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노동자대투쟁 주역들을 만나다 ⑨│이청호 서울지하철노조 전 사무국장

과시형 투쟁 아닌 실사구시로 성과

2017-09-05 00:00:01 게재

교육생 때 '직제문제' 제기, 한계 부닥쳐 … 노조결성 뒤 2년간의 투쟁으로 쟁취

울산에서 시작된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은 서울시민의 발로 공익사업장인 서울지하철공사에도 옮겨 붙었다. 그 뒤에는 탄탄한 현장기반과 꼼꼼한 분석으로 정책능력을 갖춘 이청호(63) 전 초대 사무국장이 있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대구공고 기계과에 진학했던 이청호는 고교 3학년 재학 중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1974년 5월 전매청(현 KT&G)에서 사회 첫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학력 차별을 느끼고 6개월 만에 그만두고 몇해 고시공부에 매달리다가 1985년 5월 서울지하철공사(현 서울메트로) 전동차정비 고용직 2종에 응시해 공사 교육원에 입교했다. 이청호는 교육받던 중 공사의 불합리한 직제에 대해 알게 됐다. 입사경로에 따라 일반직, 기능직, 고용직으로 나뉘고 별도의 승진과 보수를 적용했다.

이청호는 교육생들 대부분이 전문대 이상 학력에 자격증도 2~3개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승진과 보수에 부당하게 차별받고 있다는 것을 동기들과 공유했다. 교육생이었던 이청호, 최원석, 박노선은 당시 권력실세 허화평과 동기(육사 18기)인 총무부장을 면담하고 직제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다음날 담당교수로부터 "요즘 어떤 세상인 줄도 모르고 날뛴다"는 핀잔만 들었다.

익명의 투서로 근로조건 개선

1986년 10월 교육을 마친 이청호와 동기들은 군자·창동·지축 기지로 배치됐다. 야간 근무하던 어느 날 상사의 심부름으로 사무실에 갔다가 펼쳐져 있는 '회사사규집'을 처음 봤다. 그는 근무시간, 근무형태, 보수규정 등 중요한 것만 급히 적어 나왔다. 그는 회사가 사규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공사의 노동법 위반을 분석하기 위해 서점에서 '노동법해설'을 사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낮에만 근무하는 통상 근무자는 근로시간이 오전 8시에서 오후 7시까지였다. 규정보다 1시간 먼저 출근하고 2시간 늦게 퇴근했다. 또한 근로기준법상 시간외 수당 등 통상임금 지급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같은 일을 하는데도 기능직은 시간외 수당을 48%, 고용직은 25%로 차별해 지급했다.

이청호는 1987년 1월 초 50쪽 분량의 '서울지하철공사 불법행위로 인한 미지급 임금청구서'를 본사, 서울시, 노동부에 '익명'으로 보냈다. 그는 이 청구서에서 공사가 당시 6500여명 노동자의 임금 423억원을 미지급했다는 것을 지적했다.

얼마 뒤 운영이사가 근무자들을 모아놓고 현장불만을 청취했다. 그 뒤 공사는 고용직의 시간외 수당을 기능직과 같은 48%로 적용하고 통상근무자의 근로시간도 오전 9시에서 오후 7시로 바꿨다. 또한 노동부의 지시로 기술자격수당을 통상임금에 포함시켰다. 이청호는 익명으로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가시적 효과가 있자 뿌듯했다. 하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불법적이고 모순투성이인 현장의 문제를 개선할 수 없음을 깨닫고 노동조합을 결성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노조설립을 위해 동료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월 말 노조설립을 준비하기 위해 모이기로 약속한 10여명 중 이청호와 박노선 2명만 참석해 역부족을 실감했다.

이청호는 2월 말부터 '노동법해설' 저자가 운영하는 석탑노동연구원을 찾아가 노조 결성 등을 상의하며 동료들을 조직했다. 6월 항쟁과 6.29 대통령직선제 선언으로 사회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서울지하철 노동자들도 감지했다. 통상 근무자였던 이청호는 6월 항쟁 중에 기수별 2명씩 신망받는 12명을 조직해 매일 오후 3시 휴식시간을 이용해 군자기지 한 귀퉁이에서 노조의 필요성, 방법 등에 대해 토론했다.

8월 초 석탑노동연구원으로부터 노조결성을 함께할 사람으로 1985년 구로동맹파업 해고자 김준용의 매형으로 역무 파트에서 일하는 배일도를 소개받았다. 이들은 노동자들이 참여하기 좋은 평일이면서 쉬는 날인 9월 1일 공사창립일에 노조를 결성하기로 의기투합했다. 이청호가 배일도보다 현장기반이 탄탄했다. 하지만 이청호는 "노조결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입사도 빠르면서 차량기지보다 노동자가 많은 역무에서 일하는 배일도에게 노조위원장을 양보하고 자신은 사무국장을 맡기로 했다.

며칠 뒤 본사 과장으로부터 '13일 본사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들통이 났구나' 생각한 이청호와 배일도는 계획을 당겨 12일 오전 10시 퇴근하는 야간조만이라도 모아 노조를 결성하기로 했다. 하지만 차량기지 6명, 역무 3명만 모였다. 법정 최소 인원 30명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들은 노조결성을 주간조 퇴근시간인 저녁 7시로 미루고 발기인을 모으기 위해 각 현장으로 흩어졌다. 이윽고 이날 저녁 47명(차량 47명, 역무 9명, 기술 1명)의 발기인이 모였다. 서울지하철노조는 설립 한 달 만에 4800명이 넘는 조합원이 가입했다.

그해 10월 중순 노조는 꼼꼼한 조사와 분석을 통해 공사에 불편, 부당한 직제개편을 요구하고 직종·직렬·직급간 내부의 갈등을 극복하고 첫 단체교섭에 들어갔다. 11월 초순 노사는 '직제개편 일원화'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하지만 1988년 새로 교체된 공사 사장은 노사합의를 깼다. 6월 서울지하철노조 최초 2시간 파업을 통해 원상으로 복구했다. 하지만 8월에 배일도 위원장이 예기치 못한 일에 연루 의혹이 불거지자 집행부가 총사퇴했다. 위기에 몰린 상태에서 새로운 집행부는 10월 당초보다 후퇴한 직제개편 합의서를 체결했다. 11월 초 공사는 직제개편의 취지를 훼손한 합의가 무효라고 주장하며 인준반대 투쟁에 앞장선 이청호 등을 본사로 발령냈다. 이에 노조 차량지부가 단독총회를 열고 부당인사 철회를 요구했다. 총회투쟁은 12일간 매일 이뤄졌다. 총회가 길어지자 자연스럽게 연쇄파업 효과를 냈다. 19일 차량지부는 공사와 협상을 벌여 인사발령 철회는 물론 어느 누구도 민·형사상 책임을 지지 않는 승리를 쟁취했다. 하지만 또 다시 바뀐 신임 사장은 후퇴한 직제개편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다. 결국 1989년 8월 23일 중앙노동위 직권중재로 직제개편과 격일제 근무를 3조 2교대 변경으로 합의했다.

'생애임금' 새 논리로 임단협 승리

이청호는 1999년 10월 배일도 9대 위원장이 당선된 뒤 정책실장을 맡았다. 당시 정부는 행정자치부 지침으로 지방공기업의 임금을 3~4% 인상으로 통제했다. 정률로 임금인상이 지속될 경우 임금수준이 낮은 서울지하철공사 노동자는 임금수준이 높은 서울도시철도나 부산지하철과 비교해 점점 더 임금수준이 저하될 것이 뻔했다. 이청호는 동일업종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하기 위해 '개별 노동자의 생애임금'이라는 새로운 논리를 개발해 임단협 협상에 임했다. 12월 말 노사는 '임금은 동종업종과 같이 한다'고 합의해 단번에 30% 이상의 임금인상을 쟁취하고 전 직원의 60%이상을 승진시키는 획기적인 노사합의를 하게 됐다.

그는 2014년 말 59세로 정년퇴직했다. 이청호 전 사무국장은 "구호나 과시형 투쟁이 아닌 실사구시에 기초한 조사와 분석으로 정당성의 근거를 만들고 내부의 차이를 극복했다"면서 "현장에 기반하고 성실하고 도덕성을 가져야 조합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고 나아가 사용자의 묵시적 동의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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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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