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무죄' 판결 이영구 전 판사 별세

2017-11-27 11:01:01 게재

1976년 긴급조치 위반 교사에 '무죄' 판결 … "진실을 말해야 할 때 말한 용기있는 판사"

엄혹한 유신시절 긴급조치 위반사건에 무죄판결을 했던 이영구(85) 전 판사가 2년전 췌장암 판정 후 투병생활을 하다가 지난 18일 별세했다. 대부분의 판사들이 유신정권의 위세에 눌려 위헌적인 긴급조치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리던 1976년, 이 전 판사는 용기 있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지방으로 쫓겨난 후 옷을 벗었다.

"어려운 시절에, 어려운 상황에서, 이영구 판사는 '진실을 말해야 할 때 말하는' 책무를 진 법관으로서의 할 일을 다 했다." 고(故) 이영구 변호사에 대해 양삼승 변호사는 그의 책 '권력, 정의, 판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장기집권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 = 긴급조치9호가 발령된 지 1년여가 지난 1976년 이영구 판사는 서울지방법원 영등포지원 판사로 근무하며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기소된 한 고교교사에게 무죄를 선고(76고합186)했다.

1976년 4월 당시 서문여고 교사였던 이모씨(당시 33세)는 9반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후진국일수록 1인정권이 오래간다. 그 사람이 아니면 나라를 이끌어갈 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국민에게 압박감을 갖게 한다. 우리나라 정권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해먹는다"라고 말해 '사실을 왜곡 전파해'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기소됐다.

이영구 판사는 판결문에서 조목조목 분명한 논리로 검찰의 공소사실을 부정하며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 판사는 우선 '후진국일수록 1인정권이 오래간다. 그 사람이 아니면 나라를 이끌어갈 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국민에게 압박감을 갖게 한다'는 점에 대해 "대한민국이 8·15해방이후 자유당 집권하에서 경험한 바 있는 역사적 사실이며,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집권자나 집권을 향한 자의 정치활동 전개과정에 있어 반복돼 왔고, 또 향후 반복 가능한 과거 내지는 장래의 역사적 경험적 사실이라고 볼 것이며 그 자체 어떤 날조된 사실이나 왜곡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우리나라 정권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 함은 장기적이란 뜻의 비유적 표현을 사용했다하여 이로 인해 사실이 왜곡되거나 새로운 사실이 날조된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장기집권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것인지 여부를 살펴본다'며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집권해 1960년 4·19 학생의거로 하야 당할 때까지 약 12년간 장기집권해 왔음은 역사의 한편임이 틀림없고, 박정희 대통령의 재위기간이 15년을 넘는 장기임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결국 "피고인의 말 그 자체로는 어떤 역사적 사실을 날조했거나 왜곡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영구 변호사는 1933년 10월 전북 전주, 1958년 10회 사법시험 합격, 1959년 공군법무관, 1962년 청주지방법원 판사, 1965년 전주지방법원 판사, 1968년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 1970년 서울고등법원 판사, 1972년 대법원 재판연구관, 1973년 대전지방법원 부장판사, 1974년 서울 민·형사지법 영등포지원 부장판사, 1977년 전주지방법원 부장판사, 변호사 개업, 사진 법률신문 제공

◆"긴조9호 위반 221명 중 1명만 무죄" = 당시 그의 판결이 얼마나 용기있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3선에 성공하지만 당시 김대중 후보와의 득표차가 그리 크지 않았다.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비난과 저항이 점차 격렬해지자 박 전 대통령은 1972년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헌법 일부조항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국회를 해산시킨 후, 국회를 대신한 초법적 비상국무회의에서 개헌안을 마련해 국민의 기본권을 크게 제한하는 이른바 유신헌법을 제정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저항이 심해지자 박 정권은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으키고, 1974년 긴급조치 1호를 발표했다.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어길 때는 영장없이 체포·구속하며 △군법회의에서 재판하고 △15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반유신운동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그러자 긴급조치 4호, 7호를 잇달아 내놓고 급기야 1975년 5월, 종합판인 긴급조치 9호를 발표했다.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을 금지하고 영장없이 체포·구금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그 재판을 군법회의가 아닌 일반법원에서 한다는 내용이다.

양 변호사는 앞의 책에서 "대통령으로서는 일반법원에 재판을 맡김으로써 어느 정도는 반대자의 예봉을 피해보려는 계산이었지만, 재판을 맡게 된 판사로서는 커다란 부담을 떠안게 됐다"고 지적했다.

◆유신헌법 비판했다고 징역 2년6월 = 양 변호사에 따르면 "1976년 1년 동안 긴급조치 9호 위반사건으로 판결을 선고받은 피고인은 모두 221명인데, 그중 무죄가 선고된 경우는 이 피고인 단 한 명이었다"고 소개했다.

대부분의 판사와 검사들은 유신헌법과 긴급조치가 헌법과 국민 기본권을 침해한 위헌적인 내용임을 알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의 위세에 눌려 유죄 판결과 기소를 해온 셈이다.

대검찰청이 지난 10월 19일 '긴급조치 9호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145명을 대상으로 직권 재심을 청구하겠다'고 밝힌 내용에 따르면, 당시 이 교사와 비슷한 경우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30세 김 모씨는 1978년 9월 해외 건설 노동자로 일하다 귀국해 "유신헌법은 삼권분립에 반해 국민의 찬반토론없이 제정됐으므로 철폐돼야 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청와대로 보냈다는 이유로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았다.

당시 45세인 또 다른 김 모씨는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는 독재의 길로 가는 길이니 즉각 해제하라"는 내용의 서신 6통을 작성해 배포한 혐의로 징역 2년6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영구 판사는 달랐다. 그는 긴급조치 9호 위반자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서 '진실을 말해야 할 때 말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사법부, 39년만에 '긴급조치는 위헌' 결정 = 사법부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2008년 뒤늦게 잘못을 반성했다.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이 "권위주의 시절 법관의 자세를 올곧게 지키지 못해, 잘못된 판결이 선고되기도 했다"며 "과거 사법부가 헌법상 책무를 충실히 완수하지 못함으로써 국민에게 실망과 고통을 드린 데 대하여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대법원장의 지시로 대법원은 과거의 잘못된 판결 224건을 추려내 바로잡겠다고 약속했지만, 현재까지 후속 조치를 미뤄왔다.

헌법재판소는 1974년 긴급조치 1호 발표이후 39년만인 2013년 3월 긴급조치를 위헌으로 결정했고, 같은 해 4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도 같은 내용으로 최종 판결했다.

검찰은 그보다 훨씬 더 늦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최근에야 처음으로 과거의 잘못을 사과했다. 문무일 검찰총장은 지난 8월 9일 "권위주의 정부 시절 일부 시국사건 등에서 적법적차 준수와 인권보장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후 10월 19일 대검찰청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145명에 대해 검사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사법부와 검찰은 뒤늦은 과거사 바로잡기와 함께, 용기있는 이영구 판사에 대한 명예회복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장병호 기자 bh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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