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콘(10억달러 이상 가치 스타트업)' 허브, 전세계 300개 도시로 분산

2022-04-13 11:06:02 게재

실리콘밸리 독점력 약화 … 이코노미스트 "45개국, 1000개 이상 유니콘기업 품어"

고성장 기술기업의 산실인 미국 실리콘밸리의 입지는 지난 수십년 동안 난공불락이었다. 휴렛팩커드(1939년 팰로앨토), 인텔(1968년 마운틴뷰), 애플(1976년 로스앨터스), 구글(1998년 멘로파크), 우버(2009년 샌프란시스코) 등 굴지의 기업을 탄생시켰다. 마크 저커버그는 2004년 메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페이스북을 창업한 지 4개월 만에 실리콘밸리로 둥지를 옮겼다. 1999년 실리콘밸리는 글로벌 벤처투자금의 1/3을 가져갔다. 데이터제공업체 'CB인사이트'에 따르면 2011년 전세계 27개 '유니콘'(10억달러 이상 가치를 지닌 스타트업) 중 20개가 미국에 본사를 뒀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에 따르면 현재 실리콘밸리는 136개 유니콘의 고향이다. 전세계 그 어느 지역보다 많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독점력은 약화됐다. 인도판 실리콘밸리인 벵갈루루는 26개 유니콘을 갖고 있다. 지난해 130억달러의 벤처자금을 끌어들였다. 유니콘은 전세계 45개국에 산재한다. 전세계 유니콘은 1000개 이상인데, 그중 절반 정도가 미국 밖에 존재한다. 전세계 벤처투자금 중 미국 스타트업으로 흘러드는 비중은 20년 전 84%에서 현재는 절반 이하로 줄었다.


실리콘밸리를 넘어 다양한 도시로 벤처투자금이 분산된 것은 최근 수년 동안 테크분야가 고성장을 지속한 덕분이다. 많은 배를 띄울 정도로 넉넉한 자금이 쏟아졌다. 투자엔 호황-불황 사이클이 있다. 하지만 테크분야에 대한 투자는 지속될 전망이다. 지난해 4분기와 올해 1분기 테크기업의 밸류에이션(가치평가)이 줄었지만, 미국 밖에 있는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금 비중은 51%로 여전히 높게 유지되고 있다.

베이징이나 런던, 텔아비브 등 스타트업 허브로 등장한 신생지역 중 일부는 상대적으로 성숙했다. 이런 곳들은 전세계 시장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벵갈루루나 싱가포르, 상파울루 등은 상대적으로 초기 단계 스타트업 허브다. 스타트업 허브는 공통적으로 기술인재 풀이 광범위하고 전세계 다른 허브들과 깊은 연계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자국내 벤처투자금을 빨아들인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유니콘이 전세계로 퍼지면서 글로벌 혁신의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며 "보다 분산되고 보다 다양하며 보다 경쟁력 있는 상품과 서비스를 창조해낼 수 있다"고 전했다.

새롭게 등장한 유니콘 허브들은 실리콘밸리의 원래 모습과는 다소 달라보인다. 신생지역들끼리도 차이가 있다. 보다 성숙한 허브에선 '딥테크' 기업들이 두드러진다. 딥테크 기업들은 인공지능이나 클라우드 컴퓨팅처럼 소비자들보다 기업고객을 목표로 삼고 정교하고 복잡한 부문에서 활동한다. 한편 이스라엘이나 영국의 스타트업들은 해외시장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베이징의 스타트업들은 거의 전적으로 국내시장에 전념한다.

벵갈루루나 상파울루, 싱가포르처럼 더 젊은 혁신허브들은 글로벌시장보다 지역시장에 눈길을 둔다. 이들은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기보다 기존 사업모델을 지역의 시장조건에 맞춰 적용하는 경향이 크다. 싱가포르 벤처투자기업 '몽크스힐벤처스'의 펭 옹은 "이들 지역 내 가처분소득이 상승하면서, 소비자들이 점차 '서비스의 기술화'에 돈을 지불하려 한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 벤처투자기업 '악셀'의 애넌드 대니얼은 이를 'Y의 X' 전략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인도판 아마존인 플립카트(전자상거래), 브라질판 레볼루트인 누뱅크(핀테크), 동남아판 우버인 그랩(승차공유) 등이다. 동남아 유니콘의 70%, 중남미 유니콘의 80%가 핀테크나 소비자인터넷 부문에 속한 이유이기도 하다.

유니콘 허브의 확산은 여러 구조적인 상황 전개로 가능했다. 초고속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전세계 확산으로 스타트업들은 특정지역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전세계 거의 모든 고객들에게 서비스할 수 있게 됐다.

벤처캐피털 '세쿼이어 인도'의 압힉 아난드는 "기술을 신속하게 채택할 수 있게 되면서 관련 시장이 더욱 깊어졌다"고 말했다. 클라우드 컴퓨팅과 무료로 자유롭게 활용가능한 개발도구가 늘어나면서 창업이 훨씬 쉬워졌다. 동시에 성숙한 유니콘 시장에서 성장률이 둔화되고 투자 경쟁이 심화되면서, 벤처투자자들은 대박 투자기회를 잡기 위해 전세계 다른 곳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디지털이라면 무조건 선호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이같은 흐름이 강화됐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베인'에 따르면 지난 2년 동안 약 6000만명의 동남아시아인들이 네티즌으로 새롭게 등장했다. 이는 동남아 전체 인구의 약 1/10이다. 세쿼이어 인도의 아난드는 "연매출 1억달러 이상의 인도와 동남아 소재 기업수는 최근 수년 동안 여러배 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술의 민주화와 글로벌 벤처투자 확대가 현 상황의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면, 스타트업들은 전세계 모든 곳에서 성장해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분석이다. 유니콘을 보유하고 있는 10개국의 스타트업 펀딩과 밸류에이션 자료를 보면, 유니콘의 40% 정도는 해당 국가의 최고 스타트업 도시에 몰려있다. 런던의 경우 2011년 영국 총 벤처투자 중 절반 이하를 흡수했지만 2021년엔 70%로 크게 늘었다. 베를린은 같은 기간 24%에서 60%로, 벵갈루루는 15%에서 34%로 늘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이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정치경제학 교수였던 알프레드 마샬이 19세기 후반 '집적경제'로 이름 붙인 것처럼, 스타트업 군집화 역시 유니콘 성장에 강력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전했다. 일단 한 도시가 발판을 마련하면 스타트업들이 몰리게 된다. 인재풀이 근처에 있다면 사업과 채용이 더 쉬워진다.

넓고 깊은 인재풀은 성공적인 스타트업 허브가 되는 가장 확실한 요소다. 실리콘밸리는 스탠퍼드대나 UC버클리 같은 전문가집단과 인접한 덕에 큰 혜택을 얻는다. 텔아비브 스타트업들 역시 여러 대학과 정보기관들 덕분에 우수인재를 쉽게 채용한다.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은 엘리트 대학과 마찬가지로 가장 똑똑한 인재들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벵갈루루엔 70개 가까운 공과대학이 있다. 전문가 중심의 소셜네트워크인 '링크드인'에 등재된 인도인 55% 이상이 프로그래밍 같은 기술적 전문성을 자랑한다. 미국과 영국의 경우 그 비중은 약 42%다. 세쿼이어 인도의 아난드는 "한 동료는 내게 '당신은 수천명 공학도들을 어디서 그리 신속하게 채용하느냐'며 감탄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재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도쿄는 전자기업 소니, 전자상거래기업 라쿠텐과 같은 글로벌 거대 기술기업을 키워낸 우수한 두뇌집단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일본 벤처투자업계는 유망한 스타트업 허브를 키우는 데 고전하고 있다. 그 한가지 이유는 일본 재벌기업들이 지속적으로 시장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일본의 섬나라 근성일 수 있다. 2019년 한 조사에 따르면 일본은 전세계 영어능통도에서 53위를 기록했다.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일본인은 전체 국민의 8%가 안된다. 외국인들은 도쿄 기업환경에서 입지를 구축하는 데 애를 먹는다. 외국의 벤처투자자들은 일본에서 외면받고 있다.

이는 두번째 중요한 요소를 시사한다. 사람과 아이디어에 대한 개방성이다. 이민자들은 강한 진취력을 가진 집단이다. 새로운 어떤 곳으로 이주하려면 과감한 구석이 필요하다. 미국에서 시장가치가 가장 높은 테크기업들을 살핀 결과 창업자 60%가 이민자나 그 자녀들이었다. 각각 10여개 유니콘의 고향인 베를린이나 런던, 파리 등 유럽의 스타트업 허브에도 엄청난 규모의 이민자들이 살고 있다.

중국의 경우 외국인 창업자가 부족하지만 상하이나 선전과 같은 스타트업 허브들은 '바다거북'을 극진히 우대한다. 이는 해외에서 공부하거나 일하다 국내로 귀환한 중국인을 뜻하는 말이다.

이민자들이 느끼는 사회적 유대감이 스타트업 활동을 얼마나 촉진하는지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관련돼있는 건 확실하다.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대 연구팀은 한 도시의 발명가들이 외국 도시의 발명가들과 얼마나 자주 특허를 공동연구하는지와 시간에 따라 이 상황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살폈다. 그 결과 유니콘이 풍부한 벵갈루루와 샌프란시스코, 싱가포르, 텔아비브 모두 유대감과 스타트업 활동 사이의 연계성이 컸다. 모두 마스트리히트대 연구팀이 매긴 상위랭킹 도시 10위 안에 들었다. 반면 유니콘이 부족한 도쿄는 그 연계성 측면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

벵갈루루는 인재와 개방성이 중요함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벵갈루루의 최신기술 선호도는 최소 1905년으로 거슬러오른다. 당시 이 지역 대왕은 인근 수력발전을 끌어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전기가로등을 설치했다. 그로부터 4년 뒤 벵갈루루는 인도과학대를 설립했다. 현재까지도 똑똑한 인재들을 끌어들이는 명문대학으로 남아 있다. 이민자들은 벵갈루루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는 인도의 기술기업 CEO들이 벵갈루루의 성공을 설명할 때 한결같이 언급하는 통계다.

전세계와의 연계도 전통이 깊다. 미국 전자제조기업 텍사스 인스트루먼츠는 1985년 첫번째 해외 지역본부로 벵갈루루를 선택했다. 벵갈루루에 소재한 인도 IT 거대기업 '인포시스'와 '위프로'는 1980년대부터 글로벌 소프트웨어 고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했다. 벵갈루루를 전세계의 '백오피스'(후방지원부서)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인포시스 공동창업자 난단 닐레카니는 "인도가 1991년 경제를 개방했을 때, 외국기업과 자본은 벵갈루루를 통해 인도의 광활한 시장을 인식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벵갈루루엔 제3의 요소가 있었다. 지역 내 모험투자의 존재다. 기업이 흥하려면 스타트업 생태계를 이해하고 지원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벤처투자기업 '발더톤 캐피털'의 라나 야레드는 "초기 스타트업 창업자나 그 직원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차세대 스타트업을 위한 엔젤투자자가 된다"고 말했다. 인도 데이터제공업체 '트랙슨'에 따르면 월마트가 2018년 플립카트를 사들인 이후 이곳 직원들은 회사를 떠나 225개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그중 5개가 유니콘으로 성장했다. 싱가포르 3대 기술스타트업인 그랩과 라자다, 씨그룹에서 퇴사한 직원들도 1000개 이상의 스타트업을 창업했거나 운영하고 있다.

그처럼 자유로운 이직과 퇴사는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UC버클리의 애너리 색서니언 경제지리학 교수에 따르면 메사추세츠주 보스턴의 '루트128'(128번국도) 지역은 최고의 대학들을 끼고 있는 곳이지만 1980년대 실리콘밸리와의 경쟁에서 패했다. 기업 간 인재 교환이나 이직이 경쟁지역인 캘리포니아보다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업간 경쟁금지 약정을 강력히 시행한 탓이었다.

정부가 스타트업 초기 지원을 위해 적극 개입할 수 있다. 1930년대 휴렛팩커드 공동창업자 빌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에게 도움을 제공한 많은 엔젤투자자들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 전후 실리콘밸리가 형성되던 시기 정부 조달사업, 특히 국방사업이 큰 역할을 했다.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 직원들 중엔 인텔과 세쿼이어 캐피털, 클라이너 퍼킨스 등 미래 스타트업이나 벤처투자기업 창업자로 성장할 인재들이 있었다. 페어차일드는 정부 조달사업 덕분에 초창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국방연구팀이 몰려 있는 벵갈루루나 텔아비브 역시 군대와 밀접히 연계돼 있다.

일부 국가는 정부조달보다 투자를 통해 스타트업들을 지원한다. 싱가포르는 이스라엘을 제외하고 인구당 유니콘이 세계 최고인 나라다. 스타트업 정책을 관장하는 싱가포르 정부기구 '엔터프라이즈 싱가포르'는 이를 정부 투자를 통해 민간투자자와 창업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말한다. 싱가포르는 2009년부터 이스라엘을 본떠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을 운용했다. 공공예산 6달러를 지출할 때마다 민간투자 1달러를 매칭시켰다. 싱가포르 벤처투자기업 몽크스힐벤처스의 펭 옹은 "최소 15개의 투자펀드가 이 프로그램에 따라 스타트업의 정부지분을 초기 명목가치로 사들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톱다운 방식의 지원정책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느냐는 뜨거운 논쟁거리다. 역사적으로 보면 스타트업 허브를 만들겠다는 정부의 시도는 대개 실패했다. 독일은 1999년 16억달러를 들여 '바이에른 스타트업 허브'를 만들었다. 프랑스도 2005년 비슷한 투자로 '경쟁거점 제도'를 만들었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같은 해 말레이시아는 1억5000만달러를 들여 바이오밸리 단지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곧 '바이오유령의 계곡'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스타트업을 지원하려는 캐나다의 실험도 실패했다. 정부지원이 과도해 민간 투자자들이 손을 놓고 방관했기 때문이다.

투자자들과 일부 국가들은 '싱가포르의 성공 요인은 중계지로서의 입지와 친기업적 법제도, 정치적 안정성에 있다. 정부의 추진력은 기름이 가득한 램프에 불을 붙이는 발화점 역할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싱가포르 벤처투자기업 '골든게이트벤처스'의 저스틴 홀은 "정부의 지원은 싱가포르의 스타트업 허브 등극을 수년 앞당기는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인재와 개방성, 모험자본의 중요성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이 세 요소의 결합 덕분에 성장하는 스타트업 허브들도 계속 진화할 것이다. 젊은 허브들이 성숙하면서 'Y의 X' 전략은 점진적으로 최첨단 테크에 자리를 내준다. 인공지능과 클라우드 컴퓨팅에 방점을 둔 중국이 대표적이다. 스타트업 허브들은 또 글로벌한 마인드를 갖추게 된다. 벤처투자기업 '라이트스피드 인도 파트너스'의 데브 카레는 "60개 남짓한 인도의 유니콘 중 약 30%는 이미 국제시장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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