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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예산 삭감 파동 그후 “여전히 문제는 신뢰야”

2024-04-19 13:00:01 게재

4.19혁명 기념일인 4월 19일은 필자와 같은 생명과학자에게는 진화론의 찰스 다윈의 기일이어서 의미가 더 깊다. 오늘,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과학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고 성찰의 시간을 가져 본다. 특히 지금은 R&D 예산 삭감과 의대 증원이라는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과학계의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때다. R&D 예산 삭감, 의대 증원이라는 원투 펀치에 크게 흔들리고 있는 과학계이지만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신뢰 깨고도 사과조차 없는 정부

정부 R&D 예산 삭감안 발표로 가장 타격을 받았고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것은 정부와 과학기술자 간 신뢰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책의 기반이 신뢰라고 볼 때 책임 있는 누군가가 한번은 미안하다고 사과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필자는 한시간 이상의 길을 운전해서 출퇴근하는데 그동안 라디오를 듣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다. 채널을 일일이 옮길 수 없으니 광고도 자주 듣게 된다. 의대 증원 문제 때문인지 한동안 보건복지부장관의 광고가 종종 들렸는데 얼마 전에는 과기정통부장관의 광고도 들렸다. 대학원생 대통령 장학생을 120명 새로 선발해서 파격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1200명도 아니고 120명. 후속기사를 찾아보니 지난주 선발이 끝났는데 경쟁률이 25대 1이었단다. 100명 중 4명의 사기진작을 위해 96명의 들러리가 필요했을까.

과학계 우대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지난해 못된 카르텔로 몰아 R&D 예산을 일괄 삭감한 후 120명의 새로운 대학원생 대통령 장학생을 선발했는데 예산이 30억원이란다. 삭감 규모는 4조원 이상이었으니 이 정도면 광고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사과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잘 하겠다고 약속만 했어도 좋았다. 현장 분위기와 미래를 읽을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온다.

그렇게 R&D 예산 삭감 사태 후 입은 상처가 채 회복되기도 전에 이번에는 의대 증원 발표가 있었다. 국민을 위한 나은 방향으로의 의료개혁, 당연히 중요하다. 그런데 의대 증원이 가져올 여파에 대해 광범위하게 예측하고 문제를 예방하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특히 이공계 인재양성의 왜곡은 참으로 심각할 것으로 우려된다.

필자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의대 증원의 다른 면은 기초과학을 포함한 이공계의 위기 심화라고 지적하면서 의대 교육환경 개선도 중요하지만 이공계에 진출하는 인재들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파격적인 지원책을 올해 당장 내놓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을 전제로 수험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도 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최상위권 학생들이 의대로 향할 때 과학을 진짜 좋아하고 즐기면서 할 수 있는 학생들은 오히려 이공계 대학으로 진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10년 20년 후 세계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는 과학기술자로 성장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인터뷰 기사 제목이 ‘지금이 대한민국 과학계 리더 될 절호 기회’라고 뽑혔다. “다 망하게 생긴 과학계에 뛰어들어 리더가 되는 절호의 기회를 잡으라니 무슨 소리야” 하는 생각에 기사를 더 읽게 만드는 일종의 낚시였던 거 같다.

과학기술계, 그리고 R&D 예산 문제가 살짝 희화화되기는 했지만 이만큼 국민의 관심을 받게 되다니,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하는 때가 아닐까 싶다.

정부는 2024년 R&D 예산 삭감 후 2025년에는 다시 전에 없던 규모로 증액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는 이러한 R&D 예산 증액이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라고 했다. 현장에서도 그렇게 생각할까? 삭감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는데 증액이 일관된 입장이었다면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저렇게 이야기하고 어느날 느닷없이 카르텔 운운하며 감액하지 말란 법이 없지 않겠다 싶은 것이다. 차라리 R&D 예산 삭감은 개선 필요성은 있었으나 실행 면에서 좀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정부 방침에 솔깃해진 이유

너무 순진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래도 다시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은 최근 밝힌 향후 정부 R&D 지원 방침이 이전에 없던 바람직한 내용을 다수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적시에 필요한 만큼 신속히 지원하기, 그동안 힘들었던 부처간 벽 허물기, 최초 최고 연구에 과감히 투자하기, 이공계 대학원생 연구생활장학금 도입, 신진연구자 정착 연구비 대폭 확대 등이 대표적인 제안들이다. 대통령실에 새로운 과학기술수석 제도가 도입되고 이런 제안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서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기를 간절히 희망해 본다.

이러한 정부 방침 설명을 위해 국가과학기술심의회 산하 위원장들을 모아놓고 가진 설명회에서 필자는 살짝 가슴 두근거림을 느낄 정도였다. 이 정도로 지원해 준다면 정말 즐겁게 과학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R&D 지원방침에서 고려돼야 할 것들

이제 2025년 예산 계획에서 아직도 비어 있을 수 있는 부분이 개선되기를 기대하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짚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필자는 기초연구자이기에 기초연구 R&D에 한정해서 얘기하려고 한다.

정부는 2025년 예산 증액을 이야기하면서 복원은 아니라고 못박았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복원 필요의 정서가 아주 크다. 이유 없이 삭감된 예산 부분의 복원이 있어야 실질적인 신뢰회복도 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 계속 과제들에 대해 기존에 협약에서 약속했던 예산을 알 수 없는 이유로 10% 또는 20% 일괄 삭감했는데 이 부분은 반드시 복원되어야 한다. 연구비 나눠먹기라는 오명을 쓰고 일몰되어 버린 소규모의 연구들에 대한 지원 사업들은 재고되어야 한다.

아름드리나무로 자라날 튼실한 새싹을 한눈에 알아볼 수 없기에 수많은 씨앗을 폭넓게 뿌려서 정성껏 가꾸듯이 기초연구에 대해서는 다양하고 지속적인 연구지원이 중요하다는 걸 잊으면 안된다. 코로나 팬데믹에서 인류를 구원한 RNA 백신은 어느날 갑자기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진행한 기초연구의 결과물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지원 정책 변화의 가장 큰 피해자는 소규모 연구를 하던 중견 연구자, 소액 과제를 하던 비전임 연구원, 비전임 연구교수, 그리고 보호학문 전공자와 지역우수연구자, 연구에 매진하던 젊은 연구자들이었다. 120명 대통령 장학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들에 대한 지원이 복원되어야 우리나라 학문생태계의 건강성이 회복될 것이다. 명분상 같은 이름으로 복원할 수 없다면 실질적으로라도 해야 한다. 새로운 개인 연구의 형태뿐 아니라 대학연구소에 대한 블록펀딩 지원사업도 충분히 고려할 만하다. 이왕 하는 김에 수월성도 추가하면 정부 방침과도 부합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들은 애초부터 R&D 예산 삭감의 철퇴를 맞을 대상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지만 여성 연구자 지원 홀대 문제도 개선해야 한다. 한국연구재단의 2023년 대학연구활동실태 조사 분석 보고서에 의하면 전국 4년제 대학교원에 대한 중앙정부 연구비의 경우 수혜율과 1인당 연구비에서 남성 전임교원이 여성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민간 연구비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1인당 논문수는 동일한 수준을 보였다는 점이다. 게다가 저술 발표 면에서는 오히려 여성의 1인당 건수가 남성보다 많았다.

이러한 통계수치는 확실하게 여성 전임교원이 연구비 수준의 면에서 훨씬 불리한 여건에 처해 있음에도 동등 또는 더 나은 수준의 연구 실적을 생산해 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한 연구실적을 내기 위해 적은 연구비로 더 많은 수고를 했을 여성 전임 교원들을 점진적으로라도 형평의 수준에 맞게 끌어올려야 마땅하다.

이준호 서울대 교수 자연과학대 생명과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