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미와 공생 모색하는 철원평야 농민들

"철새 서식지 잘 만들어주면 AI 걱정 없어요"

2016-12-15 12:10:20 게재

두루미 잠자리·먹이터로 무논 50만평 조성 … 농민들 "이제 두루미 보면 뿌듯"

13일 오후 민통선 안 철원평야에서 촬영한 '재두루미'떼. 성숙한 개체나 미성숙 개체나 모두 윤기나고 흐트러지지 않은 깃털을 하고 있다. 잠자리가 먹이터와 가깝고 풍부한 먹이가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소 먹일 짚도 부족한데 왜 논에 뿌리냐구요? 지력 증진에도 도움이 되고 두루미한테도 좋고, 철원의 좋은 환경이 홍보가 되면 우리 농민들에게도 좋은 일이잖아요?"

전흥준 철원군농민회 회장의 말이다.

세계적으로 중요한 두루미류 월동지 철원평야가 달라지고 있다. 변화의 주체는 정부나 지자체가 아니라 철원의 농민들이다.

두루미가 미워서 볏짚 깔린 논을 일부러 트랙터로 갈아엎는다는 얘기는 이제 옛말, 농민들이 스스로 논에 볏짚을 깔아준다. 또 두루미들이 밤에 편안하게 잠자고 낮에는 물고기나 우렁이 등을 잡아먹을 수 있게 논에 물을 10cm 이상 채워준다.

이렇게 조성한 '무논'의 면적이 올해 총 212만6720㎡로 약 50만평 가까이 된다. 그 결과 철원평야를 찾은 두루미류의 숫자가 지난해의 2.5배, 총 4000마리가 넘었다.(12월 초 조사)

무논에서 채집된 각종 물살이들. 미꾸리 버들치 우렁이 개구리 올챙이 등이다.

"두루미들 때깔이 달라졌어요!" = 13일 오후 00사단의 협조로 진행한 철원 노동당사 안쪽 민통선 지역 현장취재에서 이런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금학산 북쪽의 드넓은 농경지에는 거의 대부분 볏짚이 그대로 깔려 있었다. 철원지역은 농경지가 넓어 예전부터 콤바인으로 추수를 했는데, 콤바인으로 추수를 하면 사람이 손으로 베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낙곡(떨어지는 알곡)이 발생한다.

곽정인 서울시립대 환경생태연구실 박사는 "이런 알곡과 함께 볏짚 안에서 월동하는 곤충들도 새들의 중요한 먹이가 된다"며 "이 볏짚은 봄이 되면 썩어서 유기물이 되고 새들의 배설물도 지력 증진에 도움이 되므로 친환경적인 논농사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런 볏짚 깔아주기에서도 농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이 돋보인다. 환경부와 생물다양성관리계약을 맺고 볏짚을 깔아준 면적은 약 208.7ha이고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깔아준 면적은 약 679.4ha이니 생물다양성관리계약지역의 최소 3배 이상 되는 셈이다.

민통선 더 깊숙이 들어가자 멀리 무논 속에 무리지어 있는 재두루미와 두루미들이 보였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쉬거나 먹이를 먹고 있는 새들을 날려보낼 수 없어 일단 멀리서 촬영을 진행했다.

촬영하는 동안 다수의 재두루미와 두루미, 독수리 등이 취재진 위를 날아갔는데 새들의 모습이나 태도가 예년과는 달랐다. 다 자란 성체나 덜 자란 미성숙 개체나 깃털이 거의 흐트러지지 않고 윤기가 났다. 두루미 5마리(3마리 가족 추정 + 2마리 부부 추정)와 독수리는 취재진 바로 머리 위에서 상승기류를 타고 범상하는 여유로움까지 보였다.

최종수(왼쪽) 대표와 곽정인 박사가 볏짚 깔아주기의 효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현장을 안내한 '두루미와 농사짓는 사람들' 최종수 대표는 "올해 들어 두루미들 때깔이 달라졌다"며 "무논을 조성해주면 안정된 잠자리 제공 효과도 크지만 그 안에는 수십톤의 우렁이들, 개구리와 올챙이, 각종 물고기들까지 있어서 두루미에게 최고의 단백질을 공급해준다"고 말했다.

최 대표가 현장에 설치한 통발을 확인해보니 정말 많은 물고기 종류가 들어 있었다. 한겨울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철원평야는 거대한 용암대지 위에 표토가 1미터 정도 깔려 있는 지형인데, 신기하게도 곳곳에 섭씨 15도의 물이 사시사철 솟아나는 '샘통'이 분포한다. 40여곳의 샘통에서 흘러내리는 따뜻한 물을 파이프로 끌어서 논에 대주면 아주 추운 날씨만 아니면 얼지 않고 개구리도 깨어난다고 한다.

최 대표는 "일본 이즈미에서 월동하는 두루미가 조류독감(AI)에 감염된 것은 좁은 지역에 1만마리 이상 잠을 자는 밀식 환경인데다 먹이로 죽은 정어리를 줘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된다"며 "우리 철원의 두루미들은 잠자리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고 하천이나 습지, 무논에서 살아 있는 신선한 단백질을 섭취하기 때문에 이즈미보다 훨씬 건강하게 겨울을 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 이즈미로 가던 재두루미 철원에서 월동 = 서울시립대 환경생태연구실에서 조사한 '철원 두루미류 월동지 잠자리/먹이터 조성사업 효과 분석'(2016.12.2~4)에 따르면 올 겨울 들어 철원 지역의 두루미류의 잠자리가 달라졌다.

두루미 종류는 지난해까지는 주로 한탄강 여울지역과 대교천 등 소하천, 토교저수지와 동송저수지, 하갈저수지, 산명호저수지에서 잠을 잤다. 또 많은 개체가 비무장지대 역곡천과 북한의 봉래호에서 잠을 자고 이른 아침에 철원평야로 날아와 먹이를 먹었다.

그런데 50만평 가까이 되는 무논을 만들어준 올해 겨울에는 많은 두루미류가 철원평야의 무논을 잠자리로 이용하고, 비무장지대 안의 역곡천과 북한의 봉래호로는 거의 이동하지 않고 있다.

12월 3일 철원군 일원에서 확인된 두루미류는 두루미 611마리, 재두루미 3400마리, 흑두루미 6마리, 검은목두루미 1마리, 캐나다두루미 2마리 등 총 4020마리였다. 지난해와 비교했을 때 2.5배 이상으로 크게 늘어난 숫자다.

이는 올해 실시된 볏짚 깔아주기 사업과 무논 조성으로 철원평야 일대의 논 경작지가 두루미류의 월동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면서 일본으로 내려가던 두루미류 개체군이 남하 시기를 늦추거나 아예 철원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곽 박사는 "무논 여러 곳에 분산돼 소규모 집단으로 잠을 자면 한곳에 많은 집단이 잠을 자는 것보다 각종 질병 등 환경영향으로부터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며 "남쪽으로 이동하던 개체를 일정 지역에 머물게 함으로써 질병의 이동을 줄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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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준기 기자 namu@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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