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산책

트랜젠던스

2014-05-27 09:50:29 게재

죽은 남편이 컴퓨터로 되살아날 수 있다면?

기계문명이 발달한 미래사회를 걱정하는 영화는 전에도 있었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는 ‘HAL9000’이라는 슈퍼컴퓨터가 우주선의 승무원들을 다 살해하고, 영화 ‘프로테우스4’에서는 슈퍼컴퓨터가 종족보존을 위해 인간을 임신시키기도 했다. 컴퓨터의 비약적인 발전이 미래사회에 대한 장밋빛 약속으로만 가게 되지는 않을 거라는 걱정, 사람보다 똑똑한 기계가 나타나면 인류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 될 거라는 공포가 이런 영화를 제작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가 죽어가고 있을 때 그 사람을 컴퓨터로 부활시킬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영화는 ‘인간의 뇌가 업로드 된 컴퓨터’가 가능하다는 전제하에서 출발한다.

초월을 뜻하는 ‘트랜센던스’
전 인류의 것을 합친 것 이상의 지성과 인간의 감정까지 지닌 슈퍼컴퓨터 ‘트랜센던스’. 영화 속에서는 윌 캐스터(조니 뎁)가 개발한 슈퍼컴퓨터의 이름이다. 감정을 지니면서도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고, 자의식까지 있는 완벽한 독립체인 트랜센던스. 말 그대로 인간과 컴퓨터의 능력을 초월하여 신의 경지에 다다른 사물이다.
아내 에블린(레베카 홀)은 남편이 되살아났다는 사실에 흥분하여 남편이 점차 거대해지고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보살피고 아껴주던 사람이 감시하고 통제하는 컴퓨터로 바뀌어버린 어처구니없는 현실. 에블린을 이해하고 싶은 트랜센던스는 그녀의 모든 생리적 변화와 꿈까지도 쉴 틈 없이 모니터한다. 사랑하는 이를 만지고 싶고, 느끼고 싶고, 위로받고 싶은 에블린. 하지만 그녀 곁에 윌은 없다. 그녀의 선택으로 시작된 인류 미래의 변화는 어느새 그녀 혼자서는 막을 수 없는 커다란 재앙으로 번져있었다.

시각적으로 확인되는 거대한 능력
영화는 트랜센던스가 구축한 사막도시 ‘브라이트우드’를 자세하게 보여준다. 카메라가 태양전지판 필드를 훑을 때는 그 거대함과 웅장함에 심장이 잠시 멎을 정도다. 시간이 흐르며 카메라가 브라이트우드 데이터센터 구석구석을 비출 때마다 트랜센던스의 능력은 점차 강해지고 가공할만한 위력을 지니게 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영화적 한계가 드러난다. 트랜센던스의 강력한 능력을 표현하기 위해 너무 공을 들인 나머지 영화는 개연성이나 감성적인 설득력을 놓친 듯 흘러간다. 시각적인 느낌은 정말 훌륭하지만 제작진의 기대처럼 ‘매트릭스’나 ‘인셉션’에서 느낄 수 있는 철학적 고민은 빈약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슈퍼컴퓨터의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UC버클리의 전기공학 및 신경과학 교수들이 영화의 기술고문으로 참여했던 만큼 전문가들은 영화 속 이야기가 가까운 미래에 현실화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컴퓨터로 업로드 된 남편과 사는 미래라니…….

기술 발전의 방향성 지켜야
지금까지도 PC보급과 인터넷 발전이 우리 삶에 편리함만 준 것은 아니었다. 컴퓨터 네트워크에서 자유롭게 정보수집이 가능한 권력자가 생긴다면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이 늘 감시당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 사실이다.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그 권력과 규제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인간의 본성을 알았던 영국의 윤리학자 제러미 벤담은 간수가 죄수들을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원형구조의 감옥 ‘팬옵티콘’ 건설에 평생을 바치기도 했다. 컴퓨터가 있건 없건 감시를 통한 타인 통제와 권력쟁취 욕구는 늘 있어왔다는 얘기다. 그러니 과학기술의 발전을 핑계대고 그 악영향에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말자.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과학기술의 한계를 극복할 수도 있고, 그 방향성을 바꿀 수도 있다. 일부 컴퓨터 몸을 가진 남편은 허락할 수 있지만 남편 흉내를 내는 컴퓨터는 좀 꺼림칙하지 않은가.

이지혜 리포터 angus70@hanmail.net
내일신문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