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미쳤던 '이런 사람 있었네'

2013-04-02 12:11:28 게재

[한국도서관운동의 선구자 엄대섭] 그의 삶과 꿈

책 한 권에 바뀐 인생, 전국 3만여 마을에 문고 씨앗 … 민중의 독서권리 위해 평생 헌신

중장년층 이상은 동네 곳곳에 설치된 마을문고를 기억할 것이다. 볼 만한 책, 쉽게 쓰여진 책은 적었으나 글 자체에 목 말랐던 가난한 농촌과 도시 사람들은 마을문고가 그저 신기하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전국 3만여 곳에 마을문고의 씨앗을 뿌린 이는 바로 엄대섭이다. 그는 사재를 털어 전국 곳곳을 누비며 30여년간 마을도서관 사업을 펼쳤다. 보안당국은 그의 순수성을 의심, 20여년 사찰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아무 꼬투리를 찾지 못했다"며 백기를 들었다. 이제 번듯한 공공도서관이 곳곳에 들어서 시민들의 지적자유를 충족시키고 있다. 하지만 '도서관의 근대성과 공공성 확보'라는 엄대섭의 문제의식은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그의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숙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일제시대 지독하게 가난한 소년이 있었다. 돈을 벌러 일본에 간 열일곱 살 소년은 지극히 평범한 글귀를 접하고 무릎을 친다.

"남의 흉내만으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같은 일이라도 남이 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남이 하지 않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하느라 며칠 동안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소년은 마침내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린다. 대동아전쟁을 앞두고 의류품귀 현상을 겪던 일본 내 사정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부잣집에서 묵혀 두던 낡은 의류를 받아다 값싸게 시장에 되팔았다. 소년은 일본 고베지역 교포사회에서 '돈벌이의 신동'이라 불릴 만큼 크게 성공했다. 그가 바로 엄대섭이다.

엄대섭은 돈벌이의 꿈을 이루고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은 현실적 힘이 바로 '책'에서 비롯됐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책읽기를 삶의 나침반으로 설정하게 된 이유다.

해방 후 고향에서 도서관을 만들다
해방 후 귀국한 엄대섭은 이런저런 궁리 끝에 1951년 여름 장서 3000권 정도를 마련, 고향 울산읍에 사립 무료도서관을 열었다. 절반은 일본에서 가져온 책으로, 절반은 귀국 후 이곳저곳에서 사 모은 책으로 채웠다. 시설이라야 기다란 탁자와 의자 몇 개가 전부인 빈약한 수준이었지만 평생 도서관을 접해 본 적 없는 시골 사람들에겐 낯설지만 반갑기 그지없었다.

울산 주민에게 책읽기를 권장하기 위해 '먹고만 사는 것은 사람 닮은 짐승이다. 사람 짓 하려거든 책 괄시하지 마소'라는 내용의 표어를 써서 관청과 공공건물 등 눈에 띄는 곳에 붙였다. 이를 빌미로 경찰 당국은 "제 돈을 들여 무료도서관을 운영하는 이유가 뭐냐"며 장서를 하나하나 검열하기 시작했다. 도서관 열람자가 읽은 책의 내용까지 조사하는 바람에 식자층들조차 도서관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을 겪은 엄대섭은 '도서관을 공립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곳저곳 지자체에 의사를 타진하던 끝에 1953년 경주읍에 도서관 도서와 시설을 기증, 무보수 촉탁직 관장을 맡게 된다. 도서관운동에 한 발짝 더 빠져들게 된 것이다.

한국도서관협회 재창립 나서
경주읍립도서관장으로 재직하면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도서관 진흥운동을 전국 차원으로 끌어올리나' 하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가 택한 방법은 한국도서관협회의 재창립이었다. 1945년 조선도서관협회가 발족했지만 한국전쟁으로 와해되면서 제구실을 못 하는 상황이었다.

시골 출신 장사꾼이 몇 년간의 사립도서관장 경력을 내세워 한국도서관협회를 재창립하자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중앙 단위의 도서관 관련자들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지만 엄대섭의 저돌적인 밀어붙이기 앞에 결국 두 손을 들었고, 우여곡절 끝에 1955년 한국도서관협회가 재창립됐다. 조근영 당시 국립도서관장이 회장을, 이봉순 이화여대 도서관장이 전무이사 겸 부회장을 맡았다. 엄대섭은 사무국장을 맡아 실무를 총괄했다.

도서관협회는 도서관발전의 기틀이 되는 도서관법 제정운동을 펼치는 한편 협회 기관지 '도협월보'를 창간, 조직의 내실화를 다져나갔다.

엄대섭은 1960년 경향신문 투고를 통해 "선진국에는 2000명 내지 3000명에 1개 꼴로 공공도서관이 있는 데 반해 우리는 인구 2200만명에 18개 공공도서관뿐이니 120만명에 1개 꼴이다. 국민독서는 도서관 보급 없이는 이뤄질 수 없으며, 도서관법 제정 없이는 도서관이 보급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해둔다"고 역설하며 공공도서관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촉구했다.

농촌 풀뿌리 도서관운동에 투신
그러던 그는 1961년 협회 사무국장과 경주시립도서관장 직을 물러나 농촌 풀뿌리 도서관운동에 전면 투신한다. 도서관장을 맡으며 헌책을 모아 농어촌에 보내주는 운동을 지속했으나 보내준 책들은 도배지나 휴지, 담배말지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독서동기를 부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보내주는 헌 책은 환영받기 어려운 탓이었다.

그는 당장 경주의 문전옥답 농토 4두락을 처분해 자금을 마련했다. 서울 돈암동 살림집 아래채에 사무실을 차리고 자신이 회장을 맡고 처를 직원 삼아 마을문고보급회를 설립했다. 마을문고를 이해시키는 유인물을 만들어 알 만한 지인이나 도시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당신의 고향에 당신의 이름으로 마을문고를 설치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장삿속으로 하는 책 행상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독서와 도서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대단히 빈약한 시절이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 서울지방법원 어느 부장판사로부터 문고 5개 분 설치비를 받고 기뻐 내달리다 손에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첫해 1년 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지만 전국에 설치된 문고는 26개에 불과했다. 의기양양하던 엄대섭 회장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꺾여갔다. 그러던 중 기적이 일어났다. 정부 보조금이나마 받아보고자 뻔질나게 문교부에 드나들던 중 한 기자의 눈에 문고함이 띈 것이다. 다음 날부터 사흘에 걸쳐 모든 중앙지에 대문짝만 하게 보도됐다.

엄대섭 회장은 이에 힘입어 여러 언론기관에 문고설치 공동모금회를 의뢰했다. 각 언론은 사고를 내고, 문고 설치기금을 모금하고 기탁자의 명단을 발표하는 등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까지 책 장사꾼 취급을 받던 그는 사회로부터 분에 넘치는 인정과 언론의 계속된 협조를 받게 됐다. 이는 마을문고 사업 추진의 결정적 힘이 됐다.

1961년 창립 이후 1967년까지 엄대섭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 보급회의 관리운영비를 댔지만 결국 재정적 시련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이후락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과 끈이 닿는 고태진 상업은행 지점장을 6개월 동안 쫓아다닌 끝에 1967년 10월 마을문고 본부 회장에 이후락 비서실장을 세우고, 방일영 조선일보 회장과 서정귀 호남정유 사장, 고 지점장 등 경제계 유지들로 이사회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전국의 마을문고는 1968년 1만개를 넘어서더니, 1974년엔 3만5000여개로 대폭 늘었다. 양적 성과를 이룬 엄대섭은 자연스레 다음 단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바로 문고의 질적 향상을 위한 육성사업이었다.

하지만 항구적 재정 안정을 위해 필요한 재단 구성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이후락 비서실장이 주일대사로 부임함에 따라 새로운 후원자를 모색해야 했으나 막대한 돈을 댈 독지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엄대섭은 국내 100위권 대기업의 명단을 훑으며 직접 호소편지를 보내는 등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막사이사이상 수상으로 사회인식 높여
1980년 8월 초순의 어느 토요일, 보급회 사무실 전화에 불이 난 듯 전화벨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한 방송사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마을문고본부 엄대섭 설립자가 1980년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외신기사가 떴다는 것이다.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이 상을 그 당시까지 장준하와 김활란, 김용기, 이태영, 윤석중, 장기려 선생 등만 받은 바 있었다. 이런 큰 상을 그가 받게 된 것이다.

엄대섭의 수상은 문고사업에 대한 사회와 정부의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그는 이런 분위기를 활용, 수년 전 실패로 돌아간 재단 구성의 꿈을 다시 한 번 펼치기로 했다. 막사이사이 상금을 동봉해 대통령에게 마을문고 재단 설립을 주선해 달라고 진정하자 청와대와 내무부에서 이 문제에 대한 본격 검토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1981년 8월 어느 날 청와대에서 급한 호출이 왔다. '마을문고 재정문제에 대한 각하의 재가가 떨어졌다'는 내용이었다.

관련 서류를 보니 마을문고가 새마을운동중앙본부의 산하단체로 통합되는 방안으로 낙점됐다. 이로써 1961년 시작된 문고운동은 20년 만에 지휘체계에 결정적 변화를 맞게 됐다. 당시 새마을운동중앙본부 전경환 사무총장은 인재육성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선경그룹의 최종현 회장에게 마을문고사업 재단을 맡겼다. 재단 구성을 확인한 엄 회장은 당시 61세였다. 쉼없이 달려온 30년 세월에 시간적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그는 건강을 챙기며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보기 위해 마을문고운동에서 물러나는 결단을 내렸다.

'공공도서관 개혁 운동' 시동 걸다
엄 회장은 일선에서 물러난 후 놀이 삼아 전국 공공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마을문고운동을 시작할 때 전국 18개밖에 안 되던 공공도서관은 20년 만에 수적으로 7배 이상이 늘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자료를 찾아 궁금증을 해결하거나 책을 빌리러 오는 곳이 아니라 학생이나 재수생의 공부방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민에게 입관료를 받았고, 책의 내용을 전혀 파악할 수 없는 폐가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장차 전국에 산재한 마을문고를 분관으로 삼아 유기적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공공도서관이 스스로의 사명도 살리지 못하는 현실은 개탄스럽기 그지없었다.

결국 그는 다시 도서관운동에 뛰어들게 됐다. '대한도서관연구회'를 만들어 △공공도서관의 발전과 운영 개선을 촉진하며 △공공도서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고취하고 △국민 대중의 공공도서관 이용 의욕을 높이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그는 1984년 연구회 기관지인 '오늘의 도서관' 창간사에서 이렇게 밝힌다.

"오늘날 우리 공공도서관의 낙후성은 말이 아닙니다. 정책 당국자는 물론 지도층이나 식자층 모두 공부방으로서의 도서관밖에는 체험하지 못한 게 원인입니다. 근대 공공도서관은 지역사회 대중 교육기관으로서, 정보봉사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관외대출은 공공도서관의 생명입니다. "

이런 현상은 정부의 방관정책도 한몫했다. 독서실로만 이용되는 도서관엔 자료를 구입해 줄 부담도 없고, 고급인력을 둘 필요성도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도서관의 고질병은 점점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엄 회장이 선택한 극약처방은 바로 '자동차도서관'이었다. 공부방으로만 생각하는 시민이나 정책 당국자에게, 골목을 누비며 무상으로 책을 돌려주고 돌려받는 자동차도서관은 주민에게 도서관의 기본 사명을 인식시킬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공공도서관 현장과 학계, 정부를 향해 서슴지 않고 포효하던 그의 기백도 칠순이 가까워진 1980년대 후반에 가서는 힘에 부치고 말았다. 결국 1989년 69세의 나이로 아들이 사는 미국으로 건너가 만년을 보내다 2009년 향년 8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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