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독립운동가' 장재성을 아시나요?
기념사업회 재조명 움직임
학생독립운동 최고 지도자
독립유공포상 번번이 제외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끈 핵심인물이었지만 서훈을 받지 못한 비운의 독립운동가 장재성(사진·1908~1950년)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최근 (사)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인 장재성 선생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독립유공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며 "100주년을 앞두고 장기계획을 세워 역사를 복원하고 계승하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장재성은 19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였다. 자칫 우발적 사건으로 끝날 수 있었던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은 비밀결사조직인 '독서회'에 의해 광주 전역으로 확산됐다. 당시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전남사범학교, 광주여고보 등 대부분의 학교에는 독서회가 조직돼 있었다.
그 독서회의 전신이 성진회다. 장재성은 1926년 11월 광주고보 재학시절 독서회의 전신인 성진회를 결성하고 총책 역할을 맡았다. 일본 주오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장재성은 1929년 6월 대학을 중퇴하고 광주로 돌아와 독서회 중앙부를 조직해 책임비서를 맡았다.
그는 1929년 11월 3일 일어난 광주고보 시위를 직접 지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0년 광주지역 2차 시위 때 구속된 그는 당시 언론에 대문짝만한 사진과 함께 주동자로 지목됐다. 대구복심법원에서 관련자 중 최고형량인 4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39년 '적석교원 사건'으로 다시 일경에 체포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의 유족들은 지난해 다시 정부에 독립유공자 포상심사를 신청했다. 그러나 보훈처는 "광복 이후 행적 이상으로 보류됐다"고 밝혔다. 보훈처가 밝힌 '행적 이상'은 그가 해방정국에서 여운형 선생의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조직부장과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 전남대표롤 맡아 활동한 사실을 말한다. 분단에 반대한 그는 세차례에 걸쳐 남과 북을 오가다 1948년 검거돼 징역 7년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그는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정식 재판 없이 이승만정권에 의해 총살당했다.
그는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인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상자로 결정됐지만 최종 명단에서 제외됐다. 2005년 3.1절 당시 여운형 등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54명에 대한 포상이 이뤄질 때도 마찬가지 이유로 빠졌다.
광주학생운동이 3.1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3대 항일운동으로 평가받지만 최고 지도자인 장재성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모순적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이계형 국민대 특임교수는 "독립운동의 범위는 1945년 8월 14일까지"라며 "그 때까지의 행적을 따져야지 해방이후의 잘잘못을 이유로 서훈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그 취지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최근 지역사회에서는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기 어렵다면 한국전쟁 시기에 국가공권력에 의해 정식 재판없이 학살당한 진실을 규명해 그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