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파동, 글로벌경제 어떻게 흔들었나

2022-03-23 11:04:44 게재

프랑스 르몽드, 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과 현재 비교 … "당시 악몽 떠올리는 사람 늘어"

"무한한 세계의 종말이 왔다."

약 50년 전인 1973년 겨울 프랑스 조제프-푸리에 대학을 다니던 22세 나탈리 뒤몽이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들었던 말이다. 라디오는 1차 석유파동의 위기를 진단하고 있었다. 나탈리는 "방안은 차가웠다. 어머니는 '전쟁 때처럼 다시 한번 아끼고 아껴야 한다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에너지가격이 상승하던 와중에 우크라이나전쟁까지 터지며 상황이 급박해지자 유럽에서 1970년대 석유파동의 악몽을 되살리는 이들이 많다고 프랑스 일간 르몽드가 22일자로 전했다.

파리7대학 '미래에너지학제간연구소'(LIED) 경제사 연구자인 미셸 르쁘띠는 르몽드에 "당시와 마찬가지로 모든 확실성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재경부장관 브뤼노 르 메르도 이달 9일(현지시각) 한 컨퍼런스에서 "오늘날의 가스공급 충격은 그 강도와 다급함 측면에서 1973년 석유파동에 비견된다"고 말했다.

유럽의 벤치마크 가스가격인 네덜란드TTF는 지난달 22일 메가와트시당 76유로에서 이달 8일 340유로로 치솟았다. 역대 최고가였다. 21일 현재 여전히 105유로대를 기록중이다. 같은 기간 브렌트유 가격은 배럴당 87.60유로에서 117.70유로로 30% 이상 상승했다. 1974년 1~3월 국제유가는 240% 상승한 바 있다.

지난달 미국 인플레이션은 7.9%, 유로존 인플레이션은 5.9%였다. 1974년 중반 12%대 인플레이션보다는 아직 낮은 상황이다.

프랑스 싱크탱크 '경제기업발전연구센터'(Rexecode)의 경제학자 데니스 페랑은 "갈등의 지속 여부에 대한 불확실성은 크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은 50년 전의 충격보다 강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유럽중앙은행(ECB)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도 21일 파리에서 개최된 한 컨퍼런스에서 "올해는 물론 내년과 내후년에도 아직 스태그플레이션(경제불황 중 물가상승)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프랑스 경제연구소 '코파스'의 수석이코노미스트인 장크리스토프 카페는 "생산에 필요한 에너지 양은 1970년대 이래 40% 줄었다"고 말했다. 역사학자 대니얼 예긴은 "1970년대 석유는 산업경제의 피였다. 이제 경제성장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줄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카페는 배럴당 140달러대가 유지되면 글로벌 GDP의 약 10%가 에너지에 쓰여야 한다. 이는 1973년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1973년과 1979년의 석유파동은 여러 측면에서 전세계 경제법칙을 다시 썼다. 1973년 10월 국제유가가 치솟았다. 각국의 관세 인상과 제4차 중동전쟁에 대응해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 금수조치를 내린 결과였다. 프랑스 싱크탱크 '더 시프트 프로젝트'의 국장 마티유 아우자노는 "사실 유가는 1970년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의 전통적인 원유생산이 정점에 다다른 때였다"고 말했다.

허리띠 졸라매기

치솟는 유가에 미국 경제성장률이 급락했다. 1973년 5.6%에서 1974년 마이너스 0.5%로 하락했다. 유럽 국가들은 6%에서 마이너스 0.6%로 고꾸라졌다. 이에 대응해 서구 국가들은 신속히 에너지 절감조치를 취했다. 이달 18일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조언한 △운전속도 줄이기 △일요일은 차없는 요일 △대중교통 이용 등과 비슷했다.

예를 들어 1973년 스위스와 네덜란드가 일요일 차량 운행을 금지했다. 영국은 기업의 에너지 소비를 제한하기 위해 주3일제를 도입했다. 프랑스는 고속도로 최고운행 속도를 시속 120km로, 야간 상점의 난방온도를 20℃ 이하로 제한했다. 또 밤 11시 이후 각 가정의 TV 시청을 금지했다.

몽펠리에에 사는 58세 배우 기욤 드 몽트리보는 "부모님이 수도꼭지마다 빨간색 테이프를 붙여 온수 사용을 금했다"고 회상했다. 78세로 당시 프랑스 공항공단에서 구조공학자로 일했던 크리스티앙 쇼미는 "1974년 이후 급진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원자재 소비를 줄이기 위해 조직들을 슬림화했다. 건설현장에서는 콘크리트믹서트럭이 바닥에 흘린 재료를 긁어모아 콘크리트 블록을 만들기도 했다"고 말했다.

스트라스부르에 사는 63세 실비 포르티는 부모님이 빚으로 집을 샀다며 자축하던 일을 기억했다. 그는 "인플레이션 시대 대출의 가치가 무너졌고, 물가가 오르는 만큼 임금도 올랐기에 대출 갚는 건 큰 걱정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자동차 소유를 문화적 상징으로 삼고 있던 미국에선 난리가 났다. 주유소마다 기름을 구하려는 운전자들로 장사진이었다. 경악스런 장면을 회상했다. 프린스턴대 역사학 교수인 메그 제이콥스는 "수시간씩 줄을 서 기다려야 커다란 픽업트럭에 기름을 넣을 수 있었다. 그래도 기름이 부족해 못 넣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먹이 오가는 싸움도 흔했다"고 말했다. 그는 "원자재가 부족하다는 두려움은 생소한 것이었다. 미국 전체를 경악에 빠뜨렸다. 자유와 미국적 삶의 방식을 상징하던 자동차 소유가 사상 처음 난관에 부닥쳤다"고 말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통화·재정조치들이 취해졌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프랑스경제전망연구소' 셀린 앙토넹은 "이 시기는 '영광의 30년'(Les Trente Glorieuses, 1945~1975년까지 30년간 프랑스의 호황기)의 종말을 의미하는 동시에 대량실업과 스태그플레이션의 등장, 고물가와 저성장의 결합을 특징으로 한다"고 말했다. 각국 정부는 고실업 고물가의 전례없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각종 조치를 단행했지만 백약이 무효했다.

1974년 프랑스 자크 시라크 총리는 주요국 중 처음으로 물가동결 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1975년 GDP가 1%p 하락했다. 프랑스정부는 이어 투자를 통한 부양조치를 택했다. 경제침체를 극복하고 실업률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이 역시 헛된 시도였다.

급증하는 실업자

1976년엔 긴축정책을 도입했다. 고율의 세금으로 수요를 줄여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서였다. 이 역시 실패했다. 1974년 인플레이션은 13.7%, 1977년에도 여전히 9.4%였다. 1974년 프랑스 실업자는 50만명에 달했다. 전례없는 숫자였다. 1977년이 되자 100만명을 넘었다.

1979년 상황은 더 심각했다. 이란혁명이 발발했고,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2차 석유파동이 벌어졌다. 프랑스 연료유 가격은 12개월 동안 37.3%, 가스 가격은 16.3%, 휘발유 가격은 15.7% 상승했다. 실업자수는 계속 늘어갔다. 실비 포르티는 "학업을 중단하고 신문의 한줄광고를 통해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를 찾을 수 없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시직도 찾기 어려웠다. 결국 부모님 집에 다시 신세를 져야 했다"고 말했다.

1970년대 말은 경제학계의 주요 터닝포인트였다. 프랑스 ESCP비즈니스스쿨 경제학자 장마르크 다니엘은 "스태그플레이션은 당시 케인스경제학 이론을 단번에 박살냈다"고 말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1929년 증시붕괴 후 도입된 각국의 긴축정책은 불황을 악화시켰다. 특히 독일이 심각했다. 1937년 미국정부가 취한 통화·재정정책은 경제를 냉각시켰다. 독일과 미국의 상황은 가계의 소득 감소와 수요의 붕괴가 원인이었다.

1960년대 말 각국 중앙은행들은 30년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조심했다. 인플레이션 걱정은 미뤄둔 채 소비를 부양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1965년 1.6%에서 1968년 4.3%로 올랐다. 석유파동이 닥치기도 전인 1970년엔 6%에 육박했다. 임금이 물가와 연동돼 상승하는 구조였기에 일단 인플레이션 압력이 가해질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릴 수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석유파동은 1930년대처럼 수요의 위기가 아니었다. 국제유가와 기업 생산비용의 급상승으로 촉발된 공급의 위기였다. 스위스 제네바대 국제경제학 대학원 교수인 찰스 위플로즈는 "위기의 메커니즘이 달랐기에 차별화된 대응법이 요구됐다. 이를 이해하는 것은 거시경제학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이라고 말했다.

막대한 사회적 비용

1980년대 초 변화의 양상이 뚜렷해졌다. 밀턴 프리드먼이 이끈 신자유주의적 통화주의가 출현하면서다. 벨기에 루뱅가톨릭대 경제사학자 오렐리엥 구메트는 "통화주의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유통화폐의 양을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한다"고 요약했다.

미국에서 그 이론을 처음 집행한 건 폴 볼커였다. 1979년 8월 지미 카터 대통령이 연준 의장으로 지명한 볼커는 유통중인 화폐 유동성을 줄이기 위해 금융시스템에 할당된 화폐의 양을 제한했다. 1979년 11.2%였던 기준금리를 1981년 6월 20%까지 올렸다. 급진적인 처방이었다. 1980년 3월 14.8%였던 인플레이션이 1983년 4% 아래로 하락했다. 하지만 사회적 비용은 엄청났다. 미국 경제는 1980년 침체로 빠졌고 1982년 다시 침체에 빠졌다. 그해 실업률은 11%를 넘었다.

1980년 11월 당선된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세금과 연방정부 지출을 대폭 줄이며 이같은 보수적 혁명을 더욱 밀어붙였다. 프린스턴대 제이콥스는 "석유파동과 그에 대한 비효율적 대응의 결과로 미국에선 경제에 대한 국가개입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1981년 1월 20일 취임사에서 "정부는 해법(solution)이 아니라 문제(problem)"라고 주장했다. 미셸 르쁘띠는 "보다 넓게 보자면, 통화주의 사상가들은 모든 영역에서 정부를 뒷방으로 내쫓았다"고 말했다.

가장 대표적인 국가는 영국이었다. 마가렛 대처는 1979년 수상으로 선출됐다. 영국은 당시 깊은 사회적 위기에 빠져들면서 '유럽의 병자'로 불렸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영국도 통화주의를 활용했다. 급격한 기준금리 인상을 통해 치솟는 물가에 대처했다. 결국 인플레이션을 절반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1983년 5% 아래로 내려갔다. 철의 여인으로 불린 대처 총리는 정부의 역할은 물론 노조와 같은 매개기구의 역할을 크게 줄였다. 공공지출을 억제했고 경제의 상당 부분을 민영화했다.
프랑스의 경우 석유파동으로 불거진 스태그플레이션은 1980년대 초까지 수그러들지 않았다. 1981년 당선된 사회당 소속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최저임금 10% 인상, 국영화 단행 등 케인스주의 부양책을 도입했다. 하지만 실업률을 낮추는 데 실패했다. 1981년 초 6.1%였던 실업률은 1982년 말 7%로 올랐다. 인플레이션은 1982년 11.8%로 정점을 찍었다. 정부 국채금리는 15% 이상으로 치솟았다. 무역적자는 1년 만에 0.8%에서 2.1%로 늘었다.

또 다시 직면한 갈림길

결국 벼랑 끝에 몰린 프랑스 정부는 전후 도입된 물가임금 연동제를 폐지했다. 세금을 늘렸고 기업경쟁력 제고를 위해 프랑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췄다. 그 결과 인플레이션은 1983년 9.6%에서 1986년 2.7%로 하락했다. 1995~1999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경제위원으로 일한 이브티보 드실기는 "이는 유로화 채택의 길을 닦는 조치였다. 물가 통제가 핵심 조건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업률은 계속 악화됐다. 1983년말 7.3%에서 1985년 말 9.3%로 올랐다.

파리경제대학원 역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에릭 모네는 올해 상황을 거론하며 "1970년대는 인플레이션 급증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폭발적인 악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시기"라고 말했다.

현재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국가들은 물가임금 연동제를 폐지했다. 물가와 임금이 동반상승하는 리스크는 줄었다. 스위스 제네바대 위플로즈는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구매력을 보호하기 위해 재정정책을 취하는 게 보다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 위기의 경우 곡물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사회취약계층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현재 중앙은행들은 다시 한번 스태그플레이션의 유령과 마주하고 있다. 물가급등세를 잡기 위해 연준은 이달 16일 기준금리를 0.25%p 올렸다. ECB는 곧 따라가야 할 처지다. 주요국의 통화긴축은 글로벌 경제와 금융시장을 뒤흔들 리스크가 크다. 글로벌 경제가 진 공공부채는 50년 전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프랑스 공공부채 비중은 1971년 GDP의 20%에서 현재 115% 이상이다. 미국은 36%에서 130%를 넘었다. 위플로즈는 "공공재정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계속 불거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흥국도 예외는 아니다. 정부의 부채부담은 1997년 이후 GDP의 40% 선에서 현재 65%로 늘었다.

르몽드는 "여기에 더해 에너지 원천을 다각화 할 필요성이 다시 한번 대두됐다"고 지적했다. 현재 유럽대륙의 최우선 어젠다이기도 하다. 1973년 1차 석유파동 이후 전세계는 페르시아만 원유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프랑스는 일본과 함께 1974년 원자력발전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다른 국가들은 천연가스로 눈을 돌렸다. 가스는 현재 전세계 에너지 소비의 20%를 차지한다. 50년 전엔 8%였다. 이는 독일과 동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에 의존하는 이유가 됐다.

프랑스경제전망연구소의 앙토넹은 "1972년 MIT의 도넬라 메도즈 교수팀이 '성장의 한계'를 펴내면서 지구의 자원이 무한정하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지만 우리는 곧 이를 망각했다"고 아쉬워했다.

1차 석유파동은 비전통적 에너지 투자를 늘렸다. 셰일석유와 셰일가스다. 프랑스에서는 1973년 자동차 판매가 줄었지만 1975년부터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실 서구의 소비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나탈리 뒤몽은 "석유파동 당시 몇달동안 절약을 생활화했다. 자동차보다 자전거를 이용했다. 하지만 곧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소비사회로 되돌아갔다"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우려에 공감한다. 파리7대학 르쁘띠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충격 이후 우리는 두가지 갈림길에 놓였다"고 말했다. 첫번째는 신재생에너지나 원자력 등의 개발로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이는 길이다. 두번째는 단기, 중기적으로 러시아 에너지의 대안을 찾아 대량으로 이를 소비하는 길이다. 베네수엘라산 원유나 미국의 액화천연가스(LNG)가 대표적이다. 르쁘띠는 "두번째 길은 1970년대와 마찬가지로 기후변화 문제를 또 다시 뒷전에 방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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