, 급속충전소의 1/3을 차지한다. 'EV고'(EVgo)는 테슬라를 제외한 미국 급속충전 시장에서 절반의 점유율을 기록중이다.
블룸버그NEF의 라이언 피셔는 "전문 충전기업들은 향후 10년 동안 이익을 내는 사업모델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각국 정부가 충전인프라 보조금을 줄이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세번째 주체는 전통의 에너지기업들이다. 전기차 혁명으로 주유소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질 것을 우려해 야심찬 계획들을 속속 내놓고 있다. 영국-네덜란드 오일메이저인 로열더치셸은 올해 2월 유럽 노상 충전기 업체 '유비트리시티'를 인수했다. 8월엔 "2025년까지 차도 갓길 일반 충전기와 급속충전기를 포함해 전세계 5만곳에 전기차 충전소를 구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BP와 토탈 역시 충전기업들을 속속 인수하고 있다.
전력기업들도 충전사업에 진출하고 있다. 스페인 국영전기회사 '이베르드롤라'가 일부 지분을 소유한 '월박스'는 가정용, 직장용 충전기를 판매한다. 미국 17개 전력기업들로 구성된 '일렉트릭 하이웨이 연합'은 도시간 간선도로를 따라 급속충전 인프라를 구축할 계획이다.
각국 정부도 행동에 나섰다. 미국은 새로운 인프라법을 통해 2030년까지 75억달러를 들여 50만곳의 공공 충전소를 구축할 계획이다. 영국에선 주택과 직장, 상점이 문을 열 경우 의무적으로 전기차 충전기를 갖춰야 한다. 영국정부는 이를 통해 매년 14만5000개의 충전기를 확충할 계획이다.
전기차 혁명에 낙관적 입장을 지닌 측은 배터리 기술의 진보가 지속되면서 한번 충전에 더 긴거리를 주행할 수 있다는 점을 든다. 충전을 자주 할 필요성이 줄어들게 된다. 미래의 신형 배터리들은 현재보다 더 빠른 충전성능을 보일 것이다.
반면 충전 인프라 확충에 비관적인 측에서는 충전기 보급 추세가 여전히 미흡하다고 본다. 급증하는 전기차에 전력을 공급할 광대한 규모의 충전 네트워크가 필요한데, 여기엔 막대한 투자가 수반돼야 한다는 것.
보스턴컨설팅그룹은 전기차 혁명을 주도하는 미국과 유럽 중국이 2030년까지 구축할 공공 충전소가 약 650만곳에 달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는 IEA가 예상한 글로벌 목표치 4000만곳에 턱없이 부족하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미래의 전기차 운전자들은 부족한 충전기를 차지하려 극심한 경쟁을 벌일 수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