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말하는 산재예방 ⑬

위험성평가의 위험

2023-01-31 13:48:22 게재
고재철 법무법인 화우 고문, 전 안전보건공단 안전보건연구원장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1 년 동안 시행 효과와 동 법의 적용에 관해 많은 논란들이 있었다. 이런 논란과 중대재해 감소라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골격으로 올해의 산업안전보건 정책을 내놓았다.

산을 오를 때 위치에 따라 눈에 보이는 풍경이 다르듯 안전 역시 각자의 지식과 경험에 따라 이해의 양상이 다르다. 산업안전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을 한 본인도 퇴직 후 현장을 접하면서 현장의 실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한 것을 알았고, 현장의 바닥까지 살필 수 있는 역할이 아니었다는 부끄러운 핑계를 대고 있는 중이다.

대형 석탄 보일러 화구에서 불붙은 석탄 덩어리를 삽으로 뒤적이는 화부의 열 고통을 보일러 설계자가 실감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장 바닥의 실제 상황이 충분히 감안되지 않은 정책은 일시적 자원 낭비를 넘어 그 낭비를 장기적으로 고착시키는 사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위험성평가는

위험성평가는 작업 또는 생산설비를 설치하기 전에 과정 중에 예상되는 위험을 사전에 살피고 적절한 대책을 찾아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기법으로 2013년에 법제화됐다. 이 기법은 사고 위험의 예측을 절차화한 것이 안전점검 등 기본의 방법보다 효과적일 거라는 관점에서 도입됐다.

따라서 이 기법의 핵심은 어떤 위험이 있는가를 사전에 정하는 것과 그 위험요인 때문에 일어날 사고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그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를 추정하는 것이다. 이에 관한 간략한 절차와 포괄적 기준이 고시로 제정돼있고, 그 수준의 가이드와 사례가 온라인으로 제공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생산 규모와 특성에 따른 구체적 실행 기준과 그에 관한 효과 검증 등 생산현장의 사고예방 기법으로 실제 적용하기 위한 기반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실용화하려면

위험성평가가 생산현장의 사고예방 기법으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몇가지 선행조치가 필요하다. 첫째, 생산 현장별 규모와 특성에 따라 분류된 구체적인 위험 요인과 그 위험성을 판단할 수 있는 정보가 필요하다. 그 중 가장 양질의 정보는 유사 작업에서 과거에 발생되었던 사고 분석 자료일 것이다.

그러나 개별 기업의 자체 사고 자료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에 관해 전 산업현장에서 실제 발생된, 수백만건에 달하는 정보가 산재보험 자료에 있다. 물론 보상을 위해 업무 관련성을 판단하기 위한 자료여서 예방을 위한 자료로서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정제를 거친다면 가장 양질의 위험성평가 자료가 될 것이고, 생산 규모와 특성에 따라 분류만 해서 제공하더라도 기업에게는 무엇보다 활용도가 높은 자료가 될 것이다.

둘째, 위험성평가 기법의 성과 검증이 필요하다. 사고는 흔치 않은 사건이어서 대조군 등 성과분석을 위한 엄밀한 사전 설계에 따른 성과 측정 분석이 필요하고, 그와 같은 검증으로 바탕으로 위험성 평가의 의무화를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현 단계에서의 규제는

이미 위험성평가가 법제화돼 있지만 위의 연유들을 고려해 벌칙은 정한 바가 없다. 현재도 한 대기업의 경우 연간 4만여 건의 위험성평가 실행에 많은 인력이 투입되고 있으나, 자체 분석에서 실효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적정성을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마련되지 않은 위험성평가를 감독과 수사 포인트로 기업의 실행을 강요하는 정책은 형식 요건을 갖추는 일이나, 수행 증빙서류 작성으로 인한 기업의 엄청난 자원 낭비를 조장하게 된다. 그 결과 위험성평가라는 기법을 폐기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현 단계에서 위험성평가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위에 제시한 선결 과제의 해결에 중심을 둬야 하고, 그 결과로 기업 스스로 생산현장의 사고예방 수단으로 채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잔디구장이 좋다고 해서 무작정 콘크리트 바닥에 잔디를 덮는 우를 범하게 해서는 안된다. 정부의 정책 설계에 전문가들의 견해도 필요하지만, 집행된 정책의 정확한 평가와 반추가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정직한 실패에 관대하지 못한 사회풍토가 발전적인 정책 수립에 장애가 되고 있다. 수십년에 걸쳐 집행된 많은 정책마다 정확한 평가가 이뤄졌다면 우리나라의 산업안전 상황은 현재와는 사뭇 다른 양상일 것이다.

정직한 실패에 관대한 사회풍토, 떳떳하게 실패 원인을 드러내는 공직사회의 규범은 사고예방을 위해 언론과 정치권이 앞장서야 할 사회적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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