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기 전 국회의장이 말하는 ‘국회의장 중립성’은
“공관 앞에서 아침저녁 시위해도 합의 위해 표결 지연”
민주당 첫 과반 의석때 의장 맡아 “한 번도 당 문턱 안 밟아”
“국회법 준수 충실해야 … 여야 합의하도록 수없이 종용”
“의회민주주의는 숫자 아닌 대화와 협상으로 풀어가는 것”
“여야 합의 국가보안법 처리 못해” … 초선·중진 역할 강조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장후보 선거를 앞두고 ‘국회의장의 중립성’ 논란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전직 국회의장의 ‘중립적인 국회 운영’에 관심이 모아진다. 17대 국회 전반기에 열린우리당(민주당 전신) 소속이었던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국회)법이 그렇게 (국회의장이 중립을 지키도록) 바뀌었으면 법 정신에 실질적으로 충실해야겠다는 자세를 가졌다”며 “국회의장을 하면서 한 번도 여당의 문턱을 밟은 적이 없다. 철저하게”라고 했다. 이어 “모임을 주최하면 여야를 거의 같이 했지, 여당 쪽에 치우친 적은 없다”고도 했다.
16일 국회도서관에 따르면 김 전 의장은 ‘대한민국 국회를 말하다’ 구술총서를 통해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2002년에 국회법이 바뀌어 국회의장의 중립성 강화를 위해 의장이 탈당하도록 한 규정이 적용되기 시작한 이후 처음 치러진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확보했고 당시 동교동계 좌장인 김 전 의장이 ‘국가 서열 2위의 자리’를 맡게 됐다. 민주노동당이 10석, 새천년민주당이 9석을 확보했다. 당시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 이후 대규모 역풍이 불면서 유권자들은 대규모 표를 민주당에 몰아줬고 152석으로 진보진영의 첫 과반 확보가 가능해졌다. 김 전 의장은 “당시 제가 접촉한 국회의원들은 대부분 야당 의원들이었다”며 “국회가 법을 바꾸면서까지 의장이 자기 소속 정당을 탈당하도록 한 정신을 충실하게 지키도록 노력하는 것이 도리”라고 했다. “의회민주주의는 숫자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고 여야가 대화와 협상을 통해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풀어나가는 것이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다”고도 했다.
◆여야 합의한 사립학교법을 직권상정한 이유 = 당시엔 과반 의석을 가진 여당이 의장에게 관례적으로 ‘직권상정’을 강하게 압박했다. 김 전 의장은 “여야 원내대표단이 합의해 어떤 과정을 밟으려고 하면 너무 기간이 길어지니까 여러 가지 국회 의사일정 진행상 신속하게 하기 위해 의장보고 직권상정 해달라고 (여당이) 하는데 직권상정한 것은 사립학교법 하나였다”며 “그 안에 여야가 협상해서 합의하도록 수없이 종용했다”고 했다. 그는 “임기 초반에 그 법안이 과반수이상의 국회의원 서명에 의해 합법적으로 제출됐는데 임기말(전반기 국회의장, 2006년 5월)까지 그것을 처리 안 할 수 없어서 부담이었고 그래서 처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한 겨울에도 국회의장 공관에 시민사회 단체들이 와 가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항의를 하고 고향에 내려갈 때는 피켓을 들고 거기까지 따라와서 항의를 했다”면서 “이런 항의를 받으면서도 합의를 도출해내기 위해 계속 지연을 시키며 정부(와 국회) 사이에서도 역할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야 전권을 가진 협상 대표들이 합의를 도출해서 국회의장실에서 여야가 발표한 그 안을 직권상정한 것”이라고 했다.
◆여야 합의했지만 초선 반대로 무산된 국가보안법 = 김 전 의장은 “여야가 거세게 충돌하는 법안, 입장이 확연히 다른 법안에 대해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면서 “정치할 분들이 알아야 되겠다 생각하는 한 가지만 지적하겠다”고 했다. 국가보안법 개정과 관련해 여야합의가 민주당 내부 의총에서 깨진 얘기였다. 김 전 의장은 “국가보안법 협상은 여야 협상 정치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고 우리 정치에서도 중요한 고비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며 “현역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이 매듭을 풀지 않으면 앞으로의 여러 문제들을 풀어가는 데 장애가 될 것이므로 그것을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고 공감대를 형성해 합의를 했다. 어느 한쪽만 만족해서는 안 되고 양쪽이 다 얻는 거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어 “당시 야당이 잘못했다기보다는 여당(민주당)이 처리를 잘못했다. 합의된 게 빛을 보지 못했다”며 “국가보안법을 그때 해결했어야 되는데 그것을 처리하지 못한 것에 대해 대단히 아쉽다. 제 정치 인생에서 제일 아쉽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다수당이니까 밀어붙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우리 의사만 100% 관철하려고 해서는 되는 것이 아니다”며 “(야당과 합의를 이룬)원내대표가 당 최고위원회에도 (합의내용을) 보고하고 이의 없이 수용됐는데 의총에서 강하게 저항하는 사람들이 릴레이식 발언을 하면서 국가보안법을 완전 폐기하도록 주장하니까 여야가 오랫동안 협의해서 합의안을 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처리하지 않고 없던 일이 됐다”고 했다. 이어 “새로 정치를 시작한 젊은 세력들이 많았다. 국회의 70%가 초선이었다. 가부를 물어 의사결정을 하면 그렇게 된다는 쪽이 훨씬 많았는데 의총이 열리면 강경하게 나서는 세력들에 부딪혔다”면서 “중진이면 의총에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중단을 딱하니 시키고 의총에서 합의사항이 받아들여지도록 적극적인 역할을 했어야 했다”고 했다. 새롭고 국회로 들어온 초선의원들과 중진들의 역할론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당시 108명의 열린우리당 초선의원들은 ‘108번뇌’로 불렸다. 탄핵역풍으로 쉽게 국회입성에 성공했다는 의미로 ‘탄돌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