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 칼럼

서늘한 인사 메시지

2022-04-14 11:31:38 게재
박종권 언론인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깜짝 놀랐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깜짝 인사 스타일을 나타내는 인용구다. 취임한 지 열흘여 지난 1993년 3월 9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처음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경재 공보수석은 "그분들 얼떨떨했겠네요"라고 맞장구쳤다고 한다. 그날 아침 조간신문 1면 톱이 '육참총장-기무사령관 해임'이었다.

'하나회' 척결의 신호탄이었다.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가 주도해 결성한 군내 사조직이다. 하나회 정치군인들은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탄압하면서 한국 현대사를 주름지게 만든다. 이들 조직을 하루아침에 척결하면서 오랫동안 군사정권이 드리운 그림자를 걷어냈다. YS가 걸어온 민주화 역정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이기도 하다.

"깜짝 놀랐죠?" 윤석열 당선인이 13일 한동훈 사법연수원 부원장을 법무장관 후보자에 내정했다. 한 부원장은 윤 당선인의 최측근 검사이자 조 국 전 장관 일가에 대한 수사를 지휘하다 좌천된 전력 때문에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언론은 대체로 서울중앙지검장이나 수원지검장을 전망했다. 대선 과정에 윤 당선인이 언론 인터뷰에서 "(한동훈은) 거의 독립운동처럼 해 온 사람"이라며 "중앙지검장 하면 안되는 것이냐"고 반문했던 것도 이런 추측을 가능하게 했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자신의 행복과 윤석열정부의 성공을 위해 새정부가 들어서는대로 사표를 낼 거라던 몇몇 정치평론가들의 예측 역시 틀렸다. 게다가 기수를 완전 파괴하며 서울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도 훌쩍 건너뛰었다. 그는 사법연수원 27기로 김오수 검찰총장(20기), 이성윤 서울고검장(23기)보다 후배다. 적지 않은 인사들이 얼떨떨했을 것이다.

그칠 줄 알면 위태로움은 없을 터

지난 5일 갑자기 사의를 표명한 조남관 법무연수원장은 이런 상황을 알았을 듯싶다. 검찰 내부망에 남긴 노자 한구절 '지족불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 족함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로움이 없다)란 인사는 자신과 동료와 당선인을 향한 다각도 고언으로 들린다. 명예와 생명과 재물 중 무엇이 중한가. 너무 아끼면 반드시 크게 낭패하고, 많이 가지면 반드시 크게 잃게 된다는 깨달음이다. 액셀러레이터만 있고 브레이크가 없는 검찰 조직의 생리에도 꼭 필요한 지혜이겠다.

인사는 메시지이다. 권력과 비전이 융합된 가장 강력한 시그널이다. YS의 깜짝 인사는 그런 점에서 감동을 주고 역사성을 띤다. 권영해 당시 국방장관은 인터뷰에서 "후임 김동진 대장을 천거하자 그의 고향을 묻더니 경상도가 아니란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술회했다. 기무사령관도 고향만 물었다고 했다. 나름대로 지역 안배와 통합의 정치까지 겨냥한 것이리라.

IMF사태와 아들의 구속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가 깜짝 밀어붙인 하나회 정리와 금융실명제는 건강한 민주주의 기틀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했다. 사실 이러한 거사(巨事)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워야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검찰개혁을 제1호 공약으로 내걸었던 문재인정권이 정권이양을 한달도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부랴부랴 법안을 만지작거리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려면 정권 초에 제대로 밀어붙여야 했다. 그런 것을 '적폐척결'이란 명분을 앞세워 검찰의 비상한 힘을 최대한 이용한 것 아닌가. 처음부터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를 바탕으로 한 검찰개혁 법안을 정교하게 마련해야 마땅한데, 결과적으로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단죄와 맞바꾼 셈이 되지 않았나. 동물국회란 비아냥을 들어가며 통과시킨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지금 어떤가. 존재감 제로 아닌가.

제도가 아닌 깜짝 인사로 사람을 선택한 결과는 모두 안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검사는 서울중앙지검장으로 검찰총장으로 파격 승진한다. 그럼에도 청와대를 향해 수사의 칼 끝을 겨눠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그리고 자신을 발탁한 정부를 부패세력으로 몰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반면 적폐였던 박 전 대통령을 앞장서 단죄했던 윤 당선인은 12일 "참 면목이 없다. 늘 죄송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헷갈린다. 촛불시민은 뭔가. 파면을 결정한 헌법재판소는 뭔가. 그 겨울을 달군 촛불은 역사의 변곡점인가 그저 해프닝인가.

5년 주기 정권단죄하는 쳇바퀴 정치

'잘 듣는 칼' 한동훈의 중용이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는 이미 문재인정부의 법무장관들과 유력인사 실명을 들면서 "책임지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윤 당선인은 현 정권에 대한 적폐청산 수사 여부를 묻는 언론에 "해야죠"라고 단언했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공(功)은 몰라도 과(過)는 응징한다." 감동은 없다. 5년 주기 정권 단죄는 이번에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매번 적폐를 청산한 권력이 적폐로 몰리는 도돌이표 쳇바퀴 정치는 언제나 청산될까. 복수혈전 대신 악수와 포옹의 권력이양은 백년하청인가.

박종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