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베트남에서 꽃 채소 키우는 토종 농사꾼입니다"

2015-09-03 11:56:09 게재

달랏고원 KBIL VINA 농장 박남홍-남수 형제

영락없이 우리나라 산골의 모습이었다. 죽죽 뻗은 늘씬한 소나무들이 산등성이에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산자락을 덮고 있는 커피 밭들만이 베트남 산골을 여행하고 있음을 일깨워줄 뿐이었다. 깔끔하게 새로 닦인 2차선 포장도로가 울창한 송림 사이를 굽이굽이 파고들었다. 한여름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철이었다. 그런데도 차창을 통해 선선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온다. 호치민에서 북동쪽으로 30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달랏 지방을 달리고 있었다.

달랏 시내를 벗어나 25㎞ 쯤 달렸을까. 외딴 길가에 태극기와 베트남 국기 사진을 나란히 게시한 대형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입간판에는 먹음직스런 딸기 사진과 함께 'KBIL VINA'라는 상호가 붙어 있었다. 그 밑에는 베트남어로 '웰컴투달랏농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대형 비닐하우스 20여동이 들어서 있는 농장이었다. 그곳에서 훤칠한 미남형 한국인 농부 박남홍(46)-남수(43) 형제를 만났다. 멀리 베트남 달랏고원에서 우리나라 토종 화훼와 채소를 재배하는 사람들이다. 사장인 형님은 달랏에서 농사를 짓고, 영업이사인 동생은 호치민에 살면서 딸기와 채소, 김치를 팔고 있다. 2000년 베트남에 첫발을 디딘 박 사장은 수산업과 곤충천적 사업 등에서 쓰디쓴 실패를 겪은 뒤 농사로 기반을 굳혔다. 박 이사는 2005년 베트남에 들어와 식당과 호텔업 등을 하다가 형님과 사업을 함께 하고 있다.

베트남에서 우리나라 토종 작물을 재배하고 있는 박남홍(맨오른쪽)-남수 형제가 해발 1600m 달랏 고원에 있는 KBIL VINA 농장에서 딸기를 수확하고 있다. 박 사장 형제는 6헥타르 규모의 농장에 한국 토종 딸기, 배추, 무, 알타리, 열무, 고추, 달래, 백합 등을 재배하고 있다.


마침 호치민에 살고 있는 동생이 잠시 달랏에 들리러 와 있었다. 박 사장 형제와 함께 농장을 둘러보았다. 앳된 젊은 베트남 처자들이 딸기를 수확하고 있었다. '고하'와 '설향' 등 한국에서 들여온 토종 딸기들이었다. 형제는 6헥타르 규모의 농장에 한국 토종 딸기, 배추, 무, 알타리, 열무, 고추, 깻잎, 달래 등을 재배한다. 토종 백합구근을 키우는 화훼농사도 짓고 있다. 채소는 전량 호치민으로 보내진다. 영업이사인 동생 남수씨가 호치민에 주로 머물면서 배추김치와 총각김치, 열무김치, 파김치, 깍두기 등 김치를 만들어 판매하는 일을 맡아서 한다. KBIL VINA의 매출은 연간 4억 원 정도다. 박 사장은 지역 경제에 이바지한 공을 인정받아 2014년 10월 베트남 '상공인의 날'에 달랏이 속해있는 람동성에서 주는 우수기업인 상을 받았다. 어려운 회사 이름 대신 일반 소비자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 '웰컴투달랏농장'이라는 상표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배추와 무, 들깨 등을 재배했어요. 호치민에 사는 한국동포들에게 내다 팔았지요. 2011년 말에 호치민에 있는 한인 성당 바자회에서 채소를 판매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호치민에서 사업을 하고 계시던 김인규 사장님을 만났어요. 그 분이 딸기 재배를 권하시더라고요. 한국에서 여름딸기로 개발된 '고하'라는 품종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베트남 딸기에 비해 경쟁력이 있을 거 같았어요. 김 사장님과 함께 동업을 시작했지요."

KBIL VINA 농장을 방문한 안병준(맨 왼쪽) 단국대 생명자원과학대학 환경원예학과 교수가 한국에 있는 자신의 실험실에서 배양한 백합 구근 발육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KBIL VINA 농장은 우리 정부가 종자강국 실현을 목표로 시행하고 있는 골든 시드 프로젝트(GSP) 지원 대상으로 선정됐다. 현재 '분화용 백합의 대량번식을 위한 해외전진기지 구축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12년 7월부터 고하 모종 일부를 들여와서 시험재배에 돌입했다. 그해 말 신기하게도 탐스러운 딸기가 주렁주렁 열렸다. 그때부터 모종의 반입량을 늘이고, 시설도 확장해 나갔다. 출하된 딸기를 호치민 시장에 팔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산은 순조로웠지만 영업은 가시밭길이었다. 딸기의 수급 불균형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딸기 출하량이 많을 때는 수요가 달렸고, 주문량이 많을 때에는 물량을 대지 못했다. 포장이나 저장, 배송 등에서도 계속 문제가 발생했다. 딸기는 표피가 약해 작은 충격에도 쉽게 상해버린다. 사업이 지지부진하자 동업을 했던 김 사장이 사업에서 손을 뗐다.

식물들도 새로운 환경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한 동안 몸살을 겪는다. 새로운 사업도 몸살 단계를 거치지 않고 이윤을 낼 수 없는 법이었다. 박 사장은 실망하는 대신 농사법을 포함한 자신의 사업 전반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점은 고지식하게 한국식 매뉴얼에만 따르려 했다는 점이었다. 로마에서는 로마식을 따라야 하는 것처럼 달랏에서는 달랏 상황에 맞춰야 한다는 점을 그제야 깨우친 것이었다.

KBIL VINA 농장에서 직원들이 딸기를 수확하고 있다. 이곳에서 수 확하는 고하, 설향 등 우리 품종의 딸기는 베트남 딸기보다 알이 굵 고 향과 맛이 진해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달랏의 기후와 토질이 한국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런데도 고지식하게 한국식 매뉴얼대로만 따라 하려 했어요. 한국과 똑같은 배지(식물을 키우는 고체 혹은 액체 물질) 재료를 구할 수도 없어 애를 먹기도 했지요. 온도와 일조량이 우리나라와 다르다는 사실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뒤늦게 이곳 기후와 토양에 맞는 새 매뉴얼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하나씩 달랏에 맞는 농법을 만들어나갔다. 한국보다 짧은 일조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닐하우스에 밤 11시까지 불을 켜 주었다. 들깨를 심은 비닐하우스에도 딸기처럼 일조시간을 늘려주었다. 전조처리의 효과는 놀라웠다. 고작 한 뼘 정도의 키에 달랑 깻잎 한두 장 달고 있던 들깨도 키가 쑥쑥 자라서 사람 키보다 더 커졌다.

박 사장은 농법 개선과 함께 판매 및 영업에도 새로운 해결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달랏 시내에서 작은 호텔과 한국식당을 운영하고 있던 동생에게 도움을 청했다. 호치민으로 가서 판매와 영업 일을 맡아 달라고 했다. 박 이사의 호텔과 식당 일이 지지부진 하던 상황이었다. 2012년 4월 박 이사는 호치민에서 33㎡ 짜리 작은 아파트를 빌렸다. 그곳에 '웰컴투달랏'이라는 채소 대리점을 열었다. 호치민에 KBIL VINA 지사를 설립한 것이었다.

"형님이 생산한 딸기와 김치, 열무, 무, 배추, 깻잎, 상추, 꽈리고추, 달래 등 채소를 가져다 팔았습니다. 그러다가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김치와 된장, 청국장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영업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고생을 참 많이 했어요."

일과를 끝낸 직원들이 외출을 하고 있다. 농장 정문에 오늘 딸기 매진 이라는 알림판이 붙어 있다.

온 몸으로 호치민 시장을 뚫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오토바이에 물건을 싣고 한국마트를 돌았다. 웰컴투달랏 상품을 처음 주문하는 고객들에게는 물량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박 이사가 직접 배달을 했다. 고객들을 직접 만나 베트남 최고의 청정지역인 달랏에서 친환경으로 재배되고 있는 자신의 상품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였다. 박 이사는 농장에서 재배하고 있는 채소들의 사진을 들고 다니며 홍보를 했다. 제법 단골 층이 두터워지기 시작했다. 한국마트 5곳에는 정기적으로 물건을 대기로 했다. 2년 만에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한 것이었다.

겨우 채소 판매망을 갖추어 놓고 숨을 돌릴 즈음 박 이사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했다. 바로 형님이 보내기 시작한 딸기를 판매하는 일이었다. 딸기는 배추나 무 등 채소보다 판매가 훨씬 까다로운 물건이었다. 유통과정에서 상하기 쉽고, 빨리 물러터지기 때문이다.

"당시 제 눈에는 딸기가 시한폭탄처럼 보였어요. 째깍째깍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터져버리는 시한폭탄처럼 딸기도 금방 물러 터져 버리거든요. 한시라도 빨리 소비자에게 팔아넘기는 게 딸기 영업의 핵심이었습니다."

딸기 수요는 종잡을 수 없었다. 어떤 때는 주문량이 너무 많이 물건을 대지 못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잔뜩 쌓아 놓은 채 속을 끓여야 했다. 수요와 공급의 미스매치를 해결할 특단의 방법을 찾아야 했다. 딸기는 신선도가 생명이다. 딸기가 사람을 기다리는 기존의 영업 방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사람이 딸기를 기다리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가 문득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생각이 미쳤다.

"제가 평소 들락거리던 '베트남그리기(cafe.naver.com/vietnamsketch)'라는 카페가 있어요. 베트남에 사는 한국인들끼리 여행정보와 지역물가, 현지교육, 음식 등 생활정보를 주고받는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에 '달랏에서 직접 재배한 한국 종 딸기를 판매합니다'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날 달랏에서 온 딸기 100㎏이 순식간에 동이 났습니다. SNS 공간을 이용하기 시작한 이후로 시한폭탄같은 딸기를 안정적으로 판매할 수 있게 됐습니다. 지금은 개별 주문 판매 뿐 아니라 뚜레주르와 파리바케트, 베트남 슈퍼체인인 꿉마트 등과 납품 계약도 맺었습니다."

달랏고원은 랏족과 마족 등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최근 커피 재배로 주민들의 소득이 크게 늘었다.

농업은 몇 차 산업일까. 만일 1차 산업이라고 대답했다면 당신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이다. 21세기 농업은 첨단 육종산업과 생리학, 생명공학기술 등을 융합한 6차 산업으로 분류된다. 6차 산업으로 격상된 농업 분야에는 글로벌화의 바람도 불어닥친 지 오래다. 자국의 영토만 고집하면서 농사를 짓는 시대는 지났다. 현대의 농부들도 '글로벌 유목민'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이젠 농민들도 소비자와 시장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서 농사를 짓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 덕에 우수한 토종 작물들도 해외 나들이를 하고 있다.

박 사장 형제의 농장에서 자라고 있는 작물들의 고향은 모두 한국이다. 딸기와 함께 이곳 농장의 대표적인 작물 중 하나로 꼽히는 백합은 한국의 대학 실험실이 고향이다. 농장에서 사용하는 백합의 자구(새끼구)들은 한국농수산대학의 송천영 교수와 단국대 안병준 교수, 강원대 김종화 교수 등 우리나라 농업과학기술을 이끌어가는 학자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KBIL VINA 농장의 한 비닐하우스 앞에 표지판이 서 있었다. '한국 GSP사업단 베트남 달랏 연구 포장'이라는 한글 제목과 'Korea Golden Seed Project in Dal Lat' 이라는 영문 부제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그 밑에 '분화용 백합의 대량번식을 위한 해외전진기지 구축사업'이라는 과제명칭이 붙어 있었다. 박 사장의 농장이 화분에 키우는 토종 백합을 대량으로 키우는 해외전진기지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골든 시드 프로젝트(GSP)란 우리 정부가 '종자강국' 실현을 목표로 2012년부터 2021년까지 10년 계획으로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다. 채소와 원예, 수산, 식량, 축산 등 5개 분야 사업단으로 나누어 종자개발 및 품종개발을 위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우연하게도 농장에 GSP사업과 관련된 귀한 손님이 와 있었다. 박 사장 농장에 백합 자구를 보내주는 안병준 교수였다. 단국대 생명자원과학대학 환경원예학과 교수인 그는 스스로 '세포 농부'를 자처한다. 그는 식물의 조직 세포를 배양하는 전문가다. 조직배양 자구를 대량생산하는 기술을 세계 최초로 실용화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 농업기술대상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이 날 안 교수가 농장을 찾은 것도 자신의 연구실에서 배양한 백합 자구를 김 사장에게 전해주기 위함이었다. 안 교수가 가져온 자구는 지름 4~5㎜로 쌀 톨 만한 크기였다.

김 사장이 GSP 사업단의 백합 구근을 키우는 비닐하우스로 안 교수를 안내했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생육기간에 따라 크기가 다른 백합 구근(球根)들이 자라고 있었다. 하양, 노랑, 빨강 등 화사한 백합꽃을 피워 올린 것들도 있었다. 박 사장이 배양토를 헤집더니 6㎝ 크기의 구근 하나를 뽑아 들었다.

"이건 7개월 정도 자란 구근입니다. 쌀 톨 크기의 자구가 7~9개월 지나면 내다 팔 수 있는 상품이 됩니다. 이곳은 기후가 좋아 작물들이 사시사철 잘 자랍니다. 추운 겨울이 없기 때문에 때에 맞춰 저온처리만 해주면 됩니다. 한국보다 훨씬 생장이 빠르지요. 배추와 무는 4모작도 할 수 있을 정도니까요. 베트남의 화훼 시장 규모가 크다는 점도 이곳 꽃 농사의 강점 중 하나입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꽃을 아주 좋아합니다. 한국 사람들보다 베트남 사람들이 꽃을 더 많이 소비합니다. 백합 구근의 경우 베트남에서는 한해 1억여 개가 팔립니다. 한국에서는 3000만 개 정도밖에 안 팔리거든요. 시장의 전망은 아주 밝습니다. 현재 우리 농장에서는 30여종의 백합을 10만구 정도 시험재배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는 무탈하게 잘 자라고 있어요. 시험재배가 성공적이라는 판정을 받게 되면 대량생산 체제로 들어갑니다. 아마도 100헥타르 이상이 소요되는 대형 사업이 될 거예요."

글로벌시대로 진입하면서 성으로 둘러치고 철조망으로 경계를 표시한 국경의 개념이 퇴색하고 있다. 사람도 공장도 종자도 국경을 초월해 이동을 한다. 한국인이 눌러앉아 한국말을 쓰고, 한민족의 문화를 유지하고, 토종작물을 재배하면 그곳이 바로 한국 땅 아닐까. 박 사장 형제가 배추와 무, 들깨, 백합 농사를 짓고 있는 그곳 역시 우리 영토의 확장이 아닐까. '글로벌 농부' 박남홍-남수 형제야말로 대한민국 영토를 넓히는 애국자들이다. 글로벌 시대에 한국의 영토는 더 이상 좁은 한반도의 반쪽만이 아니다. 백합 옆에 선 두 형제의 구릿빛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던가.

["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연재 보기]

박상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