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 141년 비사 | ①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한미외교의 시작
근대화 위한 몸부림을 시작하다
2023년은 조미수호통상조약(조미조약) 체결 141주년, 공식적인 미국(하와이) 이민 120주년, 한미동맹 70주년이 겹치는 의미 있는 해다. 윤석열 대통령은 4박 6일간 미국 국빈 방문에서 '한미동맹 70주년'의 상징성을 부각했다. 특히 알링턴국립묘지 무명용사의 묘 및 한국전 참전기념비, 펜타곤 방문은 그 의미를 상징하는 일들이었다.
이 연재는 1882년 5월 22일 조미조약 체결을 계기로 141년 동안 한국과 미국 양국 외교사에서 새롭게 발굴되거나 잘못 알려진 '숨은 사건과 인물'을 소개해 한미관계의 역사적 의미와 이해를 돕고자 한다.
실질적인 '자주외교'의 시작
1882년 5월 22일, 조선은 서구 열강 중 최초로 미국과 조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은자(隱者)의 나라에서 벗어난다. 당시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은 조약 1조에 '조선은 중국(청)의 속국'이라는 내용의 명문화를 요구했으나, 미국 특명전권대사인 해군 제독 슈펠트(Robert W. Shufelt)는 조선의 '독립론'을 주장했다.
조약문에는 '속국'이라는 단어를 삭제하는 대신 고종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별도조회문(別途照會文)에 이를 포함하기로 하고 조약은 타결됐다. 하지만 끝내 '속국'의 조항은 삭제된 채, 미국 의회와 대통령 아더(Chester A. Arthur)에 의해 비준되었다.
조미조약 14조 중 제1조 '거중조정'(居中調整, Good Offices)과 제2조 '공사급 외교관 파견과 영사관 설치', 제5조 '수출입상품에 대한 관세부과권' 조항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조항은 조선이 미국으로부터 '자주독립국'임을 인정받고 서로 '대등한 외교'를 인정받는 실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제1조에 명시된 '거중조정'은 조선이 주변 열강의 침략 시 미국이 개입해 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했다. 이는 6년 전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 불평등조약과는 성격이 다른 최초의 쌍무적인 협약이었다. 이 조약체결로 수백년간 유지해왔던 조선과 중국 간의 '조공-책봉' 체제를 청산하고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1877년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미국을 부정적으로 인식했던 고종은 왜 미국과 수교하고자 했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1888년 초대 공사 박정양 일행으로 파견되어 2대 서리 공사를 역임했던 이하영(1858~1929)이 쓴 '한미국교와 해아사건'(1926)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왈 조선과 거리가 멀어서 조선침입이 그다지 심하지는 안을 것이요, 이왈 황금의 부국이니 물질적으로 덕을 볼 것이요, 삼왈 종교지상주의의 국가이니 도덕을 존중할 터이라 모욕과 야심이 적을 것이라는 달관적이였든 것이다."
이처럼 고종은 미국을 믿었으나 미국은 그의 믿음을 저버린다.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 가쓰라-태프트밀약(1905) 등을 거치면서 일본이 조선에 주둔하는 문제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용인한 것이다. 조선(대한제국)이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4대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설 자리는 없었다. 미국의 용인 하에 36년간 일제강점기를 겪는 냉엄한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조미수교 장소에 게양된 최초의 태극기
1882년 조미수교 장소에는 조선의 국기(國旗) 태극기와 미국의 성조기가 게양됐다. 당시 조선의 공식적인 국기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1882년 9월 일본 수신사로 파견된 박영효(朴泳孝, 1861~1939)가 일본으로 가는 메이지마루(明治丸) 상선에서 태극기를 최초로 제작했다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1882년 7월 미국 해군부(Secretary of the Navy)가 발간한 '해양국가들의 깃발들'(Flags of Maritime Nations)에는 미국 아르헨티나 오스트리아 중국(청) 조선 일본 등 49개국의 국기 도안이 포함돼 있다.
2017년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1882년 조미수교 때 미국 특명전권대사로 참가했던 슈펠트의 문서(The Papers of Robert W. Shufeldt)를 모아놓은 박스(Box) 24에서 태극기 도안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공개한 바 있다. 이는 미국 의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데, 필자가 2019년 2월 5일 의회도서관을 방문해 확인 결과 Box 37에서 태극기 도안을 확인했다.
이 도안은 '해양국가들의 깃발들'에 실린 태극기와 동일한 도안으로, 조미수교를 앞둔 1882년 5월 14일 조선 국기가 없다는 사실을 안 슈펠트는 조선 부대신 김홍집에게 국기를 만들어 사용해 달라고 요구한다. 이에 대해 역관(譯官) 이응준은 같은 달 14일과 22일 사이에 미국 함정 스와타라(Swatara)호에서 종이에 펜으로 태극기를 그렸다.
당시 태극기 도안은 깃대 6㎝, 깃발(Ensign) 가로 7.2㎝, 세로 4.4㎝ 크기였다. 청색·적색의 태극문양과 흑색의 건곤감리 4괘 등 박영효의 태극기 도안과 유사한 모습이지만, 태극의 형태와 괘의 위치가 다르다. 그림 위에는 '코리아'(Corea), 아래에는 '깃발'(Ensign)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1883년 3월 6일 고종은 태극기를 조선의 국기로 공식 반포한다.
조미조약 체결 장소는 자유공원 입구
조미조약 체결 장소가 인천시 화도진공원인지 아니면 중구 올림포스호텔 부지(전 해망대)인지로 의견이 분분했다. 실제 2곳에 관련 표지석이 설치되기도 했다. 그러나 2013년 김성수씨(인천본부세관 공항여행자통관검사)가 '인천해관장(인천세관장) 사택 터'의 정확한 위치를 표기한 세관 문건을 발견하면서 조약체결 장소 논란은 일단락됐다. 2015년 11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장소는 어디인가?'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 인천시는 관련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쳐 자유공원 입구 인근(중구 제물량로232번길 23)을 비정(比定)해 표지석을 세운다.
의견이 분분했던 조미수교 체결 장소를 비정할 수 있었던 근거는 다음과 같다.
1882년 5월 '조미조약'에 직접 서명했던 미국 특명전권대사 슈펠트는 고종의 초청을 받아 1886년에서 1887년 사이 수개월 간 국빈 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서울에 거주하던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 목사를 만나 '조약 체결을 위해 제물포에 상륙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또한 슈펠트가 타고 왔던 미 군함 '소아타'의 함장 쿠퍼도 조약 체결 현장에 입회했는데, 그 또한 아펜젤러 목사에게 조약 체결 장소가 세관장(稅關長) 관사라고 확인해 주었다.
원래 세관장 관사는 미국 영사관 건물을 짓기 위해 조선정부가 미국 측에 건네준 땅이었는데, 미 국무부는 이 땅을 포기했다. 1889년 조선정부의 총세무사로 있던 헨리 메릴(Henry F. Merill)이 정부를 대신해서 이 땅을 매입, 인천의 관세무사 관사로 줄곧 사용했다. 2013년 세무사 공관(稅務司公館)이라고 표기된 해관 문서를 발굴하면서 조미조약 체결 장소와 미국 공사관 부지, 세관장 관사가 동일한 장소임을 확인하고 확정할 수 있었다.
위에 소개한 △조미조약 체결 과정 △조문 내용 △최초로 게양된 태극기 도안 △체결 장소 비정 과정 등은 수많은 한미 외교사의 사건과 인물 중 일부에 불과하다. 141년 동안 수많은 부침의 역사는 대한민국이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교훈을 준다. 오늘은 1882년 5월 당시 초심을 돌아볼 필요가 있는 시기라 여겨진다.
■참고자료
김원모,『개화기 한미 교섭관계사』, 단국대학교출판부(2003)
경인방송,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 제자리 찾았다'(2022.12.27.)
조선일보, '가장 오래된 태극기 발견'(2004.1.27.)
조선일보, '미국서 찾아낸 최초 태극기 도안'(2018.8.14.)
이민식,「금산 이하영 연구(1858~1929)」,『백산학보』제50호(1998.3.30.)
이하영,「한미국교와 해아사건」,『신민』14(1926)
인천일보, '역관 이응준 최초 창안자 조미조약 체결 당시 최초 사용'(2016.1.4.)
한겨레, '드디어 제자리 찾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 표지석'(2019.6.11.)
한종수,「駐美 朝鮮公使館 개설과 '자주외교' 상징물 연구: 공문서 및 사진자료 분석을 중심으로」,『역사민속학』44(2014.3.30.)
Bureau of Navigation, Secretary of the Navy, Flags of Maritime Nations, PLATE IX(1882.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