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여는 책 | 담바고 문화사

담배로 아로새긴 조선문화 y300년

2015-04-03 12:53:13 게재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3만원

담배 싫으시죠? 그럴 겁니다 암을 비롯한 만병의 근원. 게다가 피우는 사람만 손해를 보나요, 간접피해 또한 심각하지요. 뿐만 아니라 그 악취에 연기, 지저분하게 날리는 담뱃재까지.

그렇게 백해무익한 담배 이야기를 왜 하려 하느냐고요? 그래도 담배는 우리의 전통, 우리 삶에 빼놓을 수 없는 일부이니까요

흡연을 예찬하자는 게 아닙니다. 17세기 초 국내에 들어 온 뒤로 우리 문화와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담배, 그 역사를 한번 정리해 보자는 겁니다.

지은이는 성균관대 한문학과 안대희 교수. 정갈하면서도 또렷한 말투로 학문의 세계를 쉽게 풀어나가는 고급스러운 이야기꾼. 안교수가 소개하는 담배의 세계를 함께 거닐어 볼까요. 재미는 물론 보장합니다.

정조 '온 백성 흡연'을 꾀하다

조선 정조 20년(1796년) 11월18일 왕은 과거 시험의 한 과목인 책문(策問)에 어떻게 하면 모든 백성에게 담배를 피우게 할 것인가 그 방안을 제시하라는 문제를 내었다. 정조는 "온갖 식물 가운데 유익하기로 남령초만한 게 없다"면서 백성에게 그 혜택을 확산해야 함을 강조했다.

영명한 군주로 기억되는 정조가 이처럼 이상한 시책을 왜 시도했을까. 정조는 지독한 골초였다. 창덕궁 후원에서 담배를 재배해 신하들에게 나눠 주었다. 문신에게 시(詩) 창작을 시험할 때는 승지에게 담배를 한 대 피우라 하고 그 사이에 시를 짓도록 했다.

그는 골초가 된 이유를 스스로 밝혔다. 젊어서부터 다른 취미 없이 책읽기에만 몰두했더니 마침내 가슴속이 꽉 막히는 고질병에 걸렸다, 백약을 써도 효험이 없다가 담배를 피운 뒤로 가슴 막힌 것이 저절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의학 지식이 뛰어나 의학서 '수민묘전(壽民妙詮)'을 친히 편찬하기도 한 정조는 담배를 하늘이 내린 선물로 여겼다.

이 땅에 담배가 들어 온 때는 1609년쯤이었다. 포르투갈 상인이 일본에 전하고, 일본이 다시 조선에 수출했다. 그래서 그 이름도 포르투갈어 'tabaco'에서 비롯돼 '담바고'라 했다. 이를 또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담파고 담파괴 담마고 등 여나믄 가지로 새끼를 쳤다.

담배의 속성에 빗댄 남령초(南靈草=남쪽에서 온 신비로운 풀) 망우초(忘憂草=근심을 잊게 하는 풀) 등도 식자층에서 두루 쓰였다.

담배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일본 상인이 처음 들여오면서부터 만병통치약인 양 선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당시 조선 백성에게 기호품이란 술과 차가 전부였다. 그런데 차는 그리 인기가 없어서 오로지 술이었다.

담배가 등장하자 술의 위상은 단박에 떨어졌다. 위로는 고관대작에서 아래로는 마부까지, 심지어는 아낙네나 어린애도, 담배는 지위와 신분, 성별과 나이, 직업과 빈부의 차이를 떠나 누구나 즐기는 대중의 기호품이 되었다.

담배 앞에 모든 이는 평등했다. 유사 이래 그같은 기호품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춘향·몽룡 첫날밤은 '담배 권하기'부터

담배는 또 '사랑의 묘약'이기도 했다. 고전소설의 최고봉인 '춘향전'은 이본(異本)이 100종 넘을 정도로 다양하게 변주됐다. 그런데도 대부분 공통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있으니, 첫날밤 춘향이 이도령에게 담배를 권하는 장면이다.

이도령이 밤에 찾아 와 방에 마주 앉자 춘향은 담배부터 권한다. 전국에 유명하다는 담배는 다 꺼내놓고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해 꿀물에 촉촉이 적신다. 이어 대통에 꾹꾹 담아 불붙인 뒤 단순호치(丹脣皓齒)로 빠끔빠끔 빨고는 항라 치마에 아드득 씻어 이도령에게 건넨다.

조선의 흡연 문화는, 담배를 종이에 말아 피우는 궐련이 아니라 썬 담뱃잎을 담뱃대에 담아 피우는 장죽(長竹)문화였다. 초기엔 너나없이 맞대놓고 담배를 피웠으나 점차 예법이 생겼다. 윗사람 앞에서 아랫사람은 못 피웠고 여자·어린아이는 숨어서 피워야 했다.

담뱃대 길이는 권위와 힘에 비례해 길어져 갔다. 다만 기생은, 미천한 신분에 여자였어도 예외였다. 기생이 고관대작 못잖게 긴 장죽을 비스듬히 문 모습은, 숱한 문학작품에서,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서 자연스레 색정을 내비쳤다.

담배는, 비단 조선의 문화에만 큰 영향을 미친 건 아니었다. 임진·병자 양란을 거쳐 피폐해진 경제에 구세주 구실을 톡톡히 했다.

처음 일본에서 들어온 담배는 머잖아 조선 전국에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그 생산량의 많은 부분이 청나라로 수출됐다. 병자호란으로 조선 땅을 침범한 청나라 군대는 전쟁 통에도 조선 담배에 맛을 들였다.

이후 담배는 청 제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가진, 수출의 첨병이었다. 예컨대 1640년-담배 도입 후 불과 30년쯤 지났을 때다- 청은 명나라를 공격하고자 조선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조선은 임경업 장군을 대장 삼아 파병하는데, 임 장군은 특이하게도 담배를 잔뜩 싣고 갔다. 군량미가 떨어지자 그는 담배를 팔아 비용을 대는 것은 물론이고 그때 청나라에 끌려가 있던 소현세자 일행에게 돈을 바쳤다. 더구나 남은 돈은 조정에 보고한 뒤 조선 땅 의주에 보낼 정도였다.

양란 후 조선경제, 담배가 살렸다

경제재로서 담배의 위상은 그러했다. 청이 패전국에게 요구한 물질적 보상을 충당한 것은 기본이었고, 도리어 청의 재화를 끌어모았다. 담배 수출로 조선에는 은화가 넘쳐났다. 담배는 등장 이래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산업에서 중추적인 위치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조선시대에 담배가 마냥 긍정의 대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지난 연말 담뱃값 인상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담배 도입 초기부터 있어 왔다. '담배 유해론'이 간단없이 제기됐고 담배 금지령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 상소도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담배의 재배, 유통을 금하기에는 그 산업 규모가 너무나 컸다. 신분사회인 조선에서 담배가 가진 평등성을 지지하는 심성 또한 사그라지지 않았으리라.

이제 담배는 인류의 건강을 해치는 암적 기호품이자 공공장소에서 퇴출해야 할 혐오품으로 내몰린다. 담배가 '기호품 으뜸'의 자리를 술에게서 빼앗았듯이 지금은 커피에게 슬슬 밀리고 있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담배가 조선조 300년 동안 남긴 유산이야 보듬고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건 '우리 것'이므로.

이용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