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해외에서 성공하려면 돈보다 신뢰 쌓으세요"

2013-11-04 10:55:16 게재

'요하네스버그의 오뚝이' 김진의 코리언모토스페어스 사장

혹시 일자리를 찾고 계십니까. 그런 당신은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닌지요. 눈과 귀를 활짝 열고 글로벌 무대를 살펴보십시오. 지구촌 곳곳에서 '비즈니스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개척자들이 많습니다. 그 생생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실래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더군요.


<사진: 김진의 코리언 모토 스페어스 사장이 한국 중소기업 제품들을 남아공 시장에 소개하기 위해 마련한 '쇼룸'에서 직원들과 스탠딩 미팅을 하고 있다.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남아공 지회장을 맡고 있는 김 사장은 우수한 국산 중소기업제품들이 아프리카 시장으로 진출하는 데도 도움을 주고 있다.>

세상에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 자기 일에 대한 긍지와 자존감으로 충만한 사람만큼 성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김진의 코리언 모토 스페어스 사장은 일곱 번이나 정비공장 사업을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덟 번째 일어나서 다시 똑같은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자기 일에 대한 사랑과 확신, 자긍심 이었다. 그 무대가 한국이 됐던 아프리카가 됐던 오로지 외길로 자동차 정비의 길을 고집한 김 사장의 뚝심이 오늘의 성공을 가져온 요인이었던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바쁘다. 김 사장과 마주 앉아 이야기할 짬을 내는 게 쉽지를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일을 하고 있는 김 사장의 사무실로 다짜고짜 쳐들어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결재서류와 씨름하고 있는 김 사장을 소파로 불러 앉혀 놓고 잠깐 인터뷰를 했다.

"나의 젊은 시절은 지긋지긋한 가난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배가 고프면 낫을 들고 산에 올라가 송피를 벗겨 먹었어요.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을엔 배추 밑동을 깎아먹기도 했지요. 봄철엔 찔레나무의 야들야들한 새 순을 꺾어 먹었습니다. 학교 창고에서 분유를 훔쳐 먹고는 며칠 동안 설사로 고생을 했던 기억도 납니다. 미국에서 구호식량으로 배급해 주던 물건이었지요. 둘째 형님이 월남전에 나갔다가 전사를 하셨어요. 그 형님 앞으로 나온 보상금으로 여덟 마지기 논을 장만하면서 형편이 조금 풀렸지요.

남은 거라고는 근근이 부지하고 있는 목숨 하나뿐이었어요. 이거라도 어떻게 해서 가족들에게 돈을 남기는 방법은 없을까. 우리 집이 신림동에 있었습니다. 그 곳에 고가차도가 하나 있었어요. 걸어서 그 위를 지날 때마다 저 차도 밑으로 떨어져 죽으면 보험금이 얼마나 나올까를 생각했어요. 아프리카 행은 죽기 전에 잡은 마지막 지푸라기 같은 것이었습니다. (주)대우 계약직으로 취업을 해서 보츠와나 현장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이 비행기가 추락이라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차에 치어 죽는 것보다 보상금이 많이 나올 거고, 적어도 마누라 새끼들 밥은 굶지 않겠지 하는 생각까지 정말로 했었답니다."

김 사장은 보츠와나에서 불과 2년 동안 두 번이나 정비공장 사업에 실패를 했지만 남아공으로 와서도 다시 정비공장 사업을 시작한다.

"1991년 6월 요하네스버그 공항 방면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초입의 브르마 지역에 있는 주유소 한쪽에 카센터를 차렸어요. 영주권이나 워크 퍼밋(노동 허가서)도 없이 불안하게 시작한 일이었지요. 전혀 영업이 되지 않았습니다. 6개월 만에 처음 동업을 제안했던 이동현씨가 두 손을 들고 먼저 떠났습니다. 나도 1992년 초 뉴타운 JP스트리트의 주유소로 카센터를 옮겼지요. 동포 사업가가 운영하던 주유소였기 때문에 조금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김 사장을 더욱 괴롭게 했던 건 영주권 문제였다. 계속 브로커들에게 돈만 뜯겼다. 백인과 흑인, 인도인, 중국인 등 여러 브로커들을 동원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브로커를 한 번 쓸 때마다 1000달러 정도가 들어갔다. 늘어만 가는 건 빚이었다. 1992년 8월엔 불법 체류자로 체포를 당해 감옥에 가기도 했다.

"이민국에서는 남아공을 떠나는 비행기 티켓과 2만 랜드 보석금을 내면 석방해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에서 그 돈을 마련해 준 덕에 하루 만에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급한 대로 우선 보츠와나로 몸을 피했지요. 보츠와나의 노동허가증 있었거든요. 그러고는 다음 날 곧바로 다시 남아공으로 재입국을 했습니다. 불법 체류상태에서 일을 하려니 훨씬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어요. 요하네스버그 요벨 지역의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차량을 정비해주는 일을 시작했지요."

그때 김 사장의 부인 임순옥 여사가 사장실로 들어선다. 임 여사는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한국인 직원 10여 명의 먹거리를 챙겨주기 위해 가끔 회사 나들이를 한다. 현지인 요리사가 있었지만 임 여사의 손맛을 필요로 하는 음식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쁜 김 사장을 붙들고 이야기를 하는 게 눈치가 보이던 참이었다. 사무동 건물에 차려진 쇼룸으로 자리를 옮겨 임 여사에게 후속편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청했다. 사방 벽을 채운 격자모양의 선반들 위에 자동차 부품들이 진열돼 있었다. 우리나라 중소기업 제품들을 남아공 시장에 소개하는 공간이었다. 쇼룸의 큼지막한 회의용 탁자에서 임 여사의 회고담을 들었다.

"처음 남아공에 왔을 때 고생한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쌀 살 돈이 없어서 고구마나 감자를 삶아 먹거나 밀가루로 수제비를 해 먹을 정도로 곤궁했어요. 어쩌다 쌀 한 자루 사다놓고, 차에 기름 한 탱크 가득 채워 넣으면 마냥 든든하고 행복했어요. 정비공장 만으로는 생활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어요. 당시 한국 신발제조업체인 신나가 남아공에 공장을 차려 생산 활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신나 공장에서 신발을 받아다가 노점에서 파는 일을 시작했어요. 중국산 슬리퍼 등 싸구려 신발들도 마구 쏟아져 들어올 때였어요. 중국 물건들도 박스로 받아다가 팔았습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남쪽으로 70㎞ 떨어진 베르내껭이란 곳에서 토요일마다 좌판을 벌였습니다. 흑인들이 많이 모이는 OK 쇼핑몰이란 곳이 있었어요. 그 앞 노상에 물건들을 풀어놓았지요. 그때 우리 딸이 중학교 1학년, 아들이 5학년 때였어요. 그 어린 아이들까지 토요 좌판장사에 데리고 다녔습니다. 신발을 훔쳐가는 친구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감시하는 눈이 하나라도 더 필요했던 거지요."

때마침 고대하던 자영업 워크 퍼밋이 나왔다. 이젠 떳떳하게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었다. 1996년 6월 백인거주 지역인 이든벨에 집을 얻었다. 요하네스버그의 장안동 격인 반리백 애비뉴에 제대로 된 정비공장도 열었다. 'JIN 모터스'란 간판을 내걸고 자동차 정비와 중고차 및 타이어 판매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처음 신림동에 완도사 카센터를 개업한 것을 시작으로 보츠와나 로바찌의 서울 일렉트리컬 미캐니컬 서비스, 삐짜니의 바롤롱 모터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로 들어와서는 브르마와 뉴타운 JP스트리트, 요벨의 아파트 지하 주차장 정비 일에 이어 일곱 번째 정비공장을 차린 것이었다. 남아공에 진출한 이후 자영업 워크 퍼밋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첫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1997년 11월 또 사단이 났습니다. 그때 연말 휴가철 대목을 보기 위해 창고에 타이어를 잔뜩 들여 놨을 때였어요. 보츠와나에서 한국타이어 대리점을 하는 김주현 사장님으로부터 타이어 200여개를 외상으로 들여다 놓았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싹 도둑맞은 거예요. 공장 함석지붕을 뚫고 들어왔더라고요. 가게가 통째로 털린 거지요."

일곱 번째 넘어짐 이었다. 이제 막 사업이 자리를 잡으려던 즈음에 또 다시 큰 타격을 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주섬주섬 여덟 번째로 일어섰다. 기존 공장에서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대로변에서는 쑥 들어간 이스트리 란 지역의 후미진 곳에 공장을 다시 열었다. 그나마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즈음 영주권을 얻게 된 것이었다. 2001년 들어서면서부터는 새로운 활로도 뚫리기 시작했다. 오늘의 코리안 모터 스페어스 를 이룩하게 된 부품판매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 계기였다.

"이든 클러치라는 자동차 부품가게를 하는 레바논 친구들이 있었어요. 이 친구들이 어느 날부터 한국 자동차 부품을 이것저것 구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서울로 연락을 해서 부품을 공급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주문 물량이 줄어들기 시작하더라고요. 나중엔 아예 끊어졌습니다. 다른 거래선을 잡았던 거지요. 그때부터 우리가 직접 자동차 부품 판매 사업에 뛰어들었어요. 마침 레바논 친구들이 하는 이든 클러치 옆에 빈 점포가 하나 있었어요. 포르투갈 여자가 소유한 건물이었습니다. 2001년 초 그곳에 세를 얻었습니다. 카센터 겸 부품가게인 코리안 모토 스페어스를 개업한 거지요."

사람의 때와 하늘의 때가 다른 것일까. 마침내 하늘의 때가 온 것일까.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흥부네 집에 어느 날 갑자기 금은보화 가득 든 박 덩어리 굴러 들어오듯 김 사장의 사업도 하루아침에 활짝 풀리기 시작했다.

"남편이 부품가게를 냈을 무렵 갑자기 남아공 시장에 현대차 부품 품귀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부품공급 창구였던 현대차 대리점이 2001년 중반 무렵 부도를 냈기 때문입니다. 현대차 대리점을 하던 현지인 사장이 콩고 금광에 투자를 하다가 쫄딱 망한 겁니다. 자금 회수가 안 되니까 현대차 본사에서 자동차는 물론 부품공급까지 끊어버린 거지요. 현대차들이 1994년부터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2000년대 초반에는 남아공에 깔려 있는 현대차들이 많았지요. 그 차들이 고장이 나도 부품 조달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겁니다. 부르는 게 값이었지요. 그때 남편은 공장을 비우기 어려웠기 때문에 제가 한국에 왔다 갔다 하면서 부품을 실어 날랐습니다. 타이밍 벨트, 밸런싱 벨트, 연료 센서, 온도 센서 등을 보따리로 사서 날랐어요. 비행기 수하물 오버차지를 물고도 수지가 맞을 정도였습니다. 사업이 커지다보니 가게가 비좁아 지기 시작했어요. 그 때 지금 우리 회사가 들어와 있는 반리백 애비뉴 124번지 건물을 사서 들어왔습니다. 이후에도 정말 신바람이 날 정도로 영업이 잘 됐습니다. 2년도 안돼서 부채를 싹 갚아버렸으니까요. 이든벨 124번지가 2000㎡나 되는 데도 금방 비좁아 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앉아서 이야기 하고 있는 이곳 126번지 3000㎡까지 사들이게 됐지요. 올해 초 부품 창고를 새로 지어 입주를 했습니다. 이젠 한 숨 돌릴 만하지요."

급한 업무를 마쳤는지 김 사장이 쇼룸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마치 그 공간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처럼 쇼룸을 빙 둘러본다. 그의 표정이 자못 득의만만하다. 뭔가 스스로 한 일에 대해 한껏 만족했을 때만 나오는 그런 모습이다.


<사진:백인들이 물러난 요하네스버그 다운타운은 이제 흑인들의 차지가 됐다. 급속한 슬럼화 및 높은 범죄율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우리나라 중소기업 제품들을 전시하고 판매하고 상담도 하는 종합비즈니스 창구로 마련한 공간입니다. 자동차 부품은 물론 다른 중소기업제품들도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우리나라 중소기업들과 남아공의 바이어들을 연결시켜주는 공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곳 소비자들도 한국산 제품들이 우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중국산 보다 조금 비싸더라도 한국산을 찾는 소비자들이 많아요. 남아공 소비자들에게 좋은 제품을 소개해 주는 것도 이곳에서 돈을 벌고 있는 사람으로서 해야 하는 도리이기도 합니다. 내가 월드옥타 남아공 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이곳 쇼룸은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포 경제인들이 남아공 진출을 원할 때 사무공간으로도 이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창고 앞마당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직원들이 참숯 조개탄을 피우느라 분주하다. 김 사장이 멀리 한국에서 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양고기 바비큐 파티를 마련한 것이었다. 불을 지피는 걸 보면 왜 기분이 좋아질까. 실내에서 편안하게 요리를 할 수 있는데도 굳이 밖에서 불편하게 고기를 구워 먹으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인간의 유전자 깊숙이 새겨진 원시시대 사냥꾼 본능 아닐까. 벌겋게 달궈진 불 위에서 양고기와 소시지가 익기 시작한다.


<사진:코리언모토스페어즈 창고에서 일을 하던 젊은 한국인 직원들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활짝 웃고 있다.>

큰 테이블에 열 대 여섯 명의 한국인 직원들이 둘러앉았다. 그 중엔 아직 대학생 티가 나는 젊은 남녀들이 너 댓 명이나 끼어 있었다. 김 사장님, 저 젊은 친구들은 누군가요.

"현재 우리 회사에서 인턴십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에요. 젊은 여성 두 명은 코트라(KOTRA) 글로벌 마케팅 인턴 프로그램으로 온 친구들입니다. 세희씨는 수원대 글로벌비즈니스학과 출신이고, 여정씨는 한국외대 헝가리어과를 졸업했어요. 내년 2월까지 6개월 동안 이곳에서 일을 배우게 됩니다. 윤재는 한국해양대 무역학과 졸업반이에요.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의뢰로 이곳에서 석 달 동안 인턴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관심을 갖고 이곳까지 온 기특한 젊은이들이죠. 인턴과정을 마친 뒤 계속 식구로 남겠다는 친구가 있으면 한 두 명은 채용할 생각입니다."

잘 익은 고기가 테이블로 올라온다. 이런 자리에 어찌 한 잔 술이 빠질쏘냐.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인다. 일하면서 쌓인 스트레스도 훌훌 날려버리는 자리다. 양고기가 맛있게 익고, 사람들의 정도 따스하게 익어가고,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의 밤도 푸근하게 익어만 간다. 맛있는 세상이다.

박상주 언론인·오지여행가 sangjoo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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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현주 기자 hjbeo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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