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노동자대투쟁 주역들을 만나다│⑦ 장지흔 전 대우자동차노조 부위원장

노조민주화로 직장도 삶도 바뀌었다

2017-08-29 20:51:39 게재

85년 파업, 노동운동 미래상 제시 … 단협 전문 "직장은 후손에게 물려줄 자산"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은 인천시 부평구 대우자동차노조(현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민주화투쟁으로 번졌다. 인천기계공고 출신으로 1978년 입사한 장지흔(57) 전 부위원장은 대졸출신 현장활동가와 결합해 노조민주화투쟁을 이끌었다.

대우자동차 노조는 신진자동차 시절인 1971년 5월에 결성됐다. 이 과정에서 회사의 208명 집단해고에 맞서 800여명 노동자들이 파업농성을 벌여 부분 복직을 쟁취했으나 노조 기반은 크게 약화했다. 노조는 있었지만 이름뿐인 조직이었다.

사진 한남진 기자

대우자동차에 새로운 노동운동의 불씨를 지핀 것은 대졸 출신 현장활동가들이었다. 1984년 말 송경평, 홍영표, 박재석 등 현장활동가들은 점심·휴식시간을 이용해 군복무자 처우개선, 노조민주화를 요구하는 현장공청회를 열었다.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소식지 '노동자의 함성'도 발간했다.

1985년 불황을 이유로 상여금이 3년간 지급되지 않고, 근태 인사고과와 생산직과 사무직의 복지차별, 무급 조기출근 강요 등 회사의 현장통제가 강화되자 노동자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4월 15일 2차 노사 임금교섭이 결렬되자 2000여명의 조합원은 위원장에게 파업 결단을 요구했다. 다음날인 16일 대우자동차 노동자 2500여명은 마침내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 4일째인 4월 19일부터 노동자들은 식당에서 기술센터로 장소를 옮겨 철야농성을 벌였다. 23일에는 농성장에 진입하지 못한 1500여명의 대우자동차 노동자와 가족, 민주화운동단체 회원 등이 청천동 일대에서 항의집회를 열었다. 24일 노조를 제치고 농성조합원들이 선출한 비상교섭위원인 홍영표 대의원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단독협상을 벌여 기본급 10% 인상, 제 수당 신설 등에 합의했다.

대우자동차 파업의 승리는 전두환정권의 5.2% 임금 가이드라인을 무력화시켰다. 영창악기, 삼익악기도 대우자동차노조와 비슷한 총 16% 임금을 인상했다. 그뿐만 아니라 효성물산(25일), 대우어패럴(26일), 부산파이프(23일~25일), 통일중공업(25일~26일) 등 많은 노조의 단체행동으로 이어졌다. 또한 전 사회에 깊은 충격과 영향을 미쳤다. 위장취업자가 전 사회적으로 문제화되고 제3자 개입금지, 냉각기간 등 전두환정권이 개정한 노동악법의 문제점도 폭로됐다.

장 전 부위원장은 “파업 이후 충남 태안 하계휴양지를 갔는데 휴가 온 사람들로부터 영웅대접을 받았다”며 “군사독재 시절에 불합리한 점을 지적한 것에 대한 국민호응이었다”고 말했다.

홍영표·송경평 등 총 8명이 구속된 1985년 대우자동차 파업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서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한국 노동운동의 주류가 여성, 섬유산업 등 경공업에서 남성, 대규모의 중공업으로 바뀐 것이다.

장지흔도 이때 노동운동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군복무자 처우 개선의 필요성과 ‘노동자의 함성’을 통해 노동법의 존재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알게 됐다. 특히 엔진부 대의원이었던 고교동창의 구속은 그를 노동운동으로 이끌었다. 친구 재판이 있던 날 ‘결근 처리하겠다’며 막아서는 직장(부서 책임자)을 뿌리치고 재판을 참관했다.

구속됐다 박재석이 나오자 장지흔 등 10여명은 1987년 1월 초부터 노조민주화를 위한 소모임을 시작했다. 이들은 ‘노동자의 함성’을 다시 만들어 부평공장 화장실 등에 뿌렸다.

민주항쟁의 열기가 뜨거웠던 1987년 6월 28일, 장지흔 등은 ‘대우자동차 원직복직추진 노동자회 준비위원회(준비위)’를 조직하고 저임금, 강제잔업, 장시간 노동, 열악한 작업환경의 개선, 어용노조의 개편 등을 요구했다. “공장 내 민주화 없이는 나라의 민주화 없다” “대통령도 내 손으로, 노조위원장도 내 손으로, 직장과 공장도 내 손으로” 등이 당시 준비위가 내건 구호였다.

8월 7일 ‘민주노조 쟁취 평조합원 위원회’는 노조위원장에게 ‘10일 예정인 회사와 단체협약 갱신협상 때 저임금, 장시간 노동조건 개선과 노조위원장 직선제, 해고자 복직 등을 요구’하라고 압박했다. 하지만 회사는 준비부족을 이유로 17일로 연기했다.

10일 노조 집행부가 단체협약 갱신을 위한 회의소집을 제안했지만 200여명의 노동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대우자동차 민주노조 쟁취위원회(위원회)’를 조직해 민주노조 결성과 노동조건 개선 투쟁에 돌입했다.

이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각 공장을 순회하자 순식간에 4000여명으로 불어났다. 26일엔 위원회가 현 노조의 어용성을 폭로한 유인물을 나눠 주며 결집을 호소하자 1000여명이 모였고 이들 중 400여명이 본관 건물을 장악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처음 200명으로 시작한 농성은 전체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퍼졌다. 31일에는 회사가 농성자의 대표성을 계속 인정하지 않자 1500여명의 노동자들이 지게차를 앞세우고 인천 부평구 청천동까지 거리시위를 벌였다.

마침내 9월 1일 평조합원 대표들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협상을 시작했다. 이날 인천 부평구 청천동에서 400여명이 벌인 연좌시위에서 35명이 연행됐다. 3일 협상에서 연행자 석방, 5일에 노동자 비상총회, 부상자 치료 등을 합의했다. 곧바로 연행자 중 33명도 석방됐다.

이에 노동자들은 150여명만 남아 총회 준비를 위한 실무작업에 들어갔고 연일 계속된 철야농성의 피로를 씻기 위해 대부분 귀가했다. 다음날 4일 경찰은 6.29선언 이후 처음으로 경찰력을 투입해 강제 해산시켰다. 단위사업장에선 가장 많은 98명이 구속자가 발생했다. 6일부터는 경찰의 삼엄한 현장 감시 속에서 강제노동해야 했다.

24일 위원장 직선제가 통과됐고 10월 16일 총선거에서 원용복 후보가 74.5%의 높은 지지율로 당선됐다. 초기 10명 중 유일하게 현장에 남은 장지흔은 조직담당 부위원장으로 뽑혔다. 대의원 선거에서도 부평 본조 69명 대의원 가운데 초선 대의원이 66명이나 당선되며 민주노조 건설의 기운을 만들었다.

■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변화는.

1987년 전 현장은 회사나 관리자를 상대로 제대로 이야기를 못 했다. 감기에 걸려 월차를 냈는데 결근으로 처리할 정도로 강압적이었다. 아이를 낳아 출근 못 하겠다고 하면 ‘네가 아이를 낳나. 부인이 낳지’라며 출근하라고 했다. 연·월차휴가를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 이러던 것이 일시에 뒤집혔다. 우리의 권리를 우리가 찾을 수 있게 됐다.

■ 30년 맞은 소감은.

1993년~95년까지 수석 부위원장을 지낸 뒤 2000년 정리해고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노조위원장 선거에 나갔다. 준비부족으로 떨어졌다. 그 뒤로 직접 노조선거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노조간부로 성실성, 도덕성, 전문성을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어용이니 민주니 하며 많이 싸웠다. 그래도 부대끼며 살았던 동료가 있어 좋다. 영원한 어용도 없고 민주도 없다. 사람은 항상 바뀌게 돼 있고 한 가지만 지키고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 작은 차이를 극복하고 상대방의 처지와 조건에 서서 생각해 보면 된다고 생각한다. 가까운 동료들과 선거 때마다 후보군을 놓고 조합원들을 위해 누가 좋은지 평가해 지지하고 있다.

■ 최근 글로벌지엠이 오펠 유럽사업부를 매각했다.

한국지엠의 유럽수출 물량이 감소하면서 부평1공장을 제외하고는 가동률이 많이 줄었다. 1987년 노조민주화투쟁 직후 노사가 맺은 단체협약 전문에는 ‘대우자동차는 직장 구성원이 주인이다. 대우자동차 직장은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줄 유구한 우리들의 자산’이라고 했다. 이제 조합원들이 세게 싸워서 풀어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어떻게 우리 일터를 지켜낼 것인가가 제일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다.

■ 산업은행의 거부권이 10월이면 만료된다.

글로벌지엠은 2002년 산업은행에 주주 간 협약으로 15년간 한국지엠 이사회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 ‘거부권’을 줬다. 글로벌지엠의 한국시장 철수에 대해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오는 10월 16일이면 그 협약 기간이 만료돼 거부권도 상실하고 게다가 산업은행이 소유한 지분까지 매각한다면 한국지엠 '철수'도 가능해진다. 한국지엠 1만5000명 노동자와 30만명 협력업체 노동자, 가족의 생존권이 불안한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다. 한국임원, 한국에 온 외국 임원 그 누구도 회사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없다. 오직 수익중심인 지엠 이사회에 달렸다. 산업은행은 보유한 한국지엠지분 17.02%를 매각하지 말아야 하고 거부권도 유지해야 한다.

■ 전·현직 노조지부장이 낀 취업 비리가 발생했다.

글로벌지엠이 한국상황을 모르는 상황에서 노사부문 임원을 통해 노조에 정규직 채용권 1/3을 줬다는 설이 있었고 이해관계를 이용해서 적당한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고들 했다. 노조간부는 선거를 하려면 조직을 해야 하고 돈이 필요해 이런저런 이해관계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요즘 능력 있는 노조간부는 회사나 하청업체에서 돈을 마련해 잘 쓰는 친구들이라고 현장 조합원들은 말한다. 옛날에는 노조간부들에게 ‘잔업을 많이 못 해 수업이 적다’며 조합원들이 모금해 줬다. 처지와 조건이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희생과 봉사하는 사람이 노조간부였는데 지금은 관료화, 권력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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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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