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필시장, 본품 생산자 독점 판매 안돼"

2023-11-15 11:31:08 게재

법원 "소비자이익 위해 개방한 공공영역"

리필(재사용) 시장에서는 본품 생산자의 독점 판매를 허용할 수 없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소비자들이 경제적 이익을 얻도록 자유경쟁으로 개방한 공공영역이라는 이유이다. 14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62부(이영광 부장판사)는 코스닥시장 상장사인 A사외 1개사(원고)가 B사(피고)를 상대로 낸 부정경쟁행위 금지 등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A사는 2000~2020년까지 연구개발비 160억원을 들여 의약품 자동조제기를 개발했다. A사는 '전자동 정제 분류 및 포장 시스템'의 경쟁력을 인정받아 2012년 12월 지식경제부의 '세계일류상품'에, 2019년 10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첨단기술기업'에 각각 선정됐다. 이 같은 투자와 노력에 힘입어 A사는 1만대 이상을 판매해 업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A사는 이 조제기를 보유한 약국 등을 상대로 '소모품 약포장지(롤지 제품)'를 지속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리필시장'을 창출했다.

이 리필시장에 B사가 끼어들었다. 종이와 조제도구 제조업체인 B사는 2019년부터 자사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A사의 조제기에 사용가능한 롤지 제품을 판매했다. A사의 지관(롤지 감는 관)을 소비자(약국 등)로부터 수거해 약포장지를 감아 저렴하게 팔았다. A사는 롤지 제품 판매량이 감소하는 등 경제적 불이익을 입었다.

A사는 2020년 1월 B사 대표를 '지관 횡령' 취지로 검찰에 고소했으나, 검찰은 혐의 없음의 불기소처분을 했다. 그러자 A사는 2021년 12월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A사는 재판에서 "의약품 조제기와 지관은 원고(A사)들의 상당한 투자와 노력으로 만들어진 '성과'에 해당한다"며 "B사는 부정경쟁행위 또는 불법행위를 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B사는 원고에게 28억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반면 B사는 "소비자가 이 사건 지관을 제공하며 제품을 주문했다"면서 "소비자로부터 일시적으로 제공받은 지관에 약포장지를 감아 판매했을 뿐"이라고 맞섰다.

이에 이 사건은 제3 업체들이 리필용 소모품을 파는 것이 부정경쟁행위 등에 해당하는지가 쟁점이다.

법원은 "리필용 소모품은 그 본체 생산자에게 독점 판매하도록 허용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제3 업체들의 리필용 소모품 거래가 현실이라는 취지다.

재판부는 "리필용 소모품을 자유시장에 개방해 소비자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이 현재의 공정한 상거래 관행이나 경쟁질서에 부합한다"면서 "그 경제적 이익은 원칙적으로 공공영역에 속한다"고 평가했다. 이어 "인정된 A사의 성과는 본체 기기의 개발에 관련된 것으로서, 리필용 약포장지 시장과의 관련성은 없다"며 "B사는 A사의 경제적 이익을 침해(손해)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다만 "B사는 수거한 지관에 'A' 각인을 제거하거나 가리지 않은 상태에서 롤지 제품을 재판매 한 것은 A사의 상표권을 침해했다"며 "B사는 A사의 지관을 수거해 롤지를 감아 판매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고 판시했다.
서원호 기자 o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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