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현장 리포트
영화 '돈 룩 업' - 과학계 불신에 대한 미국의 단면
최근 넷플릭스에서 '돈 룩 업'(Don't Look Up)이라는 영화가 회자된 바 있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한 대학원생이 우연히 발견한 혜성이 6개월 뒤 지구와 충돌하게 될 상황에 놓인다. 이를 대중들에게 알리고자 과학자들이 노력하지만 정치권과 언론은 지나치게 무관심하다. 결국 혜성 충돌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이르러서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대적인 시도가 진행된다는 이야기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지구 멸망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과 정치적 행보만을 계산하는 정치인들, 시청자들의 이목이 쏠릴 화제성 높은 뉴스에만 집중하며 도덕성마저 잃어버린 미디어 사회를 가감없이 비판한다.
그런데 한국 시청자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정치인들과 언론이 혜성 충돌에 무관심하게 반응한다고 해도, 과학자들의 발견과 경고가 저런 식으로 무시될 수 있을까.
필자 역시 미국 정치를 연구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혹은 미국 현지에서 직접 이러한 상황을 보지 못했더라면, 이 영화를 단순히 미국 정치권과 언론을 겨냥한 블랙 코미디로만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중간중간 등장하는 과장된 영화적 장치를 제외한다면 사실 이 영화는 '코미디'가 아닌 미국의 '무거운' 현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코미디 아닌 무거운 현실 담아
물론 미국에서 과학자들에 대한 신뢰는 다른 집단에 비해 높은 편이다. 대부분의 미국 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과학자들은 군대 다음으로 대중의 높은 신뢰를 받아왔다. 퓨리서치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2019년 과학자들에 대한 신뢰는 종교 지도자와 정치인, 비즈니스 리더, 뉴미디어는 물론 군대에 대한 신뢰까지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과학자들이 공익적 차원으로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다고 인정한 응답자들이 86%에 달해 2016년 이후 가장 높은 신뢰감을 표명했다. 2020년 진행된 20개 국가 간 비교 조사에서도 미국 대중들의 과학자 신뢰는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의 정치적 갈등이 과학계 전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성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1년 종합사회조사' 분석에 따르면 민주당 지지자와 공화당 지지자의 과학계 신뢰도 차이가 3년 사이 3배 이상 벌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미국인 중 약 48%가 과학자들을 '크게 신뢰'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중 민주당 지지자의 64%, 공화당 지지자의 34%가 과학자를 신뢰한다고 응답하며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의학계에 대한 신뢰도 공화당 지지자들이 민주당 지지자들보다 10%p 이상 낮았다.
특히 기후변화는 현재 미국의 정치적 갈등과 과학 신뢰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주제다. 한국인들은 지구온난화, 기후변화 등을 대체로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상기후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어 이러한 사실이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런데 미국은 개인의 이념 혹은 지지 정당에 따라 기후변화를 바라보는 시각차가 극명하다. 뉴욕타임스의 2020년 설문조사에서 '기후변화가 지역사회에 위협이 된다'고 응답한 공화당 지지자들은 20% 안팎에 그쳤다. 민주당 지지자들의 90%가 '그렇다'고 응답한 것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치다.
정치성향 따라 갈리는 기후변화 시각
캘리포니아 지역의 빈번한 산불, 남서부 지역의 큰 가뭄, 동부지역의 폭설과 홍수 등 최근 미국 곳곳에서 전례 없이 목격되는 이상기후 현상을 언론에서 연일 보도하지만, 이러한 의견분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산불이나 가뭄을 직접 겪고 있는 지역민들마저도 지구온난화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홍수 범람에 취약한 플로리다 지역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조사에서도 해수면 상승에 우려를 표하는 민주당 지지자와 공화당 지지자 간 격차는 여전히 50%p를 웃돌았다.
그렇다면 기후변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과학계에 대한 불신과 '왜'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이는 기후변화 자체에 대한 의심과 관련이 있다. 기후변화를 걱정하지 않는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에는 기후변화를 주장하는 과학자들의 논리가 잘못됐다는 믿음이 있다. 기후변화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더라도 그 변화 양상이 심각하지 않다고 믿는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기후변화의 원인에 관한 것이다. 지구온난화나 극심한 기후변화의 주요 원인이 인간의 활동이라는 사실은 한국의 초중고 교과서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미국인들이 지나치게 많다. 현재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기후는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인간을 원인으로 돌리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기후변화 회의론자들에게는 대다수 과학자가 합의했다는 사실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수의 실험결과에 따라 '거의 모든 과학자가 기후변화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그중 인간의 활동이 이러한 변화에 가장 큰 원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알려주어도 보수 성향 공화당 지지자들의 의견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몇몇 연구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었을 때 격한 거부반응을 보이며 자신의 의견을 더 고집하려는 경향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지난 2020년 미 대선에서도 기후변화 및 환경보호에 대한 정책 이슈가 중요하게 대두됐다. 당시 대선에서 유권자들의 대략 70%가 후보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기후변화와 관련된 정책이 중요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바이든 지지자들과 트럼프 지지자들 간의 반응은 또다시 확연하게 구분됐다. '기후변화가 중요한 정책의제'라고 응답한 트럼프 지지자들은 10% 안팎에 그쳤지만 바이든 지지자들은 70%에 육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임 기간 '기후변화 자체가 사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인간 때문에 발생했다는 과학자들의 주장엔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을 여러번 표명했다. 심지어 미국 중서부의 혹한이 몰아쳤을 때에도 '약간의 지구온난화는 필요하다'는 식의 조롱섞인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지구온난화의 진행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과거 상태로 쉽게 돌아갈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은 환경정책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한 것을 시작으로 자동차의 이산화탄소 배출기준을 완화하고 화력발전소의 이산화탄소 배출규제를 폐지했다.
기승 부리는 반지성주의
반면 바이든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후보 중 가장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환경정책 의제를 제시했다. 선거운동 내내 기후변화를 전세계와 미국이 직면한 가장 긴급한 위기라고 강조했다. 환경과 기후변화를 정책 우선순위로 두고 경제와 외교, 인프라 등 다른 영역의 정책분야에서도 환경을 중점적으로 고려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취임식을 마치자마자 트럼프가 탈퇴한 파리기후변화협약에 재가입하겠다는 행정명령에 도장을 찍으며 전임 행정부의 잘못된 환경정책 기조를 사과했다. 그리고 중국 다음으로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미국이 기후변화 대처에 앞장서겠다고 공언했다.
미국 역사가 리처드 호프스테더는 1964년 발간한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미국을 움직였는지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런데 최근 미국 내 정치적 양극화가 심각해지면서 이러한 반지성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 전역에서 보이는 과학에 대한 불신, 기후변화에 대한 대중들의 극단적인 분열적 태도는 정치인들의 메시지와 연관성이 높다. 기후변화를 과학자들의 '거짓말'로 치부하는 정치인들의 '거짓말'에 대중들은 쉽게 휩쓸린다. 과학자들의 처절한 경고가 정치인과 언론에 의해 쉽게 무시되고 그 경고가 현실화돼 위험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여론이 갈리는 영화 '돈 룩 업'의 장면들은 그저 영화로 보아 넘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