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특별기획 | 임정의 국로 동농 김가진 ⑤

대한협회 회장 맡아 근대정당 모색, 일제병탄 후 좌절되다

2019-05-13 11:14:41 게재

일본의 침략성에 대해 안일한 판단 … 3.1운동 전까진 적극적으로 독립운동 한 기록없어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김가진이 충청남도 관찰사를 마치고 서울에 온 직후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났다. 밀사 일행이 국제무대에 나타나 한국과 일본이 맺었다는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자 일본은 크게 당황했다. 일본 내각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제의에 따라 일본 외무대신의 한국 파견과 고종황제의 양위를 결정했다. 이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한국의 조야는 불안에 휩싸였다. 7월 18일 서울 상류층 인사들이 만든 동우회 특별 모임에는 1000명의 인사들이 모여 사태를 어찌 수습할지 논의했다. 일부에서는 만민공동회를 열어야 한다고 했고, 또 일부에서는 집단 자결을 제의하기도 했다.

대례복을 입고 백운장 앞에 선 동농│망명하기 직전 동농은 재산관리인의 배신과 횡령으로 대례복을 전당포에 맡길 정도로 가난에 쪼들렸다.

평소 같으면 강경한 입장을 취했을 김가진은 이번에는 잔뜩 움츠렸다. 김가진은 2000만 동포가 다 죽어버리면 우리 대황제는 누구와 함께 나라를 다스리겠냐며, 일본 외무대신이 서울에 오면 "여러 회원들이 마음을 다해 애처롭게 비는 것이 사리에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동우회의 다른 회원들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 일은 할 수가 없다"고 반발했다. 김가진이 이렇게 당당하지 못한 태도를 취한 이유는 누구보다도 일본을 잘 아는 그가 일본의 초강경방침을 미리 읽고 어떻게든 고종의 퇴위만큼은 막으려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고종을 몰아낸 일제는 1907년 7월 20일 황태자인 순종을 황제에 즉위시켰고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클 융, 빛날 희, 도대체 무엇이 크고 도대체 무엇이 빛난다는 말인가.

김가진은 순종이 즉위하고 넉 달여 만인 1907년 11월 30일 규장각 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9월 23일 자리에서 물러났다. 규장각 제학이라면 조선시대 같으면 대단히 영예로운 자리겠지만, 다 망해버린 나라, 쓰러져버린 유교문명권에서는 이제 별다른 흥미도 영예도 없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김가진이 조선왕조에서 맡은 마지막 벼슬이었다. 우연이겠지만 김가진은 규장각에서 검서관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30여 년간 온갖 영욕과 풍상을 다 겪고 역시 규장각에서 제학으로 관직생활을 마감했다.

실력양성과 교육입국

관직에서 물러나 김가진은 교육 분야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김가진은 경기, 충청 출신 인사들의 모임인 기호흥학회에서 교육부장 등 간부로 활동했다. 김가진이 교육에 힘을 쏟은 이유는 그가 '기호흥학보' 창간호에 기고한 논설 '고 기호애국동포(告畿湖愛國同胞)'에 잘 나타나있다. 김가진은 이 글에서 유럽에서 거의 망할 뻔한 프러시아가 일거에 나라를 되살려 일등 강국이 된 것은 '강제적 교육의 힘'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김가진은 아시아에서 일본이 영미의 침략에 유혈을 뿌리다가 일치단결하여 오키나와와 타이완을 병합하고, 청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한국과 만주에서 위력을 떨치는 등 동방에 우뚝 서 열강과 대결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애국적 교육의 힘' 때문으로 보았다.

김가진은 프러시아나 일본이 위기를 벗어나 강국으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이유를 교육에서 찾았다. 대한제국이 존망의 위기를 뚫고 다시 살아나는 길은 교육밖에 없다고 확신한 것이다. 김가진은 이 때문에 기호학교(유길준이 세운 융희학교 합쳐 오늘날 중앙고등학교로 이어짐)를 설립하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매일 기호학교에 출근하는 등 교육입국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노력이 결실을 보기 전에 나라가 망하고 기호흥학회가 해산되자 김가진은 근심과 분함으로 병까지 들었다고 한다.

대한협회의 환상과 미몽

대한제국의 망국 전야, 김가진이 주력했던 또 하나의 활동은 대한협회의 회장직이다. 대한협회는 일제 침략정책에 맞서 싸우다가 고종 퇴위 직후 통감부에 의해 강제 해산된 대한자강회를 이어받은 조직이다. 일제는 대한자강회를 해산시키고 100여일 만인 1907년 12월 옛 대한자강회 회원들을 주축으로 한 대한협회의 창건을 허락했다. 이는 반일적인 지식인들을 한데 모아 약간의 숨통을 터주는 것이 그들의 급진화나 의병투쟁과 결합을 방지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세창 권동진 남궁억 윤효정 유근 등 대한자강회의 주요간부들은 대한협회를 장차 하나의 정당으로 발전시킬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대한자강회에 이어 대한협회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일본인 오가키 다케오(大垣丈夫)다. 그는 대한자강회의 창립 당시에는 "40~50년 전 일본도 한국처럼 미개한 나라였지만 서구 문명을 흡수하고 '국혼(國魂)'인 야마토다마시(大和魂)를 배양했기에 오늘처럼 발전됐으니 한국도 교육ㆍ식산흥업에 힘쓰고 한국혼(韓國魂ㆍ국민 정신)을 키우면 언젠가 독립을 되찾아 하나의 열강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가키는 그 당시 직접적인 '일한합방'을 강행하자는 대륙낭인들과는 달리 보호국으로 전락한 한국의 주권을 명목상 유지시켜 일본과 '동맹'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입장은 곧 이토 히로부미의 입장이기도 했다. 망국의 나락에 선 절망적인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당시 '계몽운동'이나 '문명개화파' 지식인들에게 오가키는 훌륭한 '지푸라기'일 수 있었다. 김가진이나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 끝까지 지조를 지킨 오세창·권동진, 을사오적 암살기도에 깊이 개입한 해학 이기(海鶴 李沂) 같은 사람들이 오가키와 깊은 관계를 맺거나 같이 활동한 것은 이 때문이다.

대한협회보 6호에 실린 동농의 논설│김가진은 이 논설에서 "일본의 병탄을 우려하는 것은 기우"라고 주장했다. 일본의 침략성에 대해 과소평가한 것이다.


일본이 병탄하지 않으리라 '착각'

이 무렵 김가진은 오가키뿐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와도 나름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김가진이 일본공사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이토는 1907년 4월 25일 김가진의 백운동 정자를 방문했으며, 1908년 5월 이토의 67회 생일에 김가진은 이토에게 "혁혁한 공을 세운 이름은 세상을 덮어 꽃피고 온몸은 후지산의 정기를 서렸도다"라는 시를 지어주는 등 여러 차례 교류했다.

이 당시만 해도 김가진은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지는(倂呑) 않겠냐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김가진은 '대한협회회보'에 기고한 논설 '아국 유식자의 일본국에 대한 감념(感念)'에서 당시 지식인들의 일본관을 비판하면서 "병탄을 두려워하는 것은 기우"이며, "병탄은 일본이 세계에 반포한 수차례의 선언에 반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 같은 인식과 태도는 비단 김가진만의 것이 아니었다. 김가진을 비롯한 계몽운동 시기 수많은 지도자들이 공유한 이런 견해는 너무나 '순진'한 것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시대적인 한계이기도 했다. 일본의 침략성을 뼛속깊이 느끼고 의병의 길을 택한 사람들은 대개 또 다른 시대적 과제인 문명개화에 대한 인식과 문명개화를 밀고나갈 역량이 부족했다. 반면 문명개화를 실천해 나간 인사들은 일본의 침략성에 대해 자의적이고 안이한 판단을 하고 있었다. 안중근처럼 이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당시 계몽운동 지식인을 사로잡은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의 경쟁신화가 아직까지도 기승을 부리고 있고, 이때 출현한 '토착왜구'가 지금도 창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런 착각과 내적인 한계를 극복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가진은 망국 뒤 자포자기의 세월 10년을 보내고 70대에 들어서서야 고종의 비극적인 죽음과 3.1운동의 엄청난 충격을 겪고서야 그 한계를 극복하게 된다.

대한협회 간부들 모습│동농은 대한자강회의 뒤를 이은 대한협회 회장직을 맡아 근대적 정당을 모색했다. 그러나 대한협회는 일본에 의한 병탄 뒤 강제 해산됐다. 사진은 앞줄 왼쪽부터 오세창 권동진 윤효정, 뒷줄 왼쪽부터 이우성 심의성 여병헌. 동농은 빠졌다.


최초의 정당을 꿈 꿨으나

1908년 12월 17일 열린 대한협회 1주년 기념식에서 김가진은 대한협회의 지향점이 정당으로의 발전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대한협회에 대한 일반 여론이나 지방의 유지들이 지회 설립에 적극적인 것을 볼 때, 김가진은 머지않아 전 국민의 뜻을 통일하여 '대한 대정당 대한협회의 영예'가 세계에 떨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한협회는 김가진 명의로 '전국의 토지가 점차 동척의 수중에 장악될 것이라는 우려가 널리 퍼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일본인 이주자의 규모를 제한하려는 방침을 갖고 있는가' 등 4개항의 질문서를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보냈다. 정부에서 답변서 제출을 세 번이나 거절하자 대한협회는 이완용과 송병준의 사퇴를 요구했다.

김가진과 대한협회는 1909년 1월 순종이 평안도를 순시할 때 일진회 핵심인 내부대신 송병준이 술에 취해 열차에서 행패를 부린 사건을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송병준이 술에 취해 순종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칼을 빼들고 궁녀를 희롱한 것은 그야말로 '미증유의 괴변'이었다. 김가진을 선두로 한 대한협회 회원들의 끈질긴 요구와 국민 다수의 공분이 결합하여 송병준은 내부대신 자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당시 일본헌병대는 "대한협회가 근래 자주 연설회를 열어 내각 제대신을 공격하므로 인민은 매우 기뻐하고 있다"라는 기밀보고를 올렸다. 김가진은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황실의 존엄을 높이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일진회와의 경쟁과 협력

김가진을 포함하여 협회의 주요성원 다수가 정치일선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대한협회 성원들이 이완용 내각과 일진회를 비판하는 것을 이완용 내각을 붕괴시키고 대신 자리를 차지하려는 시도로 보는 시각도 많았다. 김가진은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늘 입각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대한협회는 장차 정당으로의 발전이라는 뚜렷한 지향을 가진 단체였다. 당시 정당으로의 지향을 가진 단체는 대한협회와 일진회 밖에는 없었다. 대한협회와 일진회는 주로 대립 경쟁하고, 때로 협조하면서 당시 양대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일제의 주도하에 의병에 대한 악명 높은 탄압인 '남한대토벌작전(1909년 9~10월)'이 시작된 직후인 1909년 9월초, 대한협회는 그동안 매국당이라고 비판한 일진회와 돌연 연합을 추진했다. 처음 대한협회가 일진회와 연합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한협회 내의 일부 회원들은 이에 반대했다. 대한협회와 일진회간의 연합 대연설회를 개최하는 등 상호제휴 노력이 순탄하게 진행되는 듯 했지만, 뜻밖의 사건으로 상황이 급변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된 것이다. 조선의 즉각적인 병합보다는 보호국 체제의 유지를 주장해 온 이토가 피살된 뒤, 일본 조야의 여론은 한국 병탄을 강행하는 것으로 기울어 졌다. 일진회도 보호국 틀 안에서 조선의 갱생을 모색하려는 대한협회와의 제휴를 깨고, 12월 4일 합방청원상소를 올렸다. 일진회가 합방청원상소를 제출하자 김가진은 대한협회와 일진회 간의 제휴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선언하면서, 일진회를 규탄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안타깝게도 여기까지였다. 김가진과 대한협회는 일진회의 '무모하고 경솔한' 합방 청원은 비난했으나, 경시청과 고문 오가키 등의 제안에 따라 이런 비난이 배일사상을 고취하여 한일양국의 친교를 저해하는 것으로 번지는 것은 피하고자 했다. 대한협회나 김가진은 이때로부터 망국에 이르는 1910년 8월까지 실망스럽게도 이렇다 할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대한협회는 당시 회원 수가 근 5만 명에 이르는 국내 최대의 조직이었다. 그런 조직이 의병을 폭도로 보면서 합방을 저지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 못했던 점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한말의 개화자강론이 갖는 내적인 한계였다. 오가키는 국민이 싫어하는 일진회 대신에 대한협회를 내세워 국론을 환기시키려 했다. 대한협회는 여기에 동원되지 않고, 적극적인 앞잡이로 나서지는 않았다. 오가키의 공작에 이용되지 않고 그저 침묵을 지키는 것이 김가진을 포함한 개화자강론자들이 망국의 전야에 할 수 있었던 최대치의 행동이라면 그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었다. 500년 된 나라 조선은 그렇게 망해가고 있었다.

망국, 조선귀족령, 가난

1910년 8월 22일 남산자락에 있는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관저 2층 응접실에서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은 데라우치와 한일 강제병합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500년 된 나라가 회사 합병하듯이 그렇게 도장 찍어 넘어가고 말았다. 어차피 망할 나라 품격은 따져 무엇하겠냐만, 변변한 전쟁도 없이 500년 된 나라가 테이블 위에서 망한 것이다. 일본은 한국인들의 반발을 두려워하여 조약 체결 사실을 숨기다가 오늘날 우리가 국치일로 기억하는 8월 29일 순종황제로 하여금 나라를 넘긴다는 조서를 반포하게 했다. 이어 9월 12일에는 경무총장 아카시 모토지로우(明石元二郞)는 대한협회의 김가진 오세창 일진회 부회장 김택현 등을 소환하여 정치단체의 해산을 명하였다.

10월 7일 일제는 소위 조선귀족령에 의거 대한제국의 중신들에게 작위를 수여했다. 황족인 이재완 등 6명이 후작, 이지용 등 3명이 백작, 이완용 등 22명이 자작, 윤용구 등 45명이 남작을 받는 등 모두 76명이 작위를 받았다. 김가진도 남작 작위를 받았다. 김가진의 족형인 김석진은 일제가 남작을 주려 하였으나 거절 후 음독자결했다. 대원군의 사위 조정구와 조경호, 을사조약 당시의 참정대신 한규설, 갑오개혁의 주역 유길준, 그리고 민영달 윤용구 홍순형 등 모두 8명이 2년 뒤에 작위를 반납했다. 김가진의 며느리 정정화에 따르면 김가진은 작위에 따라 주어지는 연금은 끝내 받기를 거부하며 지냈다고 하지만, 김가진은 작위 자체는 거부하지 않았다.

망명 이전 김가진은 귀족으로서의 사회적 활동을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재조선 일본인 주요 인사와 조선의 명사 다수가 모이는 이문회 모임에 자주 나갔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새 사옥을 건립했을 때 귀족의 한 사람으로 초청을 받아 휘호를 써 주기도 했고, 1915년 11월 교토에서 열린 다이쇼 천황의 즉위식에 참석하는 등 '조선귀족'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3.1운동 이전에 김가진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매일신보'가 전하는 1910년대 김가진의 모습은 차라리 친일적이라고 할 수 있다. 김가진은 1917년 일본에 건너가 몇 주간에 걸쳐 벳푸 온천에서 요양하고 사세보 군항을 돌아보고 돌아왔다.

이때 김가진은 일본이 아주 빠르게 '일신 우일신'하여 오늘과 같은 번영을 이루었다면서, 한국과 일본 두 집이 이제 하나가 되어 같이 태평성대의 혜택을 입게 됨은 조선의 지극한 행운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모노세키는 수십 년 전에는 하나의 어촌에 불과하여 볼 게 전혀 없었지만 지금은 큰 건물이 들어선 것에 경탄을 금하지 않았다. 김가진은 일본이 이렇게 발전하게 된 것은 국민의 열성 때문이라면서 조선 국민들도 분발 매진하여 "기필코 완전한 국가의 일분자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1910년대에 김가진은 재산관리인의 배신과 횡령 등이 겹쳐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있었다. 김가진은 1918년 5월 3일에는 아들 의한에게 대한제국 시절의 대례복을 살 사람이 나타났으니 전당포에 대례복을 잡힌 표를 빨리 보내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런 처지이다 보니 김가진은 장안에서 으뜸가는 저택으로 알려진 백운장을 지키지 못했다. 백운장은 김가진이 비원장으로 창덕궁의 후원인 비원의 중수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자 고종이 남은 자재를 하사하여 오세창으로 하여금 집을 짓게 해 김가진에게 준 것이다. 1917~18년경 그는 백운장을 떠나야했다. 집안일을 맡아보던 집사가 몰래 백운장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저당 잡히는 바람에 소유권이 넘어간 것이다. 김가진의 삶을 뒤흔든 고종의 승하와 3.1운동은 이런 상황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한홍구 교수는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민주자료관장 △서울대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 △워싱턴대학교 사학과 Ph.D. △국정원 과거사위 위원(전)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상임이사(전)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책임편집인(현)

△저서 : '대한민국사 1~4' '유신' '사법부' 외 다수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특별기획 - 임정의 국로 동농 김가진 연재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