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태국의 첨단 IT인프라는 내 손 끝에서 시작됩니다"

2015-11-12 11:49:01 게재

준타일랜드 - JMM 이상준 사장

태국 방콕을 돌아다니다 보면 시내 곳곳에 커다란 초상화들이 많이 걸려 있다. 태국 왕족들의 초상화다. 그 중에서도 유독 많이 걸려 있는 초상화가 있다. 바로 태국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한 라마5세 출라롱콘의 초상이다. 라마5세는 라마9세 푸미폰 아둔야뎃 현 태국 국왕의 할아버지다. 라마5세는 유럽 열강들이 아시아 각국을 침탈하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노련한 정치와 외교로 태국의 독립을 지켜낸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문물제도를 도입하여 행정조직, 사법제도, 철도, 우편 등 여러 부문을 개혁하고 정비했다. 노예제를 폐지하고, 왕족 등 엘리트들의 유럽 및 미국 유학을 장려하기도 했다. 그 결과 태국은 유럽열강의 식민 지배를 겪지 않으면서 조속한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상준 준타일랜드 사장이 자신의 주력상품인 광케이블 야적장을 찾았다. 준타일랜드는 태국 광케이블 시장의 40%를 장악하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준타일랜드가 판매한 광케이블은 모두 15만km 정도다.


태국 방콕시내 한 복판인 수쿰빗 지역에 자리잡은 18층짜리 라자파크 빌딩.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서 내리자 JMM이라는 상호가 눈에 들어온다. 20여 년 째 태국에서 통신사업과 무역업, IT사업을 하고 있는 이상준 사장(45)의 사무실이다. 그의 사무실에도 라마5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멋진 8자 콧수염에 번쩍이는 황실복장을 한 라마5세는 허리에 긴 칼을 차고 있었다. 한국인 사업가의 사무실에 라마5세의 사진이 걸려있는 게 흥미로웠다.

"라마5세는 1881년 태국에 처음으로 전화를 개설한 분입니다. 라마5세는 1883년 체신청을 설치하고 1885년엔 태국을 세계우편연맹에도 가입시켰지요. 통신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 바로 라마5세입니다."

이상준 사장은 태국에서 통신 광케이블 판매 사업체인 '준타일랜드'와 무역업 및 IT사업을 하는 'JMM'을 운영하고 있다. 방콕 중심가를 살짝 벗어난 라프라오 지역에 위치한 준타일랜드는 직원 14명으로 연간 2000만 달러 안팎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태국 광케이블 시장의 40%를 차지하는 규모다. 수쿰빗에 사무실을 둔 JMM은 그동안 철도 화차와 광산 컨베이어벨트 등을 수입 판매하는 무역업을 하다가 지난해부터 주력업종을 IT사업으로 바꾸었다. 직원 8명을 둔 JMM은 요즘 현실의 사물에 가상의 관련 정보를 덧붙여 보여주는 '증강현실(AR)' 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이 사장은 통신회사와 관광업체, 게임회사 등 AR기술을 이용해 상품을 개발할 수 있는 업체들을 집중공략하고 있다. 그동안 태국의 유선 및 무선 통신 케이블을 공급하는 사업에 집중을 했다면, 앞으로는 자신이 깔아놓은 통신망을 이용한 IT사업에 몰두하겠다는 것이다.

이 사장은 라마5세처럼 멋진 콧수염을 하고 거기에 턱수염까지 더하고 있었다. 이 사장의 사무실은 잘 다듬어진 그의 수염처럼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훤하게 트인 사무실의 양쪽 창문은 수쿰빗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국사람들에게 라마5세는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과 같은 분입니다. 태국을 보다 편리한 세상으로 바꾸려고 했던 분이지요. 제가 태국에서 벌이고 있는 통신사업과 IT사업은 라마5세가 하던 일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태국사람들에게 보다 편리한 삶의 패러다임을 제공하려는 사업이지요."

태국의 통신체계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 라마5세라면,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은 탁신 친나왓 전 총리다. 태국 북부의 관광도시인 치앙마이의 화교 출신인 탁신은 경찰에 투신했던 인물이다. 1980년대 경찰복을 벗은 뒤 컴퓨터 부품 사업을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 휴대폰이 도입될 시기엔 이동통신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의 경찰 인맥을 이용해 태국의 이동통신 사업 독점권을 얻는 데 성공한다. 탁신이 설립한 AIS는 태국 최대 통신업체로 현재 무선통신 시장의 55%를 차지하고 있다.

일약 태국 최고 재벌의 반열에 올라선 탁신은 1994년 정치에 뛰어든다. 외무장관을 시작으로 부총리까지 오르더니 급기야 2001년 총리직에까지 오른다. 총리직 재임 6년 동안 탁신은 국가 권력을 자신의 사업을 키우는 데 이용한다. 자진의 사금고를 채우는 데 국가 권력을 이용했던 탁신은 결국 2006년 9월 19일 유엔 총회 참석 중 쿠데타로 실각을 하고 만다. 하지만 탁신은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막내 여동생 잉락을 내세웠다. 잉락은 2011년 7월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태국 최초의 여성 총리에 올랐다.

"잉락은 AIS의 최고경영자를 지냈던 인물입니다. 2009년 잉락이 탁신을 지지하는 푸어타이당의 대표로 정치에 투신한 이후부터 AIS는 3세대 통신인 3G 기반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시작합니다. 그 덕분에 저희 준타일랜드의 광케이블 매출이 2010년 2000만 달러, 2011년 2500만 달러, 2012년 3000만 달러까지 치솟았지요. 그러다가 2013년 1500만 달러, 2014년 1000만 달러로 매출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저희 회사가 판매한 광케이블이 모두 15만km 정도 됩니다. 이젠 광케이블 망이 태국 구석구석까지 대부분 깔린 상태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차세대 전략사업으로 시작한 일이 AR입니다."

아침 일찍 이 사장을 따라 나섰다. 오전 8시쯤 도착한 곳은 태국 국영 통신회사인 TOT(Telephone Organization of Thailand) 본사 빌딩이었다. 태국 정보통신부(ICT)가 입주해 있는 건물이었다. 빌딩 1층에 있는 리셉션장 입구에서 분주하게 손님맞이 준비를 하던 사람들이 이 사장을 보고는 꾸벅 인사를 한다. 준타일랜드의 직원들이었다.

이 사장의 회사에서 주관하는 'CORNING ASIA TECHNILOGY CONFERENCE 2015'라는 행사였다. 이 사장은 오전 9시부터 시작하는 행사 준비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일찍 현장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동안 준타일랜드의 주 거래업체는 삼성전자였어요. 그런데 올 3월 삼성전자가 광소재 사업을 미국 코닝에 매각을 했습니다. 광섬유와 광케이블을 생산하는 구미 공장과 중국 하이난성 공장 등이 코닝의 광통신 사업부로 통합됐지요. 코닝이 저희 회사의 새 거래처가 된 것입니다. 오늘 행사는 코닝이 태국의 고객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오늘 행사의 주빈은 TOT 직원들입니다. TOT는 태국 유선통신 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국영 통신사이지요."

예정보다 늦은 9시 반 쯤 행사가 시작됐다. 준비된 50여 석의 좌석은 거의 들어차 있었다. 코닝 관계자가 회사 연혁과 제품 설명을 시작했다. 15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코닝은 특수 유리 및 세라믹 제품을 생산하는 다국적 기업이다. 통신 네트워크용 광섬유와 케이블, 하드웨어 및 장비를 비롯해 TV, 컴퓨터, 노트북 등에 사용되는 액정표시장치(LCD) 유리기판, 자동차 배기가스 제어 시스템용 세라믹, 첨단 광학 산업용 특수 유리 등을 제조하는 기업이다. 이날 회사 소개의 초점은 'FIBER TO THE HOME'(가정용 광섬유)에 맞춰져 있었다.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광케이블 제품 보다는 광통신망 액세서리를 소개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오후 2시부터는 수쿰빗 지역에 있는 소피텔 호텔로 이동해 똑같은 행사가 열렸다. 수피텔 호텔에서 열리는 코닝 행사는 민간 무선통신 업체인 AIS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AIS 및 산하업체 직원 20여 명이 참석해 코닝 관계자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이 사장은 단순히 광케이블을 들여다가 파는 무역업자가 아니라 공급자와 수요자 간 관계를 적극적으로 매개하고 조율하는 태국 통신시장의 마당발이었다.

태국 국토의 한 복판을 흐르는 차오프라야강의 물줄기가 방콕 시내를 관통하고 있었다. 북쪽 산간지방에서 발원한 핑·왕·욤·난의 4대 지류가 나콘사완 지역에서 차오프라야강으로 합쳐진다. 차오프라야강은 타이만을 30여km 앞둔 지점에서 수도 방콕을 만난다. 오전 7시도 채 되지 않은 이른 시각, 이 사장과 함께 도착한 곳은 차오프라야강변에 자리 잡은 한 호텔이었다. 넉넉하게 흐르는 차오프라야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호텔이었다.

이 사장이 호텔의 리셉션장으로 들어섰다. 말쑥하게 정장차림을 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대부분 20~40대 정도로 보이는 젊은 얼굴들이었다. 이들은 도착하는 대로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한 뒤 삼삼오오 모여 다과를 들며 환담을 했다. 리셉션 장소 입구의 알림 표지판을 보니 BNI(Business Network International)라는 단체의 정기회합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외국에서 사업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태국에서 이 사장이 발견한 든든한 바람막이는 상호부조를 위한 비즈니스 네트워크인 BNI다. 이 사장 이 금요일 아침 BNI 회합에서 회원들과 모임을 갖고 있다

BNI는 상호부조를 위한 비즈니스 네트워크다. 1985년에 미국의 이반 미스너 박사가 설립한 BNI는 전 세계 60여 개 나라에 18만여 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BNI의 가장 큰 특징은 '리퍼럴(referral)' 제도다. 영어로 '리퍼럴'은 전문적인 도움을 받을 곳으로 '보냄' 혹은 '의뢰'를 뜻한다. 회원들은 각자가 지닌 인적 네트워크와 정보를 공유한 뒤 서로에게 필요한 정보와 사람을 보내거나 의뢰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BNI는 5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챕터(Chapter)'라는 기본 단위로 운영된다.

태국에는 모두 22개의 BNI 챕터가 활동을 하고 있다. 이중 이 사장이 활동하고 있는 챕터는 '미러클'이다. 오전 7시가 되자 회의가 시작됐다. 총 55명의 회원 중 단 한 명만 결석을 한 회의였다. 54명이 회원들이 긴 테이블에 둘러 안았다. 회의는 두 시간 가량 계속됐다.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발언을 했다. 아쉽게도 태국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회의 내용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활기찬 회의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5분이 멀다하고 박수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치 웃음치료 모임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마침내 이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발언 중간에도 박수가 계속 끼어들었다. 몇 사람인가는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이 사장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기도 했다.

오전 9시 쯤 회의가 끝나자 호텔 식당으로 이동을 했다. 차오프라야 강변에 접한 운치 있는 식당이었다. 식당의 야외 테라스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면서 BNI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 회합 때 저에게 주어진 45초 스피치 시간에 일본 출장을 다녀온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지난 주 도쿄와 오사카, 후쿠오카 등지에 있는 태국 관광청 지사를 방문하고 왔거든요. 우리 회사와 태국 관광청이 공동으로 AR 기술을 이용해 일본 관광객을 유치하는 사업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회합 시간에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관광업계 사람들을 찾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했지요. 즉석에서 4건의 '리퍼럴'이 들어왔습니다. 관광회사와 선이 닿는 우리 회원들이 저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넨 것이지요."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보면 '프리 크라임' 이라는 최첨단 치안 시스템이 등장한다. 범죄가 일어날 시간, 장소 등을 미리 예측해 범죄자를 미리 단죄하는 장치다. 영화 속에서 '프리 크라임' 팀장인 존 앤더튼(톰 크루즈)은 허공에 투사된 화면을 손으로 이리저리 움직여 다양한 정보를 처리한다. 2002년 개봉된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IT기술은 바로 증강현실(AR) 기법이다. 영화는 2054년을 무대로 설정하고 있지만 AR기술은 이미 상용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이 사장이 JMM의 신사업으로 선택한 분야가 바로 AR인 것이다.

이상준 사장은 최근 현실의 사물에 가상의 관련 정보를 덧붙여 보여주는 증강현실(AR) 사업을 새로 시작했다. 통신회사와 관광업체, 게임회사 등 AR기술을 이용해 상품을 개발할 수 있는 업체들을 집중공략하고 있다. AR사업을 하고 있는 JMM 직원들과 함께 회의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부우~웅 웅웅웅 부~우웅." 이 사장의 JMM 회의실 안에서 이상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회의실에서는 이 사장이 예닐곱 명의 손님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놀랍게도 작은 드론 한 대가 회의실 공간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웅웅 거리는 기계음은 드론의 프로펠러 소리였다. JMM 직원은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 보면서 드론을 조종하고 있었다. 스마폰 안에는 동영상으로 헬기의 전투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 사장이 증강현실(AR)을 이용한 게임을 손님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이 뒤섞이는 신기한 장면이었다.

JMM을 방문한 사람들은 BNI 회원들이었다. 이 사장의 AR사업에 관심을 갖고 자세한 설명을 듣기 위해 JMM을 찾은 것이었다. 직원의 시연이 끝나자 이 사장이 AR기술의 다양한 적용분야와 JMM이 채택한 AR기술의 장점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AR기법은 관광업계, 광고회사. 쇼핑몰, 신용카드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미 상용화를 시작했습니다. 정보 제공과 홍보, 마케팅, 게임 분야의 새로운 지평을 연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차원 공간을 3차원으로 확대하고, 정지된 평면 화면을 3차원 동영상으로 전환시키는 IT기법이지요. 고객 서비스나 시장분석의 차원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기술입니다. AR기술을 이용하면 내비게이션도 실제로 눈앞에 보이는 공간에 목적지를 알려 주는 방향표시가 나타납니다.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올 법한 서비스를 실제로 받게 되는 거지요."

전광석화처럼 변하는 시대다. 평생직장은 이제 먼 옛날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평생 한 가지 사업만 하면서 먹고 살던 시대도 이미 저물어 가고 있다. 신기술이 도입되면서 사업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에 발맞추어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을 모색해야 하는 시대다. 이상준 사장은 태국에서 새로운 백지를 펼쳐놓고 있었다. 그는 그 위에 AR이라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생은 늘 새로운 모색이다. 그는 AR이라는 주제로 또 얼마나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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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