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연준 압박은 어떤 스타일?

2018-07-25 11:28:55 게재

역대 대통령들 연준에 직간접적 협박 … 닉슨은 연준 독립성 심각히 훼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의 금리인상 방침을 작심하고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연준의 금리인상은 우리가 해온 모든 것을 망친다"고 주장했다. CN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도 "연준은 금리가 올라가는데도 또 다시 올리려 한다"며 "나로서는 정말이지 달갑지 않다"고 공격했다.

이를 두고 '금과옥조'와도 같은 연준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처사라며 많은 비난이 일었다. 하지만 연준의 정책이나 독립성을 대놓고 공격한 경우는 역대 무수히 많았다는 지적이다.

조지아대 역사학 교수인 스티븐 밈은 24일 블룸버그통신 자매사인 블룸버그퀸트 기고문에서 "연준 창립 시절로 거슬러 오르면 연준에 대한 압박과 공격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밈 교수에 따르면 연준의 초기 시절은 지금처럼 '전지전능하다'는 명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책결정권은 워싱턴에 있는 연준 이사회에 집중되지 않았다. 각 지역 연방은행의 총재들이 제각각 정책을 폈다. 즉 연준 시스템이라는 배에 사공이 너무 많았다. 때문에 연준 초기 대통령들은 통화정책을 책임지는 특정한 인물을 지목해 비난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당시 연준의 임무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공개시장조작은 연준 설립 20년 뒤에야 공식적인 정책도구가 됐다. 금본위제도를 채택한 시대라는 점도 연준의 손발을 묶었다.

그럼에도 대통령들은 시시때때로 연준에 불평을 터뜨렸다. 워런 하딩 대통령은 1921년 기자들을 앞에 두고 "연준은 금리를 낮춰 농부들을 도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뉴욕연방은행 총재였던 벤자민 스트롱은 결국 하딩 대통령의 요구에 굴복했다. 스트롱 총재는 영국중앙은행 총재에 보내는 편지에서 "연준의 완고한 저항이 결국 정치적 보복을 불렀다"고 썼다.

하지만 그같은 공공연한 압박은 1930년대 대공황 때까지는 드문 일이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연준을 상대로 보다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펴달라고 로비했지만 실패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임 후버 대통령보다는 성공을 거뒀다. 루스벨트는 워싱턴 소재 연준 위원회에 통화정책 주도권을 몰아주는 법안을 밀어붙였다. 대통령의 경제참모였던 로칠린 커리는 "연준은 행정부의 통제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루스벨트는 재무장관을 통해 연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재무장관은 신임 연준 의장인 매리너 에클레스와 주간회의를 가졌다. 연준이 개최한 1935년 11월 기자간담회에서 재무장관은 "부동산 대출 이자는 6%를 초과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자리에 있던 에클레스 연준 의장도 이에 동의했다.

행정부와 연준이 자주 협력해 일했다고는 하지만 공공연한 압박이 간간이 이어졌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때가 그랬다. 그러던 것이 전후 시기에 크게 변했다. 대통령과 연준이 새로운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재무부가 공공부채의 차환을 손쉽게 하기 위해 연준에 단기금리를 낮춰줄 것을 은밀히 요구하면서 갈등이 벌어졌다. 연준은 기준금리를 낮게 유지하는 데 반대했다. 해리 트루먼 행정부는 즉각 반격했다. 1951년 양측의 갈등이 공개적으로 불거졌다. 서로 샅바싸움을 여러 차례 주고받았다. 의회가 개입하기도 했다.

결국 연준이 재무부, 나아가 대통령으로부터 독립성을 갖는다는 합의문에 양측이 서명했다. 새로운 관계의 고안자는 재무부 통화정책 차관보였던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이었다. 이후 마틴은 연준 신임의장이 됐다. 그는 5명의 대통령과 함께 일한 최장수 연준 의장이었다.

펜실베이니아 와튼스쿨의 피터 콘티 브라운 교수는 "마틴 의장은 연준 수장으로서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했다"며 "이전과 달리 정치에 초연한 기술관료적 이미지를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마틴 의장은 시작부터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1953년 경기침체 조짐이 보이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마틴 의장에게 완화적 통화정책을 쓰라고 압박했다. 만약 거부한다면 사임을 요구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마틴 의장은 마지못해 약간의 완화정책을 쓰며 대통령의 뜻을 따랐다.

역설적이지만 연준 의장으로 마틴의 독립성을 굳건히 한 건 아이젠하워였다. 아이젠하워는 1956년 기자회견에서 '연준이 대통령이 반대하는 정책을 구사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연준은 행정부와 독립된 기관이다. 대통령의 권한 아래 있지 않다"며 "개인적으로 연준이 정치적 수장에 직간접적으로 책임을 지도록 하는 건 잘못된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같은 입장은 오래가지 않았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다양한 대리인을 내세워 연준을 압박했다. 후임 린든 존슨 대통령은 보다 직접적 압박을 선호했다. 마틴 의장에게 직접 로비하는 방식을 택했다. 당연히 양자는 갈등했다. 마틴은 인플레이션을 걱정했다. 하지만 존슨 대통령은 자신의 공약인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건설과 베트남전 전비 조달이 절실했다.

마틴 의장은 인플레이션 걱정 끝에 결국 1965년 금리를 올렸다. 린든 대통령은 분노했다. 그는 담낭 수술을 받고 회복을 취하던 마틴 의장을 자신의 텍사스 별장으로 소환했다. 연준 의장을 방으로 부른 뒤 다른 사람은 모두 내보냈다. 존슨 대통령은 마틴 의장을 벽으로 밀어붙인 뒤 "미국의 젊은이들이 베트남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당신은 정부에 절실한 돈을 찍어내지 않고 있다"고 고함쳤다.

마틴은 이에 항의했고 텍사스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고수한 마틴 의장의 태도는 언론으로부터 '연준 독립성의 상징'으로 불렸다. 하지만 이후 수년 동안 마틴 의장은 존슨 대통령의 요구에 맞게 보다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구사했다. 존슨 대통령의 텍사스 소환이 원칙에 입각해 통화정책을 펼치려는 연준 의장을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우연찮게 인플레이션이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치솟는 시기가 이어졌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존슨 대통령보다 한발 더 나아갔다. 사실상 연준의 독립성을 무너뜨렸다. 그는 1970년 아서 번즈를 연준 의장에 임명했다. 공개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번즈 의장을 압박했다. 닉슨 대통령은 번즈를 임명하던 날 "신임 의장이 '독립적으로' 대통령의 의견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기를 희망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1년 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닉슨 대통령이 번즈 의장으로부터 '완화적 통화정책을 구사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닉슨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번즈 의장에게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의회 내 연준에 비판적인 의원들을 움직이게 할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말했다.

번즈 의장은 대통령의 뜻에 충실한 '아첨꾼'이기도 했다. 그는 연준 내 반대 의견을 가진 위원들에 불이익을 줬다. 1972년 닉슨의 재선을 돕기 위해 협력하기도 했다. 그는 닉슨 대통령의 악명 높은 도청테이프에도 걸렸다. 도청테이프에 따르면 그는 대통령에게 "대통령의 명성과 지위를 높이기 위해 나의 권한 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고 말했다. 사실상 연준의 독립성을 닉슨 대통령에 넘긴 것이었다. 후임 대통령 누구도 닉선처럼 연준을 철저히 굴복시킨 적은 없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는 폴 볼커 의장을 공개적으로 비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도 볼커 의장을 압박했지만, 대리인을 내세우는 간접적 방법을 택했다.

이후 대통령들도 비슷했다. 정부 정책과 보조를 맞추는 통화정책을 요구할 때에도 연준에 대한 공개적 공격은 삼갔다. 달리 말하면 연준은 지속적으로 대통령의 압박에 시달렸다. 단지 이전과 달리 보다 은밀하게, 기록을 남기지 않는 방식이었을 뿐이다.

스티븐 밈 교수는 "그건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리고 제롬 파월 의장은 최소한 아서 번즈 의장보다는 유능할 것으로, 또 부당한 대통령의 요구에 저항할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하지만 역사적 기록을 보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전적으로 장담할 수는 없다"고 평가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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