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말하는 산재예방 (16)

안전 선진국으로 가는 길 (2)

2023-04-21 11:05:06 게재
고재철 법무법인 화우 고문, 전 안전보건공단 안전보건연구원장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중대재해법)이 도마 위에 올라있다. 기업의 경영 부담, 법문의 포괄성, 최고경영책임자(CEO)-최고안전책임자(CSO) 논란 등 여러 의견을 고려해 정부가 법령 개정에 착수했다. 사법적 판단 빈약 등 성급한 감은 있지만, 시행 이후 드러난 불합리한 사항을 고쳐서 입법 취지를 살리려는 개정은 타당하다.

정량, 정형적인 현재의 시행령으로는 생산 특성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개별 기업의 안전시스템의 고도화를 유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시행령은 안전보건관리 체계를 구성하는 총론적 요소의 기능과 속성들로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법인의 경우는 경영자 자연인보다는 이윤 추구라는 태생적 본성을 작동시킬 수 있는 과징금으로 법인에게 이행 책임을 묻는 것이 시스템의 개선에 효과적일 것으로 생각한다.

경영요소에서 안전이 배제되면

사고를 예방해야 한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하지만 사고는 발생 확률이 낮은 예측 불가능한 사건 즉, 예방을 소홀히 하더라도 자주 일어나지 않는 사건이어서, 개별 기업의 경영요소에서 배제되기 쉽다. 현재의 심각한 사고사망률은 인명 존중을 넘어, 국가 신뢰도 손상, 노동력 손실, 청년들의 취업 기피 등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키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에서 안전이 경영의 우선 순위에 있어야 마땅하겠다.

2010년 무렵에 사회적 이슈가 됐던 반도체 제조업 근로자의 직업성 암에 관한 역학조사 결과가 2019년에 발표됐다. 그 결과 관련 기업은 근로자의 직업성 암에 대한 책임 이행 약속과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거액의 기금을 기부했다. 발표를 앞두고 그 과정에 깊이 관여했던 분으로부터 놀라운 사실을 전해 들었다.

직업병을 일으키는 화학물질의 인체 흡입을 방지하기 위해 작업현장의 공기 중 유해물질 농도를 측정해 그에 따른 조치를 하도록 산업안전보건법에 명시돼 있다. 기업 실무진은 제3의 업체를 선정해서 작업환경을 측정하고 비용을 지불했다.

이 과정에 경영진의 관심 부족은 실무진으로 하여금 근로자 직업병 예방보다 법정 허용 농도 준수를 우선시하게 했다. 그 결과 직업성 암 예방조치에 공백이 발생했다. 경영진은 사회적 이슈가 된 후에야 작업환경에 문제없다는 지난 실무보고의 의미를 알게 됐다는 것이다.

중소기업에 대한 중대재해법 유예기간 연장 얘기가 있다. 중소기업의 녹록치 않은 경영환경을 생각하면 그런 얘기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높은 사고사망률에 사망자 대다수가 그 영역에서 발생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유예기간 연장은 말이 안된다. 기업경영에 대한 배려가 근로자의 생명보호에 우선할 수는 없지 않은가.

중소기업 중대재해법 적용 유예 안될 말

'중소기업은 법 집행에서 배려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탈피해야 하는 낡은 고정관념이다. 법 집행의 합리화로 해결할 사안이다. 게다가 그 영역의 사망사고를 줄이지 못하면 대한민국 산업안전 수준 향상은 불가능하다. 대기업의 사망률은 이미 선진 수준에 들어와 있다. 대기업 현장 산업안전 감독의 지적 사항들은 오히려 현장의 실무를 낡은 과거방식에 잡아매고, 효율까지 떨어뜨리고 있는 것 같다.

한가지 예로 안전교육은 근로자의 이해를 통한 행동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교육 대상·시간·자격 등 법정기준 준수를 확인하는 감독은 실무자들을 사고예방 성과와 거리가 먼 증빙서류 확보에 빼앗기게 만든다.

따라서 대기업은 자율과 책임의 영역으로 하고, 지도·감독 등에 소요되는 행정자원은 안전에 대한 의지도 낮고 자원과 지식도 부족한 중소기업 영역에 집중하는 것이 국가적 산업안전 수준과 행정효율 면에서 타당하다고 본다.

얼마 전, 전 직장 후배가 평생 근로자 편에서 일한 나에게 기업을 사고 책임으로부터 방어하는 일은 어떤지 물었다. 변절을 추궁하는 의미도 있어서 한참을 생각했다. 현재 나는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사고현장의 생살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를 통해 과거 나의 이해 부족과 착오들을 각성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이해들로 기업의 안전시스템 개선과 합리적인 법 집행을 위해 일하고 있다. 사고예방은 근로자와 기업의 공동 목표다.

이번 개정이 중대재해법으로 형성된 기업의 관심이 위축되지 않고 안전실무의 실질적 발전을 통한 중대재해 감소로 이어지도록 '안전을 기업 경영의 우선순위에 두세요'라는 선명한 메시지로 법령의 행간을 채워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