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노동자대투쟁 주역들을 만나다│④ 이수호 전 전국교직원노조 위원장

민주화시대 교사운동 새길을 열다

2017-08-10 11:04:55 게재

5·10교육민주화선언, 대중적 확산 계기 … "해고자도 조합원, 전교조 인정해야"

교육민주화운동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고 전국교직원노조(전교조) 결성의 단초를 만든 계기가 1986년 ‘5·10 교육민주화선언’이다. 이수호 당시 신일고 교사는 서울YMCA교사회 회장으로 이 선언의 중심에서 이끌었다.

교육민주화운동은 1960년 4·19혁명 뒤 7월 한국교원노조총연합회(전국교조)를 결성했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좌절됐다. 군사정부는 교원과 공무원의 노조결성을 금지했다.

사진 한남진 기자

1980년 5·18광주민주항쟁 이후 자기 정체성 확립을 위한 노력은 각 분야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교사에게도 교육민주화가 제기됐다. 서슬 퍼런 전두환정부 시절, 1982년부터 교사들은 YMCA, YWCA, 흥사단 등 시민단체의 우산 속에서 교육운동의 맥을 이어왔다.

‘5·10 교육민주화선언’은 그 흐름 속에 있었다.

“학생들과 함께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우리 교사들은 오늘의 참담한 교육현실을 지켜보며 가슴 뜯었다.” 이렇게 시작된 선언은 “우리의 교육은 전 민족의 노예화를 획책하던 일제 군국주의 교육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시류에 따라 부침한 정치권력의 편의대로 길들여진 충직한 시녀로 전락했다”고 진단했다.

이듬해인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은 교육민주화운동이 또 다른 전환점이 됐다. 전국 초·중·고 평교사들은 9월 27일 자주적으로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를 결성했다. 이수호 교사는 사무처장을 맡았다.

전교협은 전국 평교사 50%가 참여할 정도로 교사와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임의조직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법적으로 정부와 교섭하고 헌법의 자주적 단결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노동조합으로 발전이 필요했다. 내부에선 “‘교육’을 ‘노동’으로 봐야 하나, 시기상조다”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수호 교사 등 핵심그룹은 “교사도 노동자다. 처음부터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어용화되거나 교육민주화를 달성할 수 없다”고 설득했다.

마침내 1989년 5월 28일 ‘교육민주화’와 ‘참교육’을 내세우며 전교조가 출범했다. 노태우정부는 전교조에 참여했던 교사 107명을 구속시키고, 1500여명을 강제해직시키며 탄압했다. 전교조는 교육 대개혁투쟁과 해직교사 원직복직 투쟁을 벌였다. 김영삼정부는 1993년 3월 핵심간부를 제외한 해직교사 1300여명을 복직시켰다. 1998년 2월 김대중정부는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전교조를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1999년 7월 1일 전교조 결성된 지 10년 만에 ‘교원의 노동조합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이 발효되면서 합법화됐다. 이수호 교사는 이때 복직했다.

그는 2001년 합법화 이후 전교조 위원장으로 당선돼 조직토대를 강화했다. 민주노총 사무총장과 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2008년 민주노동당 일부가 진보신당으로 분리해 나가자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진보정치운동에 발을 들여놓는다. 이수호 교사는 정당활동으로 34년 교직생활을 떠났다.

■교육민주화운동을 하게 된 동기는.

집안이 어려워 야간으로 영남대를 졸업하고 경북 울진 제동중학교 국어교사로 시작했다. 아이들의 지적능력과 과제수행을 높이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수단이 과격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해 회초리를 들고 체벌도 했다. 회의가 들었다. '이것이 진짜 교육적인가, 과정이 비교육적이면 목적의 의미가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서울 신일중·고로 옮긴 뒤 '폭력은 없다'고 다짐하고 체벌, 언어폭력, 비교하기, 창피주기 등 모든 폭력을 하지 않았다. 당시 한 학급에 중학생은 70명, 고등학교는 60명인 상황에서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해 교사가 폭력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정부와 사회가 교육투자를 안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육민주화선언으로 교육운동이 대중화됐다.

제대로 된 교사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운동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차에 유상덕 등 학생운동 출신 젊은 교사들과 서울YMCA교사회를 만들어 교육현실과 문제점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회원 숫자가 늘고 지역 모임도 생기면서 ‘5·10교육민주화선언’을 할 수 있었다.

교육민주화의 조건으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 △교사의 교육권과 시민적 제 권리 보장 △교육행정의 비민주성과 관료성의 배제 △자주적인 교원단체의 설립과 활동의 자유 보장 △보충수업과 심야학습의 철폐를 주장했다. 대중적 교육운동의 시작이었다. 보수언론조차도 “학교 교육민주화가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

■학생과 동료교사의 호응으로 파면은 면했다.

민주화선언을 준비하면서 파면이 예상됐다. 그해 2월 봄방학을 이용해 파면되면 택시운전할 계획으로 1종보통 운전면허를 땄다. 선언이후 교육당국은 학교에 징계파면을 요구했다. 이 소식을 들은 3학년 학생들이 5월 17일 스승의 날 기념식 뒤 운동장에서 “우리 선생님을 파면하면 등교를 거부하겠다”며 침묵시위를 벌였다. 동료교사들도 연대서명으로 동참했다.

파문확산을 우려한 당국은 없었던 일로 해버렸다. 덩달아 선언에 참여한 다른 교사들도 파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많은 교사가 경기도 연평도 섬이나 강원도 오지 등으로 전출당했다.

■교육운동이 노조운동, 진보정치운동으로 이어졌다.

교육 원리와 원칙에 맞는 제대로 된 교육의 본질에 대해 고민했다. 특히 당시 아침마다 일본 천황 쪽을 향해 인사하던 대로 운동장에서의 ‘차렷, 경례’하는 식의 일제 군국주의 교육의 잔재와 단체기합, 폭력, 교련 등 군사문화가 가장 비교육적이라고 생각해 교육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또한 교사도 노동자이고 임의조직인 전교협이 아닌 법적 조직으로서 노조가 필요해 노조운동을 벌였다. 더 나아가 진보 진영의 정치세력화로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진보정치운동으로 나가야 한다고 봤다.

■참교육을 이야기했다.

교육민주화가 정치적 용어라면 내용은 참교육이다. 참교육은 진짜 교육을 하자는 것으로 당시 얼마나 교육이 비교육적이고 반교육적이었는지를 반증하는 상대적 개념이다.

참교육은 구체적으로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이다. 남북이 갈려져 있고 분단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에서 올바른 민족관 교육을 통해 남과 북의 관계, 외세의 관계 등을 가르치고 민족교육,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민주교육. 개별화·개인화·기계화된 상황에서 인간의 참모습을 잃지 않고 인간관계 속에서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인간다운 인간을 지향하는 인간화 교육이다.

■지금 전교조는 법외노조가 됐다.

헌법적으로 자주적 단결권이 보장돼 있고 노동법으로 보면 해고자도 당연히 조합원 자격이 있다. 하지만 교사라는 특수성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경고, 벌과금을 매기더니 급기야 박근혜정부는 법률에도 없는 것을 행정지침으로 ‘노조 아님’을 통보했다.

조합원이 6만명 중 해고자가 9명인데 이들을 빼고 피해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헌법으로 보면 정부가 부당하게 하는 것인데 거기에 부응해서 아무리 현실적인 이익이 있다고 원칙을 버리고 ‘내 자식을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할 수 없지 않느냐.

■ 민주노총 위원장 시절에 사회적 대화를 강조했다.

2004년 당시 노사정위원회라는 법적 기구가 갖는 한계와 문제점 때문에 별도의 ‘노사정대표자회’로 참여했다. 여기에서 ‘사회적 대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비정규직 문제를 법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노사정위를 고쳐서 써보려고 했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을 고치기 어려웠다.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 양산법이 됐다.

촛불로 정권교체를 이뤘다. 노사정, 사회적 대화 당사자들은 달라진 상황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닌 정말 대등한 자리에서 대화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노조가 사용자와 정부에게 많이 당하고 내부에서 많은 오해도 받았지만 과감하게 털고 나서야 한다. 그래야 비정규직으로 대변되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등 노동 현안에서 주도할 수 있다. 늘 불평하고 피해의식을 가지는 것은 촛불정신이 아니다. 보잘것없는 촛불 작은 것 하나하나가 모여서 큰 힘이 될 줄 누가 알았나. 철옹성 같은 국회를 불태워서 압도적으로 탄핵 결의안이 통과시켰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을 해냈다.

노동 쪽이 열었다. 마찬가지로 노동이 사회적 대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주도해야 한다.

<5·10 교육민주화선언 전문>

학생들과 함께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우리 교사들은 오늘의 참담한 교육현실을 지켜보며 가슴 뜯었다.

영원한 민족사 앞에 그 책임의 일단을 회피할 수 없음을 통감하게 된 우리는 더 이상 강요된 침묵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결심에 이르렀다. 우리 교사들을 믿고 따르는 학생들의 올곧은 시선은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방관자로 남아 있는 우리를 더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이제 우리는 맹랑한 꼭두각시의 허무한 몸짓을 그만 그쳐야 한다. 우리 앞의 저 학생들이야말로 이 민족의 미래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기성세대의 탐욕과 허위, 좌절과 패배주의가 저들을 병들게 하고 있음을 주목하자. 이 같은 부정적인 현상은 특정세력의 허용과 독선에 바탕한 비민주적 사회와 이에 종속되어 학생들에게 비판적 안목과 문제해결 능력을 길러주지 못하는 비민주적 교육에서 비롯됨을 직시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요원의 불길로 타오르는 민주화의 열기는 역사의 필연이며 각 부분의 민주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교사들이 주체적으로 이루어야 할 교육부문의 민주화는 사회 전체의 민주화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교육의 민주화는 사회의 민주화의 토대이며 완성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건대 해방이후 우리의 교육은 전민족의 노예화를 획책하던 일제 군국주의 교육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시류에 따라 부침한 정치권력의 편의대로 길들여진 충직한 시녀로 전락하였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누더기 같은 헌법 속에 그나마 사문화된 채 보장받지 못했고 식민지하에서 구조화된 교육행정의 관료성과 비민주성은 온존되어 왔다.

그 결과 민족운동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던 교사들은 국민의 교사가 아니라 극도로 통제된 관료기구의 말단으로 떨어졌고 교직은 성직이란 미명아래 점수매김과 서열짓기에 급급한 사이비 교육의 굴레 속에서 무조건적 희생을 강요당했다.

참다운 교육을 위한 교사의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노력과 자율성은 배척되고 있다. 힘써 진리를 탐구하고 심신이 건전한, 인간미 넘치는 공동체의 성원으로 자라야 할 학생들은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 비정한 점수경쟁과 물질만능적 상업주의 문화의 홍수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방황하고 있다.

비민주적 교육현장은 일방적으로 선정된 경색된 가치만을 학생들에게 주입할 뿐 민주시민의 자질을 함양할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다. 모순에 찬 사회구조와 국민의 요구를 올바르게 충족시킬 수 없는 교육제도로 말미암아 갈피잡지 못하고 있는 학부모들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할 여유도 없이 당면한 과열경쟁 속에 자신과 사랑하는 자녀의 인간다운 삶을 저당 잡혔다.

산적한 교육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당국의 행정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그것이 전혀 가능하지 않음은 이미 증명되지 않았는가. 조령모개가 한국교육정책의 대명사로 된 지 오래이다.

교육의 주체인 교사·학생·학부모가 소외된 상태에서 추진되는 이른바 교육개혁이란 기술적이고 지엽적인 절차상의 손질일 뿐,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국민에게 또 하나의 환상을 심어줄 뿐이다.

교사, 학생, 학부모를 교육 주체의 자리에 확고하게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교육민주화의 첫걸음이다. 이에 우리는 교육의 민주화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천명하는 바이다.

1. 헌법에 명시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실질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교육은 정치에 엄정한 중립을 지켜 파당적 이해에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1. 교사의 교육권과 제반 시민적 권리는 침해되어서는 안 되며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권도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1. 교육행정의 비민주성, 관료성이 배제되고 교육의 자율성이 확립되기 위해 교육자치제는 조속히 실현되어야 한다.

1. 자주적인 교원단체의 설립과 활동의 자유는 전면 보장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당국의 부당한 간섭과 탄압은 배제되어야 한다.

1. 정상적 교육활동을 저해하는 온갖 비교육적 잡무는 제거되어야 하며, 교육의 파행성을 심화시키는 강요된 보충수업과 비인간화를 조장하는 심야학습은 철폐되어야 한다.

1986. 5. 10

한국 YMCA중등교육자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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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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