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노동자대투쟁 주역들을 만나다│⑤ 문성현 전 통일중공업노조 위원장

전태일이 노동운동으로 이끌었다

2017-08-16 10:11:31 게재

학생운동 출신들, 노동자대투쟁의 한 흐름 일궈 … 노동자들의 '먹물형님'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은 노동자들의 자발적 투쟁에다 1970년 초부터 노동현장에 뛰어든 ‘대학생출신’ 노동자의 활동이 더해진 결과였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문성현(65) 전 통일중공업(현 S&T중공업)노조 위원장이다.

사진 한남진 기자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며 전태일 노동자가 분신자살했다. 이 사건은 많은 대학생과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던졌다. 경남 함양 출신으로 1971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문성현 학생에게도 이 사건은 큰 충격이었다. 전태일 열사 일기에 적힌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글귀가 크게 다가왔다. 학생운동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고, 3학년이 되자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도 대학교를 졸업하면 공무원이나 교수가 되거나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당시 서울대 상대 내부에는 노동운동에 대한 지향이 있었다. 고 김근태, 장명국 내일신문 대표 등 선배들이 앞장섰고 문성현을 비롯한 이목희(전 한국노동연구소장, 전 국회의원), 최재호(전 사무금융노련 위원장), 정금채(전 전국노동단체연합회 공동대표), 노진귀(전 한국노총 정책본부장), 고 최한배(전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사무국장) 등이 뒤를 이었다.

문성현은 군대 갔다 와서 공장생활하기로 계획을 세웠지만, 제대할 때쯤 동생이 학생운동으로 구속됐다. 한 집안에 두 명이나 샛길로 빠지면 안 되겠다 싶어 1977년 삼양사에 취직했다. 그러면서 보일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장명국 선배가 운영하던’ 금성냉동학원에 다녔다.

1979년 8월 10일 출근한 문성현은 와이에이치(YH)무역 여성노동자들이 회사 폐업조치에 항의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 시위를 벌였다는 아침기사를 봤다. 그는 그 자리에서 사표를 썼다.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하기로 한 것이다. 서울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에서 6개월 과정의 선반가공을 배웠다. 1980년 가을 서울 영등포에 있던 동양기계에 입사했다. 이 회사는 방위산업체로 500여명의 노동자들이 자동차부품 등을 만들었다. 회사에는 이미 노동조합이 있었다. 대의원선거에 나가기 위해 친목회도 만들어 활동했고 공고 출신의 젊은 친구들과 어울렸다. 다음해 대의원에 당선됐다.

1982년 회사가 경남 창원으로 이전했고 1983년에는 통일교에서 운영하는 통일중공업에 통합됐다. 그는 노조에서 사무국장을 맡았다. 1985년 4월 임금인상 투쟁과정에서 회사는 문 사무국장이 서울대 나온 것을 알아챘다. 그는 보안대와 회사측이 조여 오자 미리 일부 동료에게 대학생 출신인 것을 알려놓은 상태였다. 동료들은 ‘뭐가 문제’냐는 반응이었다.

임금인상교섭 막바지에 위원장이 직권조인을 하자 이에 반대하는 조합원들이 문성현 사무국장을 중심으로 파업농성을 벌였다. 방위산업체 최초로 벌인 파업이었다. 같은 해 인천 부평의 대우자동차 파업과 서울 구로동맹파업이 발생했다. 이들 파업도 소위 ‘대학생출신’이 참여한 투쟁이었다.

통일중공업 조합원들은 기존 위원장을 불신임하고 문성현을 노조위원장으로 세웠다. 구로동맹파업을 지지하기 위한 집회를 열기로 한 전날 그는 전격 구속됐다.

그때 그의 변론을 맡은 이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노 변호사는 대뜸 “나는 부산상고 나와 출세하려고 세 빠지게 공부해서 변호사가 됐는데 당신은 서울상대 나와서 왜 노동운동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노 변호사에게 전태일 평전을 권했다. 책을 읽은 노 변호사는 “문성현을 이해하려면 전태일 평전을 봐라”며 판사와 검사에게 권했다. 노 변호사의 변론 덕에 그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1986년 해고된 동료들과 복직투쟁을 벌이며 통일노조민주화 투쟁을 벌였고 대우조선노조를 만들기 위한 소모임도 만들었다. 하지만 결성을 앞두고 회사측에 들통이 났다. 참여한 10여명의 대우조선 노동자들이 부당전출당하거나 해고됐다.

그는 대우조선 제3자개입 금지 위반으로 수배됐지만, 6월 민주항쟁 당시 노동자들과 함께 거리로 나왔다. 그러던 중 두번째 구속됐다. 6.29선언 이후 수백명의 창원, 거제 노동자들은 주말마다 구치소에서 “문성현 석방하라”며 집회를 열었다. 그해 12월에 석방됐다. 감옥에서 나온 그에게 노동교실, 소모임, 대중집회 등에서 교육, 연설요청이 쇄도했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먹물 형님’으로 통했다. 그는 1988년 경남노동자협의회 초대 의장으로 추대 됐다.

이어 1989년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공동의장, 1999년 민주노총 전국금속연맹 위원장.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민주노동당 대표를 지냈다.

■ 87년 이후 노동운동을 뒤돌아본다면.

87년 투쟁에서 열심히 싸웠고 많은 구속, 해고 심지어 열사들까지 나왔다. 3가지 과제가 있다. 첫째, 노조 있는 데와 없는 데로 나눠졌는데 노조가 있는 곳은 상대적으로 안정화된 조건이지만 10명 중에 1명밖에 안되고 나머지 9명은 노조 바깥에 있다. 비정규직,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 자영업의 알바 문제이기도 하다. 노조운동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두번째는 운동의 속도와 방향을 놓고 생각이 다르다. 생산직·사무직, 대기업·중소기업 등 대중 조건의 차이가 있어서 다른 것으로 이해가 된다. 하지만 정치적 이유로 노조운동이 규정돼 있는 정의당, 통합진보당, 또 다른 변혁적인 관점 등에 있어서 자신이 속한 집단이 어느 정파냐를 중요하게 보는 것이 문제다. 자신이 속해 있는 대중적 토대가 부차적으로 되고 있다.

세번째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나눠졌다. 노동자들이 전체적으로 하나로 가야하는 상황에서 힘을 분산시키고 약화시키고 있다. 이런 것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해법을 찾아야 한다.

■ 노동현안에 대한 노사정, 사회적 대화에 대한 생각은.

지금까지 노동운동은 임금인상과 고용안정 요구가 기본이었고 자본측의 고용유연성 요구에 대한 수동적 방어가 중심이었다. 87년 이후 노동운동의 역사도 30년이 됐고 10%에 불과하지만 조직노동자의 삶도 일정하게는 안정화됐다. 이제는 이를 바탕으로 전체 노동자의 문제를 자기 과제로 받아 안고 나아가 경영, 경제여건 변화에 주동적으로 대응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대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

■ 진보정치를 하다 지난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에 합류했다

임금격차는 극복해야 될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이를 해소하는데 우리 노조만의 힘으로 안 되는 것 같다.

다시 87년노동자대투쟁을 되돌아보면서 현재대로 갈거냐 아니면 노동이 담당해야 될 역사적 역할하려면 특단의 노력을 해야 한다. 다른 나라 노동자들이 했던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 현재 던져진 우리의 책무다. 이것을 위해서 살아온 모든 인생을 걸고 부딪쳐 볼까 한다.

■ 문재인 대통령과는 인연이 있나.

1985년 집행유예로 나온 뒤 노무현 변호사를 찾아갔는데 “옆방에 좋은 친구가 있다”며 소개해 준 사람이 문재인 변호사이다. 그 뒤 산별노조를 만들기 위해 영남노동연구소를 열었는데 문 변호사가 참여했다. 1989년 세번째 구속됐을 때 문 변호사가 변론을 해줬다. 2012년 대선에는 문 후보를 지지하며 캠프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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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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