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대표 금융허브 놓고 치열한 경쟁
영국 이코노미스트 "홍콩 싱가포르 상하이 각각 장단점 … 서구기업들 싱가포르 주시"
국제 금융허브가 전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사업 아이디어를 실행시키는 발사대로, 전문기술과 자본 기업가를 한데 모으는 구심점으로 기능한다.
아시아 지역은 글로벌 GDP의 1/3 이상을 차지한다. 글로벌 경제 내 중량감은 지속 상승하고 있다. 따라서 금융허브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지난 200년 동안 아시아 지역에 여러 허브가 등장했다. 인도 콜카타(캘커타)와 말레이시아 페낭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도쿄가 아시아 금융허브를 꿈꿨지만 1990년대 초 거품이 붕괴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홍콩은 뉴욕과 런던에 이어 명실상부한 3대 글로벌 금융허브다. 역사가들은 금융허브로서의 홍콩의 위상이 정립된 때를 1970년대로 본다. 중국이 1978년 경제를 개방하면서 아시아 역외 금융허브로서 홍콩의 중요성은 극적으로 커졌다. 홍콩은 서구 금융인들이 중국 기업인들과 교류하는 만남의 장이 됐다.
홍콩, 팬데믹 전후로 위상 약화
아시아의 글로벌 허브라는 홍콩의 위상은 코로나19 팬데믹 전후로 다소 약화됐다. 중국정부는 홍콩에 대한 지배력을 지속 강화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국가보안법을 도입한 홍콩에 대해 '오랜 기간 독립적이었던 홍콩의 사법체제가 중국정부의 정치적 개입으로 약화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됐다. 게다가 코로나19에 대한 강력한 방역정책을 계속 고수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싱가포르의 매력도가 커졌다. 싱가포르는 홍콩과 마찬가지로 관습법 체계를 가졌고 친기업적 규제와 낮은 세율 등을 자랑하는 또 다른 금융허브다. 게다가 동남아시아로 눈을 확대하는 서구 기업들은 인접성 측면에서 싱가포르에 후한 점수를 준다. 싱가포르는 지난해부터 방역조치를 대폭 완화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아시아 금융허브 지도가 바뀌고 있다"며 "도시국가인 싱가포르가 약진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의 거대 자산운용기업인 블랙록에서 중국 제약사 시노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대기업들이 싱가포르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싱가포르엔 고액 자산가를 대상으로 하는 투자자문회사 '패밀리 오피스'만 100여곳이 넘는다.
또 중국의 인터넷 감시·검열 시스템인 '만리방화벽'으로 글로벌 테크기업들이 중국 도시들을 외면하는 흐름도 있다. 홍콩의 경우 총 교역 대비 지적재산 거래와 하이테크 수출액이 각각 전세계 54위와 121위에 그친다. 반면 싱가포르는 15위, 1위를 기록했다.
이런 배경을 고려했을 때 홍콩과 싱가포르 상하이 등 아시아 3개 금융허브는 향후 어떤 모습으로 발전할까. 이코노미스트지는 금융허브를 진단하는 3개의 잣대를 제시했다. 첫째 지역적·국제적 사업을 수행하는 기지로서의 활용성, 둘째 자산관리와 투자센터로서의 입지, 셋째 자본시장의 규모와 그와 관련된 금융활동이다.
먼저 글로벌 기업들의 지역 거점으로서 홍콩의 위상은 늘 중국본토와 연계성에 방점이 찍혔다. 하지만 그 연관성은 최근 보다 밀접해졌다. 홍콩에 지역본부를 둔 중국 기업들의 숫자는 2015년 이후 2배 이상 늘었다. 반면 홍콩을 아시아 또는 대중화권 사업의 거점으로 활용하는 미국 기업들의 숫자는 점진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글로벌 대기업 싱가포르에 속속 거점
지역 거점 측면에서 싱가포르는 홍콩에 비길 수준이 안된다. 하지만 최근 글로벌 대기업들이 속속 싱가포르에 거점을 마련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미국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소니뮤직, 영국 가전메이커 다이슨, 베트남 전기차 제조사 빈패스트가 최근 싱가포르에 지역 또는 글로벌 본부를 설치했다. 미국 기술기업 알파벳과 메타, 마이크로소프트나 글로벌 사업을 확대하는 알리바바와 틱톡, 텐센트 등 중국 기술기업들도 만리방화벽을 우회할 필요성 때문에 싱가포르에 거점을 마련했다.
상하이는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서구 기업들의 전초기지를 끌어들였다. 코카콜라 등 일부 서구 기업들은 아시아 본부를 홍콩에서 상하이로 옮겼다. 게다가 2020년 중국정부의 규제 완화로 외국인 투자은행들도 중국에서 지배주주로서 사업을 운영할 수 있게 됐다. 여러 기업들이 그에 따라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사업을 확대했다. 아문디와 블랙록을 포함한 외국자산운용기업 역시 중국 본토에서 존재감을 키웠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진자 발생으로 상하이가 상당기간 봉쇄되면서 단기간으로 서구 기업들의 발길이 뜸해질 가능성이 커졌다. 최근 상하이 소재 미국상공회의소 조사에 따르면 133개 미국 기업 중 중국 투자를 늘릴 계획이라고 답한 기업은 1곳에 불과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하지만 중국본토에 진출하려는 기업들에게 상하이는 궁극적으로는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라며 "중국정부의 홍콩 지배력이 커질수록 중국본토에 거점을 마련하는 일은 더욱 긴요한 일이 된다"고 전했다.
금융CEO 구인구직 기업인 '웰즐리'의 크리스천 브런은 "중국엔 광범위한 숫자의 공급업체와 고객들이 있다"며 "중국사업을 하려면 고객과 기업들이 있는 역내에 거점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브런은 또 "중국본토와 싱가포르의 경우 외국기업이 주도하는 일자리 성장세가 있을 것"이라며 "반면 홍콩의 경우 외국기업들의 역할이 줄어들 수 있다"고 예상했다.
금융허브 도시들의 상대적인 지배력을 재는 두번째 잣대는 자산관리 부문이다. 이 분야에선 홍콩과 싱가포르의 경쟁이 치열하다. 홍콩 내 운용자산 규모는 2010년 1조3000억달러에서 2020년 3조달러 이상으로 증가했다. 싱가포르의 경우 1조달러에서 3조4000억달러로 치솟았다. 싱가포르는 대략 2017년에 홍콩을 추월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싱가포르의 경우 신탁사 설립이 상대적으로 간편한 데다 세제혜택도 많아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이 대거 몰렸다"며 "2020년 출범한 새로운 형태의 투자기업 '가변자본회사'(VCC)도 글로벌 펀드매니저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전했다.
중국본토 진출엔 상하이가 대안
유력 벤처투자자들도 홍콩보다는 중국본토나 싱가포르에 발을 디뎠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10년 동안 글로벌 20대 벤처투자펀드 중 7개가 베이징이나 상하이, 선전에 둥지를 틀었다. 동남아시아 스타트업들을 눈여겨본 벤처투자자들은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삼았다. 싱가포르가 인도 스타트업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도 한몫했다.
반면 금융허브의 세번째 잣대인 자본시장과 관련해선 홍콩을 넘을 곳은 없다. 부분적인 자본통제를 실시하는 중국에 대한 관문으로서 홍콩의 가치는 여전하다는 분석이다. 홍콩은 중국본토와의 주식·채권 연계 프로그램으로 외국인 투자자들의 거래를 주선한다. 중국본토 고객들도 이 프로그램을 통해 역외주식을 사고판다.
게다가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를 통한 위안화 총거래의 3/4이 홍콩에서 이뤄진다. 홍콩은 중국 기업들이 상장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2019년 알리바바와 2020년 징둥닷컴이 홍콩증시를 통해 상장했다. 전반적으로 홍콩의 상장주식 총가치는 6조달러에 달한다. 상하이는 7조달러(중국본토 전체는 12조달러), 싱가포르 7000억달러 등이다. 이는 홍콩이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경쟁력을 갖는 요인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홍콩은 중국본토에 투자하는 관문으로서 그 영향력을 계속 유지할 전망"이라며 "하지만 새로운 종류의 사업이나 기업들을 끌어들일 가능성은 낮아졌다. 홍콩으로 이동하는 기업들은 중국기업일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외국계 기업들의 입장에선 홍콩이 재개방을 계속 지연하는 건 금융허브로서의 글로벌 위상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에서 광범위한 사업을 펼치려는 기업들은 싱가포르를 대안으로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 사업하고자 하는 기업들은 본토로 진입하는 방안을 택할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예전엔 홍콩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이제 글로벌 기업들은 상하이와 싱가포르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중국 사업은 상하이를, 나머지 아시아 사업은 싱가포르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매력적인 베팅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