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노동자대투쟁 주역들을 만나다 │⑥ 이상범 전 현대자동차노조 임시집행부 위원장

가방끈 짧다는 열등감을 떨쳤다

2017-08-22 10:50:31 게재

일하며 독서모임 참여, 노조 창립 주도 … 노조위원장 거쳐 구청장까지 역임

6월 민주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은 국민과 노동자들에게 승리를 경험하게 했다. 이 승리를 통해 노동자들은 자주적 인간으로 거듭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상범(60) 전 현대자동차노조(현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위원장이다. 그는 중학교 중퇴라는 콤플렉스(열등감)를 극복하고 울산시 시의원을 거쳐 구청장까지 피선됐다.

사진 한남진 기자

이상범은 1979년 9월 현대자동차에 입사했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고졸 이상 학력이거나 중졸이라도 자동차정비 기능사 3급에 경력 3년 이상인 사람만 입사시켰다. 하지만 이상범은 이 조건에 미달이었다. 중학교 2학년 중퇴였기 때문이다. 충북 보은중학교 2학년 때 갑작스럽게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공장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기업에 다니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던 그는 학력을 ‘중졸’이라고 허위기재해 ‘생계형 위장취업’을 감행했다.

당시 공장 안은 군대 같았다. 정문을 통과할 때 경비가 장발을 단속했고 고과권을 가진 조·반장의 권한이 막강했다. 모든 사항은 고과를 매겨 보너스, 시급에 차이를 뒀다. 하지만 이상범은 대기업에 다닌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해 고과를 나쁘게 받아도 불평하지 않았다. 5년 넘도록 누구보다 먼저 출근해 작업을 준비하고 다른 동료가 올 때까지 책을 읽었다. 늘 가방끈이 짧다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그는 회사 독서대학 활동에 참여했다.

현대자동차에는 노사협의회가 있었다. 노사위원은 회사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지명되거나 고참 반장이 돌아가면서 했다. 이상범이 일하던 연구소는 다행히 직선으로 노사위원을 뽑았다. 이상범을 눈여겨 본 선배들이 다음 노사위원을 맡으라고 했다. 그는 노동법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노동법해설’ 등을 공부했다. 이때 노사협의회의 한계와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알았다.

1985년 노사위원이 됐다. 그해 인천 부천 대우자동차 파업은 그에게 큰 용기와 자신감을 줬다. 하반기에는 회사앞 양정교회에서 소설 ‘어느 돌멩이의 외침’의 작가 유동우씨 강연이 있었다. 강연회를 마친 뒤 이상범과 같이 일허던 하인규, 전한수, 금효섭, 김동철 등 5명은 매주 모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이들은 ‘노동법’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철학에세이’ 등을 읽으며 노동·사회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상범은 권용목(현대엔진), 천창수(현대중전기), 노옥희(현대공고 해직교사) 등 현대그룹 주요사업장 활동가 리더들이 따로 모이는 학습모임에도 참여했다.

1987년 6·10민주항쟁과 6·29 대통령 직선제 쟁취는 노동자들에게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현대그룹에서는 7월 5일 현대엔진이 첫 노조결성에 성공했다. 15일 현대미포조선도 설립신고필증 탈취사건이 있었지만 노조가 결성됐다.

이상범 등은 현대자동차 노조결성일을 24일로 잡았다. 마침 이날은 장명국 석탑노동연구원장이 울산성당에서 노동법 강의를 했다. 모든 정보기관과 회사의 신경이 그 쪽으로 쏠렸다. 저녁 이상범의 15평 아파트에 45명의 발기인이 모였다. 날씨가 무더웠지만 보안 때문에 창문까지 닫아걸었다. 현대엔진노조 간부들의 도움으로 노조 결성식을 무사히 마쳤다.

하지만 현대엔진노조에서 ‘회사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 낮에 이미 노조를 결성하고 설립신고서를 냈다’는 연락이 왔다. 이상범 등은 ‘발기인들에게 불이익이 가지 않도록 해고, 구속도 각오하고 사생결단으로 막자’고 결의했다.

25일 출근하니 어용노조 쪽에서 점심시간에 노조결성 보고대회를 한다는 유인물이 돌았다. 보고대회 중심인물들은 친 회사쪽 노사위원들이었다. 회사의 제지도 없어서 한눈에도 ‘어용’임을 알 수 있었다.

이때 이상범, 유제생 등이 “어용이다. 속으면 안 된다. 우리가 어제 저녁 노조를 결성했다. 여기는 어용이고 우리가 진짜니 우리를 지지해 달라”고 외쳤다.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어용노조측 관계자들은 꼬리를 내리고 도망갔다. 식당에 있던 노동자들이 폭발적으로 합류했다. 이들은 본관 앞으로 몰려가 “어용노조 사퇴, 민주노조 인정”을 외쳤다.

‘하늘같았던’ 인사·총무과 대리, 과장들이 안절부절 못했다. 이들은 “마이크를 달라” “노조 가입원서 받게 종이와 펜을 달라” “밥을 못 먹었으니 빵과 우유를 달라”고 요구했다. 노동자들 기세에 회사는 순순히 요구를 들어줬다.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작은 승리감을 느꼈다. 이들은 노조결성 소식을 알리기 위해 어깨동무하고 여러 공장을 한 바퀴 돌았다. 노동자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자연스럽게 모든 공장이 멈췄다.

노동자들은 이상범을 위원장으로 임시집행부를 구성하고 회사와 협상에 들어갔다. 12시간의 농성과 협상 끝에 ‘어용노조 집행부 사퇴, 민주노조 신고필증 보장’을 쟁취했다. 마침내 27일 본관 앞 잔디밭에서 4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민주노조 보고대회를 열었다.

이상범은 1개월 안에 정식선거를 치러 위원장을 선출하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석연찮은 이유로 초대 위원장 선거에서 낙선했다. 1989년 2대 노조위원장에 당선됐다. 2대 집행부는 일상활동 체계를 구축하고 대의원·소위원 활동을 강화해 민주적 노조운영의 틀을 갖췄다. 이상범 위원장은 연대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 현대그룹노조협의회 부의장, 현대그룹노조총연합 공동의장을 지냈다.

그는 풀뿌리 지방자치에도 앞장섰다. 1998년 울산시 시의원을 거쳐 2002년 북구 구청장에 당선됐다. 40대 중반으로 ‘최저 학력의 최연소 단체장’이었다.

2004년 전국공무원노조 파업사태가 일어났다. 그는 ‘파업에 가담한 공무원노조원들을 파면 해임시키라’는 중앙정부 요구를 거부하다 직무유기죄로 고발당했다. 2006년 항소심에서 유죄판결이 확정돼 직무정지를 당했다. 현대자동차 현장에 복귀한 그는 2007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돼 명예회복할 수 있었다. 그는 올해 말 정년을 앞두고 있다.

■노동자대투쟁 30년을 맞은 소감은.

독서모임을 통해 사회·경제·정치적 문제에 대한 눈을 떴다. 왜 노동자들이 뼈 빠지게 일을 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지, 왜 우리는 인격적으로 침해받고 살아야 하는지,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해선 개인의 힘으로 안 되고 노사협의회를 넘어서 노조를 만들고 더 나아가 사회·정치세력화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쳤다.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이 자각하고 단결하니까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된다는 것을 체험했다.

나 자신도 노동운동을 통해 콤플렉스로 가졌던 가방끈을 짧다는 것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고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오히려 당당하게 생각하게 됐다.

■동반자적 노사관계를 주장했다.

노조위원장 임기를 마치고 현장에 복귀해 1992년 12월부터 1997년 9월까지 현대자동차노동자신문을 만들어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아 조합계몽운동을 했다. 노동운동이 5~10년 투쟁 일변도식 과도기를 거친 뒤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했다.

노사관계가 적대적이어선 곤란하고 그렇다고 미국, 일본처럼 노사협조주의도 아닌 독일의 공동결정제도 같은 동반자적 노사관계가 답이라고 제시했다. 또한 노조가 자기이익 투쟁만 하지 말고 시민들의 주거·교육·환경·교통에도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노동운동을 통해 삶의 지표가 있다면

노동자에게 ‘분열은 죽음이고 단결이 생명’이다. 회유와 협박을 통해 분열의 틈이 만들어지는데 특히 ‘술, 여자, 돈’ 3가지를 금기사항으로 여겼다. 노조간부를 통해 개인적으로 신분상승이나 치부하지 않았다. 3대 금기사항을 신앙처럼 지켰다. 그 누구한테도 이런 것으로 비난받은 적이 없다. 직권조인의 과오로 인해 노동운동가로는 재기하지 못했지만 지방의원, 구청장으로 지지받을 수 있었다.

노조를 교과서적으로 민주주의 학교라고 한다. 현장과 소통하고 의견을 모으기 위해 많은 회의를 주재했다. 민의 수렴하는 것을 배웠다.

또한 많은 비상상황이 발생하는데 매번 판단하고 결단해야 했다. 늘 긴장의 연속이었고 지기관리에 철저해야 했다. 위기관리 능력을 배울 수 있었다.

구청장 업무를 수행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인간의 잠재능력은 무한하다는 것을 실천 속에서 확인했고, 훈련된 노동자들이 정치를 하면 더 잘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 ‘HMC퇴직지원센터’에서 책임자로 있다.

2013년 단체협약에서 노사간에 체계적인 퇴직지원 전담기구 필요성을 합의해 2014년부터 시작해 4년째 운영하고 있다. 2015년부터 담임을 맡았다. 퇴직 5년 전부터 연령대별로 4단계로 세분화해 전문기관에 위탁 운영 중이다. 연인원 5000명 이상이 퇴직프로그램 교육과 1400여명이 상담 및 전문컨설팅을 받았다. 부수적으로 퇴직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떨쳐내고 퇴직 이후 인생 이모작 준비에 능동적인 자세로 변하고, 현 직장(회사)에 대한 소중함과 고마움을 스스로 느끼면서 노사관계 안정에도 기여하는 측면이 크다.

■ 고령화 시대에 별다른 노후대책 없이 베이비붐 세대가 대거 은퇴하고 있다.

현대자동차에서만 2030년까지 3만5000명 이상이 정년퇴직한다. 대기업 노동자는 상대적으로 좀 나은 편이지만 중소기업 노동자에 대한 퇴직준비 및 이후 지원대책은 매우 빈약하다. 특히 정부가 국민연금 기금 고갈을 막기 위해 노령연금 지급 시기를 단계적으로 늦춰 소득공백기가 발생한다. 이는 국가의 잘못으로 인한 피해를 국민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정년퇴직 연령도 국민연금 지급 시기와 연동해 단계적으로 조정하는 법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대책 없이 소득 공백기에 내몰린 장·노년 실업문제 역시 몇 년 안에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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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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