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언제까지 모델하우스만 보고 사야 하나
40년간 세계 유일 '후분양제' 유지 … 이제는 '공급자→소비자' 중심으로 틀 바꿔야
"한두푼도 아니다. 수억원이다. 그것도 대부분 은행대출을 끼고 있다. 이런 거액을 완공도 안된 아파트를 구입하기 위해 미리 건설사에 납부한다. 아파트가 잘 지어졌는지는 확인할 길 없다. 본 것이라곤 화려하게 꾸며진 모델하우스와 장점만 나열된 광고전단지, 광고인지 기사인지 구분 안 가는 언론보도 뿐이다, 그래도 건설사 브랜드를 믿고 청약한다. 입주 후엔 열불이 난다. 하자는 그렇다쳐도 하자보수에 임하는 건설사 태도에 화가 난다. 분양 때의 친절함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다. 이미 집값을 다 받았으니 아쉬울 게 없다는 식이다. 반면, 건설사들은 집 지을 땅과 사업승인만 받으면 공사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계약금, 중도금이라는 이름으로 필요할 때 공사비가 들어온다. 그게 집값의 70%에 달한다. 이러길 40년. 이게 비정상 아니고 뭐가 비정상인가."
왜 아파트 선분양이 지금도 계속되는지 알 수 없다는 지인의 볼멘 소리다.
아파트 분양제도가 도마에 올랐다. 정치권이 나섰다.
국민의당 국가대개혁위원회는 지난달 23일 '집 걱정 없는 나라 만들기' 기자회견을 통해 분양원가 공개와 순환출자제한 대상인 재벌의 후분양 의무화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같은 당 의원들이 기존 선분양 방식을 후분양으로 바꾸는 법안을 잇따라 발의했다.
정동영 의원이 지난해 12월, 윤영일 의원이 지난달 13일 후분양제 도입을 내용으로 하는 주택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모두 시공 80% 이후 분양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윤 의원은 "현행 선분양제도는 분양권 전매의 폐해를 야기하고, 소비자가 고가의 완성된 주택을 보지 못한 채 구매하는 등 주택시장 정상화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개정안 취지를 설명했다. 그는 "주택시장 안정과 소비자 중심의 주택공급 질서확립을 위해 후분양제 도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후분양 문제는 3월 임시국회에서 본격 다뤄질 전망이다.
사실 후분양제 도입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참여정부시절인 2003년 5월 후분양제 도입을 추진했다. 당시 과열된 주택시장 안정화 방안을 내놓으면서 후분양제 도입을 포함시켰다. '재건축 아파트를 대상으로 사업승인이 나더라도 80% 이상 시공 후에 분양을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듬해 2월엔 대통령 업무보고를 통해 '주택 후분양 활성화 방안'을 보고했다. 2007년부터 단계별로 분양 공정률을 높여 2011년에는 모든 공공부문 아파트는 80% 공사가 진행된 후 분양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후분양제는 제대로 시행도 되기 전에 폐기됐다. 경기침체를 이유로 2006년 도입을 1년 유예하더니, 2008년엔 완전히 접었다.
◆선분양제, 주택가격 규제의 보완물 = 선분양 방식을 일방적으로 잘못됐다고 비난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간 순기능도 있었다.
무엇보다 주택공급 확대에 큰 역할을 했다. 건설사 자금여력은 취약하고, 정부 재정도 열악한 상황에서 선분양 방식이 아니었으면 이처럼 빠르게 '주택보급률 100% 달성'을 이루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주택 수요자들은 입주때 한꺼번에 거액을 마련해야 하는 부담을 피할 수 있었다. 주택가격이 꾸준히 상승하는 상황에서 재산증식의 의미도 컸다.
그럼에도 후분양제 요구가 끊이지 않는 것은 선분양제가 많은 불합리함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선분양제는 전형적인 공급자 중심이다. 소비자 선택권이 제한된다. 수억원에 달하는 값비싼 상품을 품질검증도 못한 채 사전 구매한다. 이미 집값의 70~80%를 미리 지불했기 때문에 부실시공이 발견돼도 잔금을 치르고 입주할 수밖에 없다.
반면, 주택업자는 부실시공 및 품질저하 유혹에 빠진다. 주택가격을 미리 받은 건설사 입장에서 이제 주된 관심은 이윤극대화다. 입주 후 계약과 다르다는 민원이 쏟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임덕호 한양대 경상대학 교수는 '후분양제 도입 필요성과 도입 방안' 논문에서 "선분양제도는 수억원대의 아파트를 선금내고 구입하면서도 품질은 단지 건설회사의 양심적인 처분에 맡길 수밖에 없는 비정상적인 주택시장 구조를 존속시키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선분양제 존립근거도 상실했다는 지적이다. 선분양제는 분양가 규제의 보완물이다. 1977년 분양가를 규제하는 대가로 건설사에게 손쉬은 자금조달 방식을 마련해준 것이다. 이제 완전 자율화돼 경쟁적으로 분양가를 올리는 상황에서 선분양제를 유지할 논리가 약하다.
선분양은 또 분양권 전매시장을 형성, 부동산 투기를 부추긴다. 분양권 매매차익을 노리는 투기세력이 들어와 거품을 형성, 실수요자들이 그 피해를 떠안는다. 정부가 지난해 11·3 부동산대책에 '분양권 전매제한 기간연장'을 포함시킨 것도 이런 이유다.
◆후분양제, 분양권 전매시장 원천 차단 = 반면, 후분양제는 선분양제의 폐단을 해소할 수 있다.
후분양제는 무엇보다 주택품질 향상에 도움이 된다. 후분양제 하에서는 수요자들이 거의 완성된 주택을 직접 확인하고, 비교해 선택할 수 있다. 주택업체들은 부실시공을 줄이고, 품질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물론 겉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주택품질의 복합성과, 소비자의 전문성 부족 등으로 후분양을 하더라도 품질을 제대로 검증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견본주택만 보고 구입할 때보다는 상대적으로 품질검증이 수월하다. 투기행위도 방지할 수 있다. 특히 분양과 완공 시점 차이에서 파생되는 분양권 전매시장이 사라진다. 실수요자 위주로 주택시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경실련에 따르면, 지난해(9월 말 현재) 아파트 거래량 81만건 중 12만건(15%)이 분양권 전매였다. 특히, 세종시는 37%에 달했다. 거래된 3가구 중 1가구는 분양권 전매였던 셈이다. 경남(27.2%), 대구(24.6%), 부산(23.2%)도 높았다. 근래들어 부동산시장을 달궜던 주요지역에 투기수요가 많았다는 의미다.
금융기관의 엄격한 사업성 분석과, 다양한 보증상품 개발 등으로 주택사업 환경이 한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는 것도 후분양제의 장점이다.
서순탁 서울시립대 교수는 "지금이 후분양제 도입의 적기"라고 강조했다. 2015, 2016년 2년간 주택공급이 급격히 많아지면서 주택가격이 안정 내지는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주택가격이 상승세면 시세차익으로 인해 선분양에 대한 선호가 높을 수밖에 없다.
서 교수는 "선분양제도는 주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때 공급확대를 위해 도입한 긴급처방"이라며 "주택공급이 100%를 넘은 상황에서 이제 역할이 끝났다"고 말했다.
◆금융여건 확충 필요 = 그러나 후분양제가 본격 시행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선 금융여건이 갖춰져야 한다. 건설사들은 선분양 하에서 입주자로부터 조달했던 공사자금을 금융권 등에서 충당해야 한다. 자칫 신용도가 높은 일부 대형업체를 제외한 영세 중소업체들이 자금난에 시달릴 가능성이 많다. 이는 주택공급 감소 및 건설사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은 "후분양제를 시행하려면 무엇보다 건설사들의 공사비 조달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참여정부 때도 공사비 조달이 원활하지 못해 주택공급이 감소했다는 설명이다. 당시 정부도 보완책이 없었던 건 아니다. △미분양 공공주택에 대한 재산세 감면 △민간주택에 대한 주택기금 우선지원 및 공공택지 우선공급 △주택기금 대출금리 인하 및 가구당 지원금 증액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박 위원은 "기금지원 외에 민간 금융시장에서 지금보다 수월하고, 다양하게 건설비를 조달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을 갖춰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프로젝트파이낸싱 및 리츠 등을 보다 활성화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후분양제 연착륙을 위해서는 단계적 시행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이와 관련, 2003년에도 선도단계(2003∼2006년)→활성화단계(2007∼2011년)→정착단계(2012년 이후)로 나눠 실시한다는 로드맵을 갖고 있었다.
정부는 후분양제 도입에 소극적인 모습이다. 이문기 국토교통부 주택정책관은 "지금도 후분양으로 공급하는 것이 가능하다"며 "후분양이든, 선분양이든 법적으로 특정한 방안을 강요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게 국토부 입장"이라고 말했다. 현행 제도를 유지하겠다는 의미다.
박천규 국토연구원 부동산시장연구센터장은 "선분양, 후분양만 놓고 너무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소비자 보호를 강화할 수 있는 보다 다양한 논의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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