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보상 기준 확대된 감정노동

"진상고객의 문제 아니다"

2015-11-05 10:39:16 게재

노동계 "감정노동 구조화가 근본원인, 기업 책임 강화 촉구"

잊혀질 만하면 터져나오는 감정노동자에 대한 횡포. 최근에는 백화점 노동자의 무릎을 꿇게 하는 고객의 갑질이 화제가 됐다. 2013년에는 기내식 라면서비스에 불만을 제기하며 온갖 행패를 부린 '라면상무' 사건이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예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텔레마케터 등 대표적인 감정노동자들이 일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보이지 않게 당하고 있는 피해는 드러난 것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

고용노동부가 지난 2일 감정노동에 대한 산재인정 기준을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입법예고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정부 방침에 따르면 그동안 산재인정 범위에 포함되지 못했던 고객 갑질로 발생한 적응장애와 우울증 등이 포함됐다.

이 같은 정부 방침에 대해 노동계 안팎에서는 아쉽긴 하지만 환영 분위기다.

민주노총은 "뒤늦게나마 800만명에 달하는 감정노동 종사자의 산재보상 기준이 확대되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밝혔다.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법률안을 발의한 정의당 심상정 의원 역시 "비록 방식이 모법 개정이 아니라 시행령 개정의 형태로 입법예고 되었지만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전진이라는 의미에서 늦었지만 환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감정노동자들의 심각한 현실에 비해 기업의 대응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감정노동 전국네크워크는 성명을 통해 "감정노동자에 가해지는 폭언 폭력은 일부 진상고객이 일으키는 문제로 보아서는 해결되지 않는다"면서 "상대의 인격과 인권을 침해하고 과도한 자기권리 주장을 하면서 비상식적인 요구를 하는 블랙컨슈머들은 사실상 기업이 재생산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소비자, 감정노동자 그리고 정부가 감정노동 문제해결을 위해 사회적 합의에 상당부분 다가선 지금 기업도 함께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가길 기대하고 원한다"라고 주장했다.

민주노총도 "감정노동의 원인은 고객의 우발적 갑질만이 아니다"면서 "사업장 안에서 고객대응 매뉴얼이나 인사고과 연계, 블랙컨슈머 등을 통해 감정노동을 구조화하고 있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라고 강조했다. 민주노총은 "감정노동에 대한 예방, 보상을 위한 보호입법은 노동부 2015년 정책입법과제"라면서 "무늬만 보호입법이 아니라 실질적인 보호입법을 통해 감정노동자 권리가 보장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와는 별개로 한국노총은 5일 오전 한국노총회관 앞에서 '감정노동자 우리의 가족입니다'라는 주제로 대국민 캠페인을 실시했다. 한국노총은 "감정노동자의 건강장해 및 인권침해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공분이 증대하고 있다"면서 "이번 캠페인을 통해 감정노동자의 건강장해 예방 및 인권보호를 위한 의식향상과 감정노동자의 건강보호를 위한 기업의 책임강화를 촉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지난달 13일 한국고용정보원이 국내 주요 직업 730개 종사자 2만 5550명에 대한 감정노동 강도를 비교분석한 결과 감정노동의 강도가 가장 센 직업은 텔레마케터(전화통신판매원)였고, 그 뒤를 호텔관리자, 네일아티스트, 중독치료사 등이 차지했다. 박상현 고용정보원 연구위원은 "최근 서비스 관련 직업군의 비율이 빠르게 늘고 있는 추세에서 '고객만족'이라는 소비문화가 만들어낸 그늘이 감정노동"이라면서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웃는 낯으로 고객을 대해야만 하는 감정노동 직업인을 위한 관심과 배려, 정책적 지원이나 예방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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