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항쟁엔 경찰관 내부고발도 있었다
2022-06-13 11:10:45 게재
박종철 고문치사 축소조작, 경찰 제보로 대서특필
민주화운동 도화선 … 경찰청 독립으로 이어져
그 중에는 6월 민주항쟁의 계기가 됐던 한 경찰관의 내부고발 이야기가 담겨 있다.
1987년 당시 치안본부가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 치사사건을 축소·은폐하려다가 동아일보 해직기자였던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영등포교도소 한재동 교도관 등에 의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치안본부의 축소조작 기도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기까지 용기 있는 한 경찰관의 내부고발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87년초 박종철군이 경찰 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드러나 민심이 악화되자 치안본부는 5명의 고문 경찰관 중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만 구속하며 서둘러 마무리하려했다. 이 전 의장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된 두 경찰로부터 고문 경찰관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 한 교도관 등의 도움을 받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전했다.
사제단은 그 해 5월 18일 박종철군을 고문해 죽음에 이르게 한 진짜 범인은 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사, 이정호 경장 등이며 치안본부가 사건을 은폐·조작하려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언론은 크게 보도하지 않았다. 폭로의 내용은 구체적이었지만 확증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박종철군 고문 치사사건 축소·은폐 사실은 한 경찰관의 내부고발에 의해 언론에 대서특필되기 시작했다. 이 경찰관의 제보를 받은 동아일보는 5월 22일자로 박종철군 고문치사 경관이 3명 더 있으며, 관련 상사모임에서 범인 축소 조작을 모의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다음 날에는 경찰의 은폐 모의 공작을 검찰 고위층이 석 달 전에 이미 알고도 수사지휘권 발동을 포기했으며 법무부 고위관계자도 검찰이 파악한 정보를 보고받는 등 법무부와 검찰의 최고 책임자들이 진상을 파악하고도 묵인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같은 언론 보도에 분노한 시민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고, 6.10민주항쟁으로 이어져 직선제 개헌 등 '6.29선언'을 이끌어냈다.
전시물에는 치안본부 소속이던 모 경찰관이 "처음부터 밝혔어야 했다. 더 이상 감춰선 안된다"며 경찰 고위직이 처음부터 축소·조작에 개입했음을 동아일보기자에게 제보했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내부고발을 한 경찰관은 이미 고인이 됐지만 가족들이 공개하기를 꺼려 익명의 제보자로만 남았다.
내무부 직할이었던 치안본부가 1991년 독립적인 외청인 경찰청으로 분리된 것도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에 있다. 인사와 예산 등의 독립성을 부여해 권력에 예속되지 않고 행정부로부터 중립을 지키도록 하자는 취지에서였다.
이후 경찰의 역사를 보면 정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됐다고 할 순 없지만 제도적 기반은 마련됐던 셈이다.
하지만 최근 행정안전부가 경찰국 신설을 검토하는 등 경찰에 대한 통제를 다시 강화하려 하고 있어 우려를 낳는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경찰청을 독립적인 외청으로 분리한 것은 과거 권위주의정권 시절 권력의 하수인 역할이 아닌 민중의 지팡이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서였다"며 "최근 행안부가 경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은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려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그는 "수사권 조정으로 경찰권이 비대해진 만큼 이에 대한 견제와 감시의 필요성이 커진 것은 맞다"며 "하지만 정권에 의한 정치적인 통제가 아닌 외부로부터의 민주적인 통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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