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노동이사제에 거는 기대

2022-02-21 11:44:36 게재
KB금융그룹 노동조합협의회가 9일 KB금융그룹 이사회 사무국에 김영수 전 수출입은행 부행장을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했다. KB금융 노조는 이미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사외이사 후보를 천거해왔다. 그렇지만 번번이 주주총회를 통과하는 데 실패했다. 아마도 한국에서는 아직 노조 추천 사외이사가 낯설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거부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흐름이 뚜렷하게 바뀌고 있다. 우선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도입이 의무화됐다.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지난달 국회 본회의를 통과함에 따라 7월부터 공공기관에서 노동이사제를 시행하게 된다.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에 3년 이상 재직한 해당 기관 소속 근로자 가운데 근로자 대표의 추천이나 과반수 동의를 받으면 선임될 수 있다. 따라서 노조위원장이나 노조 관계자가 뽑힐 가능성이 크다.

보수야당 후보도 노동이사제 공약 내걸어

이런 노동이사제는 KB금융 노조가 추천한 사외이사와는 다소 다르다. 공공기관의 경우 그야말로 노동조합과 관계있는 인물이 이사로 선출되겠지만, KB금융의 경우는 노조의 추천을 받으면 외부인사라도 상관없다. 그렇지만 노동자의 입장을 반영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해 보인다.

정치권의 흐름도 노동이사제에 우호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보수야당인 국민의힘의 윤석열 대통령후보도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도입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니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누가 당선되든 노동이사제는 본격적으로 도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노조 관계자가 노동이사 자격으로 이사회에 참석해 발언권과 의결권을 행사하면 의사결정이 지연된다는 것이다. 공공기관의 경우 노조와 경영진이 야합해 무리하게 성과급을 지급하는 등 부작용이 커질 수도 있다. 대선후보자 TV토론회에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이런 우려를 근거로 윤 후보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노동이사제는 단순히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임금을 비롯한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역할이야 하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실은 경영진의 무리한 결정을 견제하는 역할이 오히려 더 요구된다. 공공기관에서는 역대 모든 정권이 즐겨 해오던 낙하산 인사를 막을 수 있는 방패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경영진의 무리한 결정에 대한 견제는 공공기관에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총수의 황제경영이 지배하는 재벌들에게 사실은 더 시급한 과제다.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도산한 대기업 대부분은 총수들의 무모한 결정과 탐욕 때문에 비운을 맞았다. 충분한 검토나 실력도 없이 무작정 사업을 확대하다가 쓰러진 것이다. 그것도 자체자금이 아니라 외부에서 빌린 자금으로 말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사외이사가 도입됨으로써 재벌들의 무분별한 차입확장은 상당히 줄었다. 하지만 최근에도 금호그룹의 아시아나항공처럼 재벌총수가 황제경영을 일삼다가 위기에 내몰리거나, 미등기임원 신분의 총수가 거액의 보수를 챙겨가는 등의 몰상식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최고경영자가 스톡옵션으로 받은 주식을 '먹튀' 식으로 처분해 주주와 사원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이 모두 견제다운 견제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기업마다 사외이사가 있기는 하지만 제 역할을 충분히 다하지 못한 것이다. 그 견제의 공백을 노조추천으로 선임된 이사가 상당히 메울 수 있다. 이에 따라 한국 대기업과 경영풍토도 더욱 쇄신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이사제 확대 위해선 초기 이사들 역할 중요

그렇다면 노동이사제를 민간기업까지 확대적용하는 것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독일에서 감독이사회에 노조 대표가 들어가는 것처럼 한국에서도 집행이사가 아니라 사외이사에 들어가는 것은 경영효율성을 크게 저해한다고 보기 어렵다. 노조추천 사외이사가 경영진과 노조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면 노사간 대립이 완화될 수 있다.

이제 노동이사제의 첫발을 떼는 마당에 한꺼번에 다 이룰 수는 물론 없다. 하지만 앞으로 적용범위를 확대하는 것을 겁내거나 마다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노동이사제가 먼저 시행되는 기관에서 선출된 노동이사들이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다할 필요가 있다. 노동이사제가 정착할 것인지는 바로 이들 초기에 선임된 노동이사들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모범이 될 만한 경험을 축적해주기를 기대한다.
차기태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