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7전8기로 자동차정비 부품사업 꿈 이뤘어요"

2013-10-28 09:26:54 게재

'요하네스버그의 오뚝이'김진의 코리언모토스페어스 사장

혹시 일자리를 찾고 계십니까. 그런 당신은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닌지요. 눈과 귀를 활짝 열고 글로벌 무대를 살펴보십시오. 지구촌 곳곳에서 '비즈니스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개척자들이 많습니다. 그 생생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실래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더군요.

 

미국 애리조나 사막에 사는 호피 인디언들의 기우제는 놀라운 신통력을 지녔다. 그들이 기우제를 지내기만 하면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100% 비가 오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다. 일념으로 뭔가를 갈구하면 궁극에는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일이란 게 계속 물고 늘어진다고 성공할 수 있는 걸까. 세상살이엔 '삼세번'이란 불문율이 존재한다. 세 번 정도 도전해서 실패하면 그 건 그 사람의 길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게 삶의 상식이다. 7전8기 같은 말은 소설 혹은 위인전 속에나 등장하는 말이다. 실제로 장삼이사들의 삶 속에서는 그런 사례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아프리카에 발을 디딘지 26년, 남아공 생활 26년째인 김진의(60) 코리언 모토 스페어스(KOREAN MOTOR SPARES) 사장은 그런 7전8기의 승리를 거둔 인물이다. 자신이 지닌 자동차 정비 기술 하나만 믿고 모두 일곱 차례나 정비공장을 차렸다가 들어먹은 뒤 여덟 번 만에 화려한 결실을 거둔 것이다. 그것도 한국에서 한 번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보츠와나에서 두 번, 남아공에서 네 번 등 머나먼 이국땅에서 겪은 뼈저린 실패들이다.

아무리 철저하게 깨어지고 부서져도 다시 벌떡 일어나 한 가지 목표를 향해 꿋꿋이 나아가는 불굴의 터미네이터처럼, 김 사장은 넘어질 때마다 오뚝이처럼 벌떡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집요하고 우직하게 외길로 자동차 정비 공장을 다시 시작했다. 여덟 번 만의 시도 끝에 그는 결국 연간 700만 달러 정도의 매출을 올리는 자동차 정비 및 부품판매 기업을 일구게 된다. 김 사장이 경영하는 코리언 모토 스페어스는 남아공에 직영점 2곳을 포함한 5개의 협력사, 마다가스카르 직영점 두 곳, 서울사무소 등을 거느린 알짜 기업이다. 지금은 자동차 부품판매 쪽으로 주력업종이 바뀌었지만 정비사업은 여전히 김 사장 사업의 주요항목을 차지하고 있다.
 


<김진의 코리언 모토 스페어스 사장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장안동 격인 이든벨 반리백 애비뉴에 있는 자신의 회사 앞에서 한국인 직원들과 함께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떨쳐버리기 위해 아프리카로 왔다는 김 사장은 연간 7전8기의 도전 끝에 연간 700만 달러 정도의 매출을 올리는 큰 기업을 일구어 냈다.>

김 사장은 자신의 사업 뿐 아니라 세계한인무역협회(World-OKTA) 남아공 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아프리카 진출을 원하는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을 돕는 일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특히 최근엔 한국산 중소기업 제품들을 남아공 바이어들에게 소개하는 쇼룸을 개설했다. 우수한 국산품들을 아프리카 시장으로 진출시키는 창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자신이 판매하고 있는 자동차 부품들도 95% 이상이 '메이드 인 코리아'다.

한눈에 딱 요하네스버그의 장안동 쯤 되는 동네였다. 요하네스버그 이든벨 반리백 애비뉴 왕복 4차선 도로 양편에는 자동차 대리점과 부품가게, 중고차 판매점 등이 늘어서 있었다. 그 가운데 'KOREAN MOTOR SPARES'라고 쓰인 간판이 유난히도 두드러져 보인다. 노란 바탕에 청색 글자가 만들어내는 강한 원색의 대비 효과에다가 한 글자 한 글자가 대문짝만한 크기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 사장이 7전 8기의 성공스토리를 만들어 낸 무대였다. 모두 5000㎡ 정도의 대지위에 들어선 코리안 모토 스페어스는 도로에 접한 사무동 건물과 그 뒤편 마당의 창고 건물 다섯 개 동으로 구성돼 있었다.
 


<코리언모토스페어스 접수 데스크에서 직원들이 고객들을 맞고 있다. 코리언 모토 스페어스는 남아공에 2개의 직영대리점과 6개의 협력사를 두고 있다.>

사무동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여섯 명의 현지인 직원들이 긴 접수 데스크에서 고객들을 맞고 있었다. 직원들 등 뒤 쪽 벽에는 현대와 기아차, 삼성, 쌍용 등 국산 자동차들을 선전하는 광고물들이 눈길을 끌고 있었다. 매장 오른쪽에 있는 쇠창살문을 통해 접수 데스크 안쪽으로 들어섰다. 접수 데스크 바로 뒤편은 사무실 공간이었다. 사무동 건물 뒤편에는 커다란 창고건물 다섯 채가 나란히 들어서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운데 창고는 셋 중에서 규모도 제일 크고,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산뜻하고 깨끗한 건물이었다. 창고 안에는 높다란 천장까지 크고 작은 자동차 부품들이 선반위에 가지런하게 정렬돼 있었다. 그 사이로 직원들이 분주하게 물건들을 나르고 있었다.
 


<올해 초 신축한 코리언 모토 스페어스 창고 안에서 현지인 직원이 부품을 정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판매되는 제품의 95%는 '메이드 인 코리아'다.>

뜻밖에도 사장실은 창고 안에 꾸며져 있었다. 자동차 부품사업의 가장 핵심적인 현장은 창고다. 그곳에 사장실을 꾸몄다는 건 사장이 직접 현장에서 뛴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었다. 사장실로 들어서자 '네가 큰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고 쓰인 벽면의 액자가 손님을 맞는다. 필시 방주인의 염원을 담뿍 담은 것이리라. 김 사장이 아프리카까지 온 사연은 무엇일까. 아담한 소파에 앉아서 김 사장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충남 당진의 빈농에서 6남4녀 중 아홉 번째로 태어났다. 시집을 간 큰 누님을 제외하고 할머니와 부모님 등 열두 명의 대식구가 손바닥만 한 땅을 부치며 살았다.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면서 사는 정도였다.

고등학교를 갈 형편은 되지 않았다. 당진중학을 졸업한 뒤 서울로 올라왔다. 기술이라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대한건설협회 산하의 직업훈련소에 들어가 자동차 정비 기술을 배웠다. 6개월짜리 과정이었다. 직업훈련소를 마친 김 사장은 또래 청소년들이 학교에 다닐 때 공사판을 전전했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방송통신고 과정을 밟았다. 1974~1977년 강원도 신철원 20사단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 일찌감치 배워두었던 자동차 정비 기술은 김 사장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1978년 현대건설에 입사를 한 것이다. 취업으로 생활이 안정되면서 1979년 6월에는 지금의 아내인 임순옥56()여사와 결혼도 하게 된다. 당시 한창이던 중동 건설 붐은 그에게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입사 첫해인 1978년 사우디 도로공사 현장에 파견됐어요. 크레인과 불도저, 트레일러, 덤프트럭 등 중장비를 수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1980년엔 쿠웨이트 하수처리 공사장과 1982년 리비야 항만공사, 1984년 이라크 철도건설현장 등에서 일을 했습니다. 몫 돈이 생겼지요. 그러다보니 개인사업이 하고 싶어졌어요. 1985년 12월 현대건설 그만 둔 뒤 이듬해 1월 신림동에 있던 '완도사'라는 카센터를 인수했어요. 그런데 3월말에 교통사고를 냈습니다. 서울대 쪽에서 난곡동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어요. 기아 봉고트럭 몰고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더라고요. 남의 집 담장을 들이박으면서 겨우 차를 세웠습니다. 부서트린 집 수리비에 병원비 등으로 카센터랑 중동에서 벌어온 돈을 몽땅 날렸지요. 나도 크게 다쳐서 석 달 동안 목발 신세를 졌지요. 그때 병원비가 없어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했습니다. 다리 발가락뼈를 맞추는 재수술을 해야 하는 데 그럴 형편이 아니었어요."

잠시 구멍가게에 과자와 음료수 등을 배달하는 리어커 행상일을 하다가 (주)대우의 문을 두드렸다. 중동현장 근무 경력 덕에 해외 계약직 사원으로 입사를 할 수 있었다. 당시 대우는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 기치아래 지구촌 곳곳에서 공격적으로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인사담당자가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어디든 보내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아프리카 쪽에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그때는 아프리카 가는 비행기 타고 가다가 떨어져 죽으면 보험금이 많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1987년 6월 아프리카 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내가 파견된 곳은 보츠와나 세로이~오라파 214㎞ 구간의 도로공사 현장이었어요. 그곳에서 중장비 정비공장 부품창고에서 부품 출납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뙤약볕에서 일하는 동료들에 비하면 참 편한 일이었습니다."

사업본능을 타고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걸까. 김 사장의 마음속에 또 다시 개인 사업을 벌여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사정을 살펴보니 자신의 자동차 수리 기술이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당시 전남 완도 사람인 박성태씨와 전북 출신인 김기태씨, 그리고 나랑 셋이서 의기가 투합했어요. 박성태씨는 발전기와 모터 쪽, 김기태씨는 중장비 하체 분야, 나는 엔진 쪽 전문가였지요. 세 명이서 자동차 정비공장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살더라도 같이 살고, 죽더라고 같이 죽자며 결의를 다졌지요. 1년 반 만에 대우를 그만 뒀습니다. 1988년 10월 보츠와나 수도인 가보로네에서 60㎞ 떨어진 로바찌라는 지방도시에 '서울 일렉트리컬 미캐니컬 서비스'란 이름의 정비공장을 차렸습니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두 달 만에 깨져버렸어요. 동업자 박성태씨는 먼저 포기하고 한국으로 들어갔어요. 서로의 갈등이 빗어진 거지요. 또 저는 남은 동업자와 이상 다투기 싫어서 그냥 빈 몸으로 나왔습니다.

당시 보츠와나에 그루터기란 선교단체에서 운영하는 기술학교가 있었어요. 현지인 불우 청소년들을 데려다가 편물과 목공 등 기술교육을 시킨 뒤 취업을 주선하거나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지요. 로바찌의 정비공장 동업을 그만 두고 일거리를 찾던 중에 선교사님 한 분이 그루터기 기술학교 근처에서 카센터를 내면 어떠냐고 그러시더라고요. 당장 기술학교에서 사용하는 차량정비를 편하게 맡길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중에 학생을 정비공장에 취업시킬 수도 있다는 계산을 한 것이죠. 1989년 7월 기술학교에서 가까운 바롤롱 지역의 삐짜니라는 작은 시골마을에 '바롤롱 모터스'라는 카센터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사업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사실 바보 같은 결정이었지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가끔 차를 맡겼지만 수리비 대신 염소나 닭, 곡물 등 농산물로 대납을 하더군요.

하긴 우리 아이들을 보낼 마땅한 학교가 없을 만큼 시골동네에 카센터를 차렸으니 될 턱이 없었지요. 결국 아이들은 공부 때문에 1990년 초 남아공으로 보냈습니다.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이국영 장로님께 아이들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드렸지요. 그런데 1991년 초 요하네스버그에서 이동현 집사님이 보츠와나로 저희를 찾아오셨어요. 아르헨티나에서 한때 봉제 사업으로 크게 하시던 분이었어요. 그때는 남아공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남아공을 알기위하여 노점에서 혁대 장사를 하고 계셨어요. 그러면서 새로운 일을 찾던 중에 이국영 장로님으로부터 내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거였어요. 요하네스버그에 가서 함께 카센터를 열자고 하더군요. 총각시절 신설동에서 대형차량 중고 부품 장사를 했기 때문에 차에 대해서 안다는 겁니다. 어차피 파리만 날리고 있던 상황이었으니까 솔깃했지요."

그러나 삐짜니를 떠나 남아공으로 가는 일이 간단치 않았습니다. 당장 그 많은 카센터 장비들을 싣고 갈 트럭이 없었어요. 고민 끝에 찾아낸 방법은 야반도주였습니다. 손님이 수리를 맡겨 놓고 일 년 가까이 찾아가지 않는 2.5t짜리 낡은 트럭이 하나 있었어요. 거기에 공구를 죄다 싣고는 저녁 7시 쯤 아내랑 삐짜니를 떠났습니다. 그 때가 1991년 3월 이었어요. 삐짜니 카센터를 시작한 지 1년 반 만에 접은 거지요. 보츠와나 국경도시인 마피킹의 출입국 사무소를 통과할 때는 정말 간을 조렸습니다. 다행히 그곳 직원들과 안면이 있었기 때문에 별 의심을 받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어요. 남아공으로 부속을 사러 왔다 갔다 할 때 가끔 음료수를 사주고 그랬거든요. 그 덕을 톡톡히 본 거지요. 삐짜니에서 요하네스버그까지 350㎞ 밤길을 내내 달렸습니다. 삶의 무대를 요하네스버그로 옮긴 거지요. 그 트럭은 나중에 보츠와나로 가는 지인을 통해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직원들이 자꾸 사장실을 기웃거린다. 눈치가 보여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기가 어려울 정도다. 재미있는 연속극 한 편이 끝났을 때처럼 다음 회를 기대하며 일단 자리를 정리해야 했다.

언론인·오지여행가 sangjoo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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