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 목자' 고 문동환 목사 12일 발인
불의에 맞서다 수차례 옥고
"민중신학 큰별 졌다" 애도
고인은 2009년 자서전 '떠돌이 목자의 노래'에서 스스로를 떠돌이 목자로 칭했다. 그는 저서에서 "자본주의 산업문화가 극성을 부리는 오늘날 전 세계를 통해 떠돌이들이 양산되고 있다"며 "그들이 떠돌이라는 것을 명확히 깨닫고 새 내일을 갈망하면서 아우성을 칠 때 내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고인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북간도 명동촌에서 1921년 문재린 목사와 여성운동가 김신묵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시절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목사를 보며 목회자의 꿈을 키웠다. 일본의 신학교로 유학했다가 서울로 돌아와 조선신학교로 편입했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미국으로 유학해 웨스턴 신학대학원, 프린스턴 신학교, 하트포트 신학대학교에서 차례로 공부했다. 귀국후 1961년부터 한신대학교에서 교수로 부임했다.
한신대 교수시절 군부독재를 비판하며 불의에 맞서다 유신정권 탄압으로 1975년 해직됐다.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긴급조치 철폐와 의회정치의 회복을 요구한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1976년 김대중 전 대통령,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구속됐다.
2년여간의 수감생활을 하며 고인은 명상기도와 성서를 통해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출옥후 1979년 동일방직과 YH노동조합원의 투쟁을 지원하다 다시 투옥됐다.
1979년 10.26으로 유신정권이 막을 내린 후 대학으로 돌아갔지만,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해직되고 미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 미국에서도 한국 민주화를 위해 애쓰다 1985년 한국으로 돌아와 한신대에 복직했다.
정년퇴임후 김 전 대통령의 권유로 1988년 전국구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후, 평화민주당 수석부총재까지 지냈다. 1991년 이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젊은 목회자들과 함께 성서연구에 주력했다.
그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민중신학을 더욱 심화시킨 '떠돌이 신학'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본래의 정신에서 멀어진 한국 교회를 비판하는 차원을 넘어 노동자들을 비롯한 민중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인은 2013년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성장주의에 매몰된 한국 개신교에 대한 쓴소리를 했다. 고인은 생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선교사들은 '예수 믿고 천당 가라'는 이야기를 했지, 정의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며 "본래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인은 미국 하드포드 신학교에서 만난 미국인 아내 헤리엇 페이 핀치벡에서 문혜림이란 한국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들 부부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나은 뒤 막내 딸을 입양했다. 한국에서 외국으로 입양가는 아이들을 모든 기독인들이 한명씩만 입양해도 외국으로 보내지는 아이들이 없어질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아들 창근·태근, 딸 영혜·영미(이한열기념관 학예실장)씨 등이 있다. 문성근(영화배우)씨가 조카다. 빈소는 연세대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12일 오전 8시. 장지는 마석 모란공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