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노동자대투쟁 주역들을 만나다 | ② 최재호 사무금융노련 초대위원장

사무직노동운동의 깃발을 세우다

2017-08-03 10:49:49 게재

노조결성 연대 → 4.13호헌 반대→ 6월 항쟁 넥타이부대→ 한국노총 밖 첫 산별

전두환 대통령이 1987년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 뒤 당시 노동부장관의 요구로 한국노총은 지지성명을 냈다. 이에 반발해 5월 8일 13개 사무금융 노조간부 17명이 '한국노총의 성명은 노동자의 뜻이 아니다'는 취지의 반대성명을 냈다. 당시 교수, 종교인 등 많은 인사가 4·13 호헌 반대성명을 냈지만 대중조직인 노조가 조직적으로 참여한 것은 처음이었다. 사무금융노련 초대·2대 위원장을 지낸 최재호 사회연대노동포럼 대표는 당시 한국산업리스노조 위원장으로 그 중심에 있었다.

사진 한남진 기자

사무금융 노조간부들의 호헌반대 성명은 6월 민주항쟁에서의 '넥타이 부대' 참여로 이어졌다. 6월 투쟁이 전국민적인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사무직 노동자와 택시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후 울산에서 시작된 생산직과 서울의 사무직 노동운동은 7·8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승화됐고 한국노총에 가입 않은 첫 산별연맹인 전국사무금융노련 건설로 모아졌다. 이는 사실상 산별연맹을 자유화 조치로 받아들여졌다. 사무금융노련 결성은 생산직 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한 인식을 사무직, 전문직, 언론, 교사 등 전 분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사무금융노련의 역사는 전두환 정권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군사정부시절 노조 결성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당시 회사의 성격, 소유형태에 따라 탄압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노조를 인정받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현 국정원)의 사찰도 심했다.

1983년 6월 한일투자금융(현 삼성증권), 한국산업리스에 노조가 결성되고 1985년 1월에는 현대그룹 최초로 현대해상화재보험에 노조가 만들어졌다.

이중 범한화재해상보험노조 결성 지원 투쟁은 사무금융노련 건설의 직접적 계기가 됐다. 범한화재에서는 1986년 5월 노조가 결성됐다. 회사와 공권력은 노조를 탄압했고 급기야 12월에는 쟁의부장까지 해고했다. 최 위원장 등 60여개 노조간부 450여명은 1987년 3월 한국노총 금융노련(현 금융노조)에서 6박7일간의 농성투쟁 벌였고, 끝내 쟁의부장 복직이라는 승리를 거머쥔다. 이러한 연대투쟁과 승리의 경험은 동지적 연대의식을 높였고 노동법 독소조항인 '제3자 개입금지' '단체행동금지'도 무색하게 만들었다.

■ 87년 6월항쟁에 사무직 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6·10항쟁 첫날 사무직 노동자들은 시위대에 박수를 보내거나 구호로 따라 외쳤다. 창문으로 화장실용 휴지를 내려보내기도 했다. 12일 명동성당 앞에서 5000여명이 모여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이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무직 노동자들을 기자들이 '넥타이부대'로 부르기 시작했다. 6월 민주항쟁에서 국민의 자발적 참여가 있었지만 이미 노조결성과정에서 훈련되고 단련된 사무직 노조간부들이 동료들을 이끌고 참여했다.

■ 왜 노동운동을 했나.

산업리스노조 결성 때 부위원장으로 참여해 1984년부터 위원장을 했다. 한국은행 합격한 사람이 올 정도로 금융권에서 월급이 가장 많았다. 직장내 비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풍토가 심했다. 여직원이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둬야 했고 BC카드는 5개 은행이 출자한 회사인데 대리 진급하는 데 5개 은행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이런 곳에서 자존감이 있겠나. 일터 민주화가 절실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일터 민주화에 대한 요구는 더 커진 것 같다. 요즘 언론에서 시끄러운 '갑질'은 우리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최근 '자존감 수업'이라는 책이 출판한지 1년도 안 됐는데 100쇄가 넘었다고 한다. 얼마나 자존감을 잃고 사는 것이 괴로우면 이 책이 이렇게 잘 팔리겠나. 아직도 우리사회가 얼마나 비정상적인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 사무금융노조 초대·2대 위원장을 했다.

당시 한국노총 금융노련은 은행 등 제1금융권 중심이었다. 투자금융, 증권, 보험 등 제2금융권의 조합원과 단위노조를 진정으로 대변하는 상급단체가 필요했다. 그동안 함께 싸워 온 동지적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1987년 11월 27일 45개 노조 250여명이 모여 '한국자유금융노동조합연합'을 결성했다.

■ 합법화가 쉽지 않았을 텐데.

설립신고증을 받기 위해 1주일에 몇 번씩 노동부를 찾아 책상을 치는 등 난리도 쳤다. 당시 법적인 요건은 아니지만 상급단체인 한국노총의 인준증이 있어야 신고증 발급됐다. 한국노총은 조직대상이 중복되니 금융노련에서 제2금융권을 조직대상에서 제외시켜줘야 한다고 했다. 결국 이듬해인 1988년 2월 금융노련이 규약을 개정했다. 하지만 한국노총은 대표자회의에서 또 인준을 거부했다.

3월에는 보험노련이 결성됐는데 한국노총이 인준해 줘 설립신고증이 우리보다 먼저 나왔다. 국회에서 노무현, 이해찬, 이상수 의원이 따지고 들자 노동부장관이 신고증을 주겠다고 했다. 당시 담당 사무관이었던 김성중 전 노사정위원장이 금속노련과 한국노총을 설득하는 등 큰 역할을 했다. '영혼있는 공무원'이었다. 8월 13일 창립한지 9개월 만에 상급단체의 인준증없이 노동부으로부터 신고증을 받았다. 한국노총에 가입하지 않은 산별연맹이 처음으로 탄생했다.

한국노총은 조합원 수백명을 동원해 경기 과천청사에서 항의집회를 했다. 한국노총은 정부 노동관련 위원회에서 모두 철수했다. 결국 승진을 앞둔 김 사무관을 좌천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 노동운동 선배로서 한마디 한다면.

7·8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조조직률은 1989년 19.8%를 정점으로 계속 떨어져 현재는 10% 미만에 머물고 있다. 지난 30년을 반성하고 새로운 30년을 열어갈 노동운동의 전망을 세워야 한다.

노동운동이 작은 차이를 극복하고 단결과 연대의 영혼을 회복해야 한다. 1925년 G.D.H 콜은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 서문에서 "노동운동의 3부문-노동조합, 협동조합 및 정치조직은 하나의 노력이 세 국면으로 나타난 것이고, 이 노력은 공통의 필요와 열망에서 우러나오며, 때로는 분열을 겪을지라도 우리의 길은 공통의 목적을 향해 뻗어 있다"고 강조했다. 여러 형태의 사회운동과 연대하고 함께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연대의 철학과 관점을 확실하게 세워야 한다.

관념적 운동에서 생활현장에서 구체적인 요구와 열망을 담아가는 운동, 일터의 민주주의를 실현해 나가는 운동으로 미래를 열어 가야 한다. 조합원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조합원과 함께 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명분에 집착하기 쉬운 주자학적 관념론에서 실사구시하고 지행합일을 강조하는 양명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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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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