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일본 정부 상대 손해배상 승소

"강제동원 불법행위, 손배 청구 가능"

2023-11-24 11:07:49 게재

2심 "국가면제 적용안돼" 청구액 전부 인정 … 1심 뒤집어

실제 배상은 '불투명' … "배상 받으려면 일본 자산 압류해야"

이용수 할머니 등 국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했다. 법원이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은 불법행위로, '국가면제'는 적용되지 않는다며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모두 승소했지만 실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금을 받을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2021년 1월 승소 확정된 고 배춘희 할머니 등 12명도 아직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금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 상대 위안부 2심 선고, 법원 들어서는 이용수 할머니│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정의기억연대 이나영 이사장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일본 정부 상대 손해배상 청구 소송 2심 선고 기일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류영석 기자

◆1·2심 국가면제 인정 여부 엇갈려 = 서울고등법원 민사33부(구회근 부장판사)는 23일 이용수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 16명이 일본을 상대로 낸 21억원 상당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가 청구한 금액을 전부 인용한다"고 판결했다. 2016년 12월 소송을 제기한 지 약 7년 만이다. 소송 비용도 일본 정부가 부담한다고 판결했다.

이번 재판은 일본에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있는지가 주요 쟁점이었다.

국가면제란 한 국가의 국내 법원이 다른 나라 정부와 그 재산에 대해 재판 관할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해, 국가를 서로의 재판 관할권으로부터 보호하자는 국제법 규칙이다.

2021년 4월 선고된 1심은 한 주권국가가 다른 나라 재판 관할권으로부터 면제된다는 국가면제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보고 각하 판결했다. 국가면제의 예외를 인정하면 선고와 강제 집행 과정에서 외교적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게 당시 재판부 판단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을 상대로 유럽 여러 국가에서 피해자들이 소송을 냈으나 국가면제를 이유로 각하된 사례 등을 언급하기도 했다.

반면 항소심 재판부는 일본 정부에 대한 한국 법원의 재판권을 인정하며 1심 판단을 뒤집었다. 재판부는 이번에도 일본측이 재판에 참가하지 않아 공시송달로 게시판에 게시하고 일정기한 후에 전달된 것으로 간주하고 재판을 진행했다. 재판부는 "(최근) 국제관습법에 따르면 일본의 행위를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대한민국 국민을 상대로 자행된 불법행위로 일본의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고, 한국 법원의 재판 관할권을 인정하는 게 타당하다"고 밝혔다.

항소심 재판부는 유엔 국가면제협약과 미국·영국·일본 등 다수 국가의 입법 내용, 이탈리아·브라질·우크라이나 대법원 판결 등을 예로 들면서 "국가면제와 관련한 국제법 체계가 이미 개인의 재판 청구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이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면서 "가해국이 다른 국가에서 저지른 불법행위에 대해선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 실행들이 다수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사건 피해자들은 최소한의 자유조차 억압당한 채 매일 수십 명의 일본 군인들과 원치 않는 성행위를 강요당했고 그 결과 무수한 상해를 입거나 임신·죽음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으며 종전 이후에도 정상적인 범주의 사회생활에 적응할 수 없는 손해를 입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2015년 '위안부' 합의로 인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했는지 여부는 판단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고(일본)측이 별도로 항변이 없어 따로 판단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근거로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됐다는 논리를 펴 왔다.

◆실제 배상은 험난 예상돼 =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이 승소에도 불구하고 실제 배상을 받을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일본 정부의 자산을 강제로 매각해 배상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외교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2021년 1월 고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벌인 소송(1차)에서 승소해 각자 1억원씩 위자료를 받을 수 있게 됐지만 일본 정부는 현재까지도 지급하고 있지 않다. 피해 할머니 대리인단은 일본 정부의 한국 내 재산을 파악해 강제집행으로 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해 '재산 명시'를 신청했으나 일본 정부가 서류송달을 거듭 거부한 탓에 지체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한-일 간 역사 문제는 모두 해결됐다고 안도해 왔던 일본 정부는 이날 항소심 패소판결 소식이 알려지자 윤덕민 주일 한국대사를 초치해 한국 정부에 항의했다. 또 가미카와 요코 일본 외무장관 명의의 담화문도 발표했다. 가미카와 장관은 담화에서 "이 판결은 국제법 및 한일 양국 간 합의에 위배되는 것"이라며 "(한국에) 국가로서 스스로의 책임으로 즉시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강구하도록 재차 강하게 요구한다"고 밝혔다.

'국가면제 원칙'을 이유로 일본 정부는 그동안 한국 법원의 재판에 대해 무시전략으로 일관해 왔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로 관련 문제는 해결됐다며 한국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강제동원 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강제 집행에 신중한 입장 = 이용수 할머니는 소송 제기 약 7년 만에 승소해 법정에서 눈물을 쏟으며 만세를 불렀다. 휠체어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재판장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하다, 따로 할 말이 없다"면서도 "하늘에 계신 할머니들도 내가 모시고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다만 이용수 할머니측은 강제집행에는 신중한 입장이다. 이용수 할머니 등을 대리해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위안부' 문제대응TF 단장 이상희 변호사는 이날 회견에서 "국제 사회가 일본에 자발적 사죄와 이행을 촉구하는 데 이 판결을 활용할 것"이라며 "강제집행 등의 절차에 대해서는 열어놓고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윤석열정부는 강제징용 배상 판결 해법으로 일본 피고기업 대신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재단)이 배상금을 지급하는 '제3자 변제안'을 내놨다. 하지만 아직 상당수 피해자들은 제3자 변제를 거부하는 실정이다. 한·일 정상이 올해 들어 일곱번이나 만나는 등 양국 관계가 개선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항소심 판결이 자칫 '제2의 강제동원 피해 배상 판결'이 될 가능성도 있다. 일본이 우리 재판부 결정을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서원호 정재철 기자 os@naeil.com
서원호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