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안팎 '유럽공동 핵억지력' 논의 꿈틀
슈피겔 "과거 수십년 금기사안 … 유럽, 트럼프 재선 때 미국 핵우산 못 믿는다는 공감대"
2018년 7월 12일 오전 8시30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역사적인 장면을 원하는가" 물었다. 전날 벨기에 브뤼셀 소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공관에서 밤을 보낸 트럼프 대통령은 이튿날에도 NATO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전날 만찬에서 유럽의 정상과 정부대표들 때문에 기분이 언짢았다. 유럽의 동맹 대부분은 국방비 증액을 거부했다. 게다가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러시아 가스를 들여오는 노르트스트림2 건설 중단에 동의하지 않았다.
정상회담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미국은 NATO에서 빠진다"며 "그들(유럽)이 돈을 대주는 나라(러시아)와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러시아 에너지를 대거 수입하는 상황을 지적한 것이다.
위 상황은 볼턴 전 보좌관이 비망록에서 밝힌 내용이다. 당시 볼턴은 만약 트럼프가 NATO 탈퇴 계획을 밀어붙인다면 사직서를 내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했다. 볼턴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함께 가까스로 트럼프를 설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가 2024년 대선에서 승리해 백악관에 다시 들어간다면 볼턴의 걱정이 현실화될 수 있다. 볼턴은 지난달 초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선거에서 이긴다면 NATO에서 탈퇴할 것으로 생각한다"며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의 그런 결정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에 대한 여러 착각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최신호에서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유럽 내 많은 착각을 깨뜨렸다"고 전했다. 대표적으로 러시아가 천연가스를 정치적 무기로 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또 푸틴의 과대망상이 단지 허풍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깨졌다. 독일 올라프 숄츠 총리는 3월 말 "국경을 바꾸려 폭력을 쓴 자는 언제고 그런 일을 다시 하게 돼있다"며 "그같은 일을 막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정부는 1000억유로를 들여 국방력을 강화할 계획이다. 아날레나 베르보크 외무장관은 올해 말까지 독일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국가안보전략을 수립하겠다고 밝혔다. 믿기 어렵지만 독일은 과거 그같은 안보전략을 수립한 바 없다.
미국이 NATO에서 빠지고 유럽이 기존 질서를 해체하는 러시아의 독재자와 홀로 맞선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현재 이 문제는 독일정부보다 미국 싱크탱크들이 더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이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2024년 대선 이후에도 여전히 백악관을 지킨다면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79세 고령인 바이든의 지지율은 역사적 기준에서 낮은 상황이다. 2024년 11월 대선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민주당은 유망한 대체 후보를 갖고있는 것 같지도 않다.
반면 공화당 내에는 NATO에 시큰둥한 의원들이 많다. 이달 12일(현지시각) 미 하원 공화당 의원 63명은 미국이 NATO를 지원하는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하루 뒤 퓨리서치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지지자 82%는 '미국이 서구 동맹들로부터 혜택을 본다'고 답했다. 반면 공화당 지지자에서는 55%에 그쳤다.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이자 미 국방부 국방정책위원회 위원인 마이클 오핸런은 "트럼프가 노골적으로 반-NATO 캠페인을 벌일 것이라고 예상하는 게 무리는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며 "상황이 나쁜 쪽으로 흘러간다면, 유럽이 근본적이면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중 하나는 유럽이 공유하는 핵억지력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서 금기시된 핵논쟁
슈피겔에 따르면 핵억지력 이슈는 과거에도 독일정부를 여러차례 뒤흔들었다. 1950년대 서독 콘라드 아데나워 서독 총리와 프란츠 슈트라우스 국방장관은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유럽 자체적으로 핵무기를 보유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1957년 11월 슈트라우스 장관은 프랑스, 이탈리아 국방장관들과 '미국의 핵우산에서 독립하자'는 내용의 비밀협약에 서명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샤를 드골 대통령 때문에 무산됐다. 1958년 대권을 쥔 드골 대통령은 프랑스가 단독으로 핵무기를 보유하길 원했다. 유럽 공동의 핵억지력을 갖는다는 생각은 그 뒤 추진력을 잃었다. 슈트라우스 장관은 상황이 어그러진 것을 평생 후회했다. 독일이 핵무기와 관련해 미국에 계속 의존해야 한다는 건 명백한 실수라고 봤다.
1970년대 들어 소련이 이끌던 바르샤바조약기구가 동독 등 유럽 각지에 핵무기를 배치했다. 서독 헬무트 슈미트 총리는 1979년 NATO에 '이중결의'(Dual-Track Decision)를 제안했다. 소련과 협상해 핵무기 철수를 이끌어내든지, 안되면 서독에도 핵무기를 배치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제안은 1980년대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독일과 유럽의 거리로 뛰쳐나와 '핵반대' 시위를 벌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독일 중도좌파 성향의 사회민주당도 유럽에 미국의 핵무기가 늘어나는 것을 강력 반대했다. 결국 슈미트 연립정부는 1982년 붕괴했다.
한발 더 나아가 독일 귀도 베스터벨레 외무장관은 2010년 핵무기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미국에게 '서독 뷔헬 공군기지에 배치된 핵탄두를 치워달라'고 촉구했다. 최근 사회민주당 원내대표 롤프 뮈체니히는 독일군이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전투기를 신규 구입할 수 없게 막았다.
미국을 믿을 수 있나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터지자 독일정부는 미국산 F35 전투기를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F35는 적 영토 깊숙이 미국의 핵탄두를 발사할 능력을 갖춘 최신형 전투기다. 베르보크 외무장관은 최근 열린 국가안보전략 토론회 개회사에서 "NATO는 신뢰할 수 있는 핵억지력을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슈피겔은 "독일정부는 NATO와 미국에 계속 의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미국 내 상황전개를 고려하면 다소 무책임한 입장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독일 정부간 기구인 '연방안보정책학회' 에케하르트 브로제 회장도 "NATO, 유럽을 위한 핵우산을 의문시하는 미국 대통령이 또 다시 탄생할 수 있다는 건 객관적 사실"이라며 "우리는 그런 상황을 걱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킹스칼리지런던 정치학 교수인 맥시밀리언 터홀은 수년 전부터 "미국의 전략적 관심은 중국에 쏠려있다. 따라서 유럽은 자체적인 핵억지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2018년 12월 터홀 교수는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와 프랑스 전략연구재단 특별고문인 프랑수아 에스부르와 함께 프랑스의 핵무기를 확대해 유럽 전역을 위한 핵우산으로 쓰자는 내용의 기고를 냈다. 두 학자는 "프랑스의 핵탑재 전투기를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NATO 동맹국들 영토에 순환 배치할 수 있다"고 썼다. 당시 그같은 주장은 안보정책 기관들의 주목을 받는 데 그쳤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변했다.
메르켈 총리의 안보정책 자문이었던 크리스토프 호이스겐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핵위협으로 NATO와 미국 핵우산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됐다"며 "하지만 미국은 중국을 가장 심각한 위협으로 본다. 우리는 미국에서 벌어질 수 있는 정치적 상황변화를 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12년간 메르켈 총리를 보좌한 호이스겐은 유럽에서 가장 노련한 안보정책 전문가 중 한명이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반년이 지난 2017년 여름 그는 주UN 독일대사로 미국 뉴욕에 파견됐다. 현재는 세계 최대 규모의 연례 국제안보포럼인 '뮌헨안보회의'의 대표다. 호이스겐은 "UN에서 지내면서 과거 범대서양 관계에 있었던 확실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적극적으로 유럽 자체의 핵억지력을 호소하게 된 동기다.
호이스겐은 "유럽은 핵억지력과 방어력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독일의 1000억유로 국방예산 지출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하지만 거기에 더해 독일은 프랑스와 전략적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유럽이 공동으로 러시아에 맞설 핵억지력에 기여할 수 있는지,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할지를 논의해야 한다"며 "한가지 방안은 독일을 비롯한 EU 회원국이 프랑스 핵무기 프로그램에 돈을 대고 그 대가로 프랑스 핵무기 개발계획과 배치전략 등에 발언권을 얻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는 주기적으로 미국으로부터 독립하고자 노력한다. 마크롱 대통령도 2019년 NATO가 사실상 뇌사상태라고 언급한 바 있다"며 "유럽 공동의 핵우산은 그 자체로 목표가 될 수 없다. NATO를 신뢰할 수 없게 됐을 때 들어놓은 보험 같은 성격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프랑스의 제한적인 무기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이후 프랑스는 EU 유일의 핵보유국이 됐다. 26개 회원국은 핵비확산 조약에 따라 핵무기 보유를 금한다고 약속했다. 게다가 독일은 1990년 동서독 통일을 위해 이른바 '2+4 조약'을 맺었다. 대량살상무기를 만들지도 보유하지도 않는다고 약속했다. 때문에 유럽 자체의 핵우산으로 나아가는 가장 쉬운 길은 프랑스의 핵억지력을 유럽 전역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술적인 측면을 포함해 많은 걸림돌이 있다. 프랑스가 보유한 핵탄두는 290개에 불과하다. 반면 러시아는 6000개에 육박한다. 이론상 프랑스 보유 핵탄두로도 효과적인 대러 억지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 핵탄두는 4기의 핵잠수함에 배치될 수 있다. 그중 2기의 핵잠수함만 평상시 활동 가능하다.
안보전문가들은 그같이 적은 수의 핵잠수함으로 러시아에 파괴적인 보복공격을 각인시킬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 반면 미국은 18기의 핵잠수함을 갖고 있다. 각각의 잠수함은 24기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건 프랑스가 전략핵무기만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M51 미사일은 5두의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다. 각각의 폭발력은 TNT 100킬로톤이다. 미국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한 폭탄보다 8배 강력하다. 반면 러시아는 전략핵뿐 아니라 훨씬 더 적은 폭발력의 전술핵도 갖고 있다. 이는 초토화 용도가 아닌, 적의 굴복을 이끌어내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서구 군사전문가들은 이를 '긴장을 낮추기 위해 긴장을 고조시키는 무기'라고 표현한다.
2018년 미국 국방부 핵태세검토보고서에는 '러시아가 핵무기를 크게 늘렸을 뿐 아니라 국지적 핵타격 가능성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고 기술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도 다양한 범위의 핵무기로 적을 유연하게 보복타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언급한 이유다.
현재까지 프랑스는 전술핵을 개발하지 못했다. 스위스 취리히공과대 안보연구센터 대표인 올리베르 트래네르트는 "러시아 같은 나라를 효과적으로 억제하려면 보다 유연한 선택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며 "그렇지 않다면 러시아는 유럽을 재빨리 굴복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즉 러시아의 소형 전술핵에 대한 프랑스의 대응은 대량살상무기일 수밖에 없다. 서유럽의 모든 사람을 위기에 몰아넣을 그같은 반격을 선뜻 택하기는 어렵다. 물론 프랑스가 유럽 각국의 도움으로 핵능력을 확대하고 다양화할 수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프랑스 전략연구재단 에스부르 특별고문은 "유럽 공동의 핵억지력 문제는 현존 핵자산을 기술적으로 증강하는 것이라기보다 핵사용 결정을 누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하는가이다. 즉 지휘계통 문제다. 이를 위해선 유럽 공동의 핵전략과 정책기획을 요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럽 공동 핵전략은 없다. 핵무기는 프랑스 주권의 핵심이다. 프랑스 핵무기는 드골 재임 기간 만들어졌다. 그는 1940년 나치군이 조국을 짓밟는 것을 지켜본 군인이었다. 핵무기는 프랑스가 다시는 그와 같은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드골이 다른 이에게 국방을 의존하는 것에 결사반대한 이유다.
드골의 프랑스는 1966년 NATO의 지휘체계를 탈퇴했다. 보수당 니콜라스 사르코지 대통령이 다시 NATO에 복귀한 건 그로부터 43년 지나서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현재도 NATO의 핵무기 배치 전략을 입안하는 핵기획그룹 일원이 아니다.
이 사실은 프랑스 핵무기를 유럽의 공동이해를 위해 쓰는 게 얼마나 복잡한 문제인지를 시사한다. 폴란드나 라트비아가 러시아의 공격을 받을 경우 프랑스는 핵무기로 위협하거나 핵무기를 사용해야 할까. NATO 규정과 마찬가지로, 유럽연합 국가조약 42조도 회원국들에게 '한 회원국의 영토가 군사적 침공을 당한다면 이를 도와야 한다'는 의무규정을 두고 있다. 슈피겔은 "강력한 조항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도움은 담요와 반창고 수준에서 그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2020년 2월 파리군사학교에서 안보 기조연설을 하면서 "프랑스 핵무기는 존재 자체만으로 유럽의 안보를 강화한다"고 말했다. 프랑스 외무부의 유럽담당장관인 클레망 본은 이후 "독일과 함께 핵억지력을 논의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수년 동안 "유럽은 미국과 NATO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공동의 안보와 국방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호주가 지난해 9월 프랑스와 맺은 잠수함 계약을 취소하고 미국, 영국과 다시 계약을 맺었을 때 본 장관은 "유럽에 울리는 경고음"이라고 말했다. 본 장관은 푸틴의 침공에 대해서는 "깊은 충격"이라며 "이 전쟁은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프랑스에 대해 독일은 상대적으로 혼재된 감정을 갖고 있다. 뉴욕 소재 독일 외교관들은 프랑스가 공개적으로는 EU를 칭송하지만, 프랑스가 갖고 있는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EU 공동의 몫으로 돌리자는 제안에는 격하게 반발하고 있음을 지켜봐왔다. 독일 안보기관들은 프랑스가 공개적으로 말한 바와 달리, 유럽 핵공유 문제를 놓고 독일에 실제적인 제안을 한 적이 없음을 지적한다.
독일은 프랑스 대선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핵억지력과 관련한 전략적 논의는 프랑스 대선 이후 진행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현재 현직인 마크롱 대통령이 박빙 우세를 지키고 있다. 마린 르펜 후보는 약간 뒤처져 있다. 우파 포퓰리스트인 르펜은 "당선된다면 NATO의 지휘체계를 떠나겠다"고 공약했다. 르펜이 당선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가능성이 제로인 건 아니다.
독일 한 정치컨설턴트는 슈피겔에 "만약 마크롱이 이긴다면, 올라프 숄츠 총리는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며 "프랑스가 핵우산을 EU 전체로 확대하지 않는다면, 몇몇 유럽 국가들이 그와 관련한 상호협력에 나설 수도 있다. 이상적인 해법은 아니지만 어디서든 일단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