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여는 책 | 메이커스 앤드 테이커스

금융이익에만 몰두하는 기업들

2018-01-26 10:46:31 게재
라나 포루하 지음 / 이유영 옮김 / 부키 / 1만8000원

2013년 봄 애플의 CEO 팀 쿡은 170억달러를 차입하기로 결정했다.

상식적으로 이는 이상한 결정이었다. 당시 최고의 기업 가치를 자랑하던 애플은 은행에 1450억달러가 넘는 현금을 쌓아두고 있었다. 그런데도 돈을 빌리면서까지 자금을 마련하기로 한 까닭은, 은행 계좌에서 돈을 꺼내는 것보다 이 방법이 비용이 덜 들었기 때문이다.

애플 같은 블루칩 기업은 대출에 따르는 이자나 수수료 등의 비용이 다른 기업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 게다가 애플의 은행 계좌는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데 이 돈을 미국으로 들여오려면 미국 세법에 따라 상당한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애플 입장에서는 170억달러의 자금을 마련하는 데 인출보다 차입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이렇듯 오늘날 기업들은 금융업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졌다. 미국에서 가장 크고 잘 나가는 기업조차 은행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 그러나 이들은 은행처럼 규제를 받지 않는다. 화이자 마이크로소프트 등 수많은 대기업들은 금융 거래, 조세 회피, 금융 서비스 판매 등 돈을 굴리는 것만으로 엄청난 돈을 벌고 있다.

세법 허점 이용해 돈벌이

미국의 기업들은 기업이 아니라 금융으로 탈바꿈하고 말았다는 것이 새로 나온 책 '메이커스 앤드 테이커스(Makers and Takers: How Wall Street Destroyed Main Street)'의 주장이다. 금융시장 내에서 수익을 추구하는 활동이 실물 경제의 번영에 이바지하는 수단으로 역할을 하지 않고 그 자체가 탐욕스러운 괴물이 돼 위험을 증가시키고 연구개발과 같은 장기 투자를 저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기업들이 벌이는 무차별적인 금융활동 가운데는 불법적인 것도 있지만 상당수는 합법적이다.

오늘날의 법과 제도가 기업의 이런 행태를 조장, 혹은 묵인하고 있다는 의미다. 예컨대 기업의 부채에 뒤따르는 이자 비용에는 세금 공제가 적용되지만 배당금과 유보 이익금에는 혜택이 없다. 이런 세제 혜택에 힘입어 기업의 부채 비용은 자기자본 비용에 비해 42% 가량 더 저렴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애플과 같은 기업들은 역외에 묻어둔 현금을 국내로 들여와 세금을 납부하느니 차라리 돈을 빌려 투자자들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기업들은 또 세법의 허점을 이용한다. 예컨대 '더블 아이리시'라는 기법이 있다. 미국 기업이 아일랜드에 법인을 설립한 뒤 이 법인을 다시 바하마같이 세금이 낮거나 없는 국가로 이전해 등록하는 것이다. 우선 미국 세법의 허점 덕분에 첫 번째 이전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아일랜드 세법의 허점으로 인해 아일랜드 법인은 아일랜드에 세금을 낼 필요가 없어진다. 이 법인을 아일랜드 비거주자가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나아가 특허권의 판매를 관리할 목적으로 아일랜드에 또 다른 해외 자회사를 설립하면 아일랜드 세법을 다시 한 번 이용할 수 있다.

금융이 경제성장을 방해

이런 행태가 만연한 것은 오늘날 경제 체계가 병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질병의 이름은 '금융화'다. 금융화란 금융과 금융적 사고방식이 기업과 경제의 모든 측면을 구석구석 지배하게 돼 버린 현상을 뜻한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금융은 경제 성장을 돕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금융화는, '만드는 자(maker)'들이 '거저먹는 자(taker)'들에게 예속된, 전도된 경제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만드는 자란 실질적인 경제 성장을 창출하는 사람, 기업을 뜻한다. 거저먹는 자란 고장이 난 체계를 이용해 사회 전체보다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불리는 이들을 의미한다.

거저먹는 자들의 범위는 꽤 넓은데 다수의 금융업자와 금융기관은 물론, 금융화가 경제 성장과 사회 안정, 나아가 민주주의를 좀먹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CEO, 정치인, 규제 담당자까지 포함될 수 있다. 오늘날 유례없이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금융업계는 자신들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체계까지 좌지우지한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의회에서는 금융 체계를 개혁하기 위해 도드-프랭크 금융개혁법을 도입했다. 특히 쟁점이 됐던 부분은 '볼커 룰'로 이는 위험이 큰 자기자본 거래 부문을 상업은행에서 분리하는 규정이었다. 그런데 볼커 룰을 입안하던 2010년 7월부터 2011년 10월까지 이뤄진 자문 건수 가운데 무려 93%를 금융기관과 이를 대리한 법률회사들이 차지한 것으로 밝혀졌다.

금융 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으로 개혁의 대상이 돼야 할 금융업계가 자신들을 규제할 법안을 만드는 작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셈이다. 그러니 볼커 룰의 수위가 약해진 것은 뻔한 결과였다.

'힘의 균형 되찾기'가 급선무

저자는 실존 인물과 다양한 기업들에 대한 취재를 통해 생생하고 흥미진진한 사례들을 보여줌으로써 주장을 뒷받침한다. 아울러 이런 추세를 뒤집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중대한 과제임을 알려 준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바로 금융과 실물 경제, 즉 '거저먹는 자'와 '만드는 자' 사이의 힘의 균형을 되찾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우리가 당장 시행해야 할 정책들을 제시한다. 안전한 금융 시스템을 위한 규제 방안이라든가 모든 사람이 마땅한 몫의 세금을 내도록 만드는 세제 개혁, 일자리 증가를 이뤄낼 공공과 민간 부문의 협력 증진, 크고 작은 미국 기업들 내 필요한 문화적 변화 등이 거론된다.

저자는 이에 대해 금융화의 거센 조류를 막고 건강한 경제, 풍요로운 사회, 더 밝은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송현경 기자 funnyso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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