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한옥마을의 '나비효과' … '착한 임대인운동' 확산

2020-03-04 11:33:11 게재

전통시장·상점가 1만1000여곳 임대료 인하 혜택

프랜차이즈·중소기업계·정부도 적극 동참

"저는 오늘 장사 30년만에 가장 희망이 보이는 날로 정했습니다. 건물주님 덕분에 희망이 보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월 12일 한옥마을 건물주 14명은 전주시와 '전주 한옥마을의 지속적 발전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극복을 위한 상생 선언문' 선포식을 열었다. 한옥마을 상생을 착한 임대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사진 전주시청 제공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망우본동 우림시장 한 매장 창문에 붙은 글이다. 글쓴이는 세입자 8팀 일동이다. 내용은 건물주에 대한 감사 인사다. 매장 앞을 지나가던 이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글을 읽는다.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번진다.

사정은 이렇다. 김 모씨는 우림시장에 위치한 2층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 이 건물에는 8개 임대 점포가 있다. 지난달 26일 건물주 김씨는 세입자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감염증으로 인한 매출 감소를 염려하며 2월 3월 임대료 50% 경감한다는 내용이었다. 김씨는 "많이 내려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도 했다.

감동한 세입자들이 '건물주님'의 고마움을 시장을 찾은 모든 이들에게 전했다.


나비효과다. 처음엔 전주 한옥마을 건물주들의 작은 몸짓이었다. 지난달 12일 건물주들은 자발적으로 임대료를 3개월 이상, 10% 이상 인하를 약속했다. 이 몸짓이 '착한 임대인운동' 바람을 일으켰다.

전국의 건물주님들이 소상공인들의 고통 분담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다. 코로나19가 건물주와 세입자의 상생문화를 만들어 주고 있는 셈이다. 착한 임대인운동이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둥지 내몰림)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전주에서 시작, 전국으로 퍼져 = 소상공인 97.9%가 코로나19 사태 이후 매출이 감소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0% 이상 줄어든 소상공인은 44% 가량이다. 소상공인연합회가 소상공인 109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내수경기 부진에 이은 코로나19는 소상공인에게 충격을 줬다. 시민들이 일상활동을 기피하면서 소비 절벽이 발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착한 건물주들이 상인들의 고통 분담에 나섰다. 점포 임대료를 내렸다. 전통시장 점포의 경우 영업비용 중 임차료가 약 20%를 차지한다. 임대료 인하는 소상공인에게 가뭄 속 단비인 셈이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2월 28일 기준으로 전통시장·상점가 임대인 700여명이 1만1000여개 점포의 임대료를 인하 또는 동결했다. 자발적인 건물주 움직임에 중소기업계, 공공기관과 프랜차이즈들도 동참했다.

지난달 27일 서울 망우본동 우림시장의 한 매장 앞에 2, 3월 임대료 50% 경감에 희망이 보인다는 내용의 세입자들이 남긴 감사글이 붙어 있다. 사진 연합뉴스


지난달 남대문시장 상가 건물주들은 상가임대료를 3개월간 20% 인하하기로 결정했다. 전주의 착한임대인운동이 서울에 도착한 것이다. 박영철 남대문시장 대표이사는 "착한건물주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돼 상인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최근 동대문패션타운 관광특구내 4개 시장·상가에서 임대인 261명이 약 470개 점포의 임대료를 인하했다. 테크노상가의 경우 임대료 인하를 받지 못하는 일부 상인을 위해 임대료를 인하 받는 상인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관리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

동대문패션타운 한 임대인은 "어려운 시기지만 동대문패션타운 관광특구 구성원들 간의 상생하는 모습으로 동대문의 저력을 보여 줄 테니 많은 관심과 지원을 바란다"고 밝혔다.

착한 임대인운동은 이미 전국으로 확산됐다. 경기 김포시 장기동의 한 건물주도 4개 점포 임대료를 100만원씩 인하하기로 했다. 파주시 운정가람상가 6명 임대인도 8개 매장 월세를 10~20% 가량 내렸다.

제주 서귀포시 매일올레시장상인회는 지난달 27일 임대료 인하 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부산진남문시장번영회는 점포주와 합의를 거쳐 다음 달부터 5월까지 1층 상가를 대상으로 임대료를 낮추기로 했다. 임대료를 할인받는 점포는 모두 70여곳이다. 점포당 최대 60만원을 할인받게 된다.

부산 최대 카페 밀집지역인 전포카페거리 일부 건물주들도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건물 임대료의 20∼60%를 인하하기로 했다.

중소기업계도 '착한 임대인운동'에 동참했다.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은 "착한 임대인운동은 '약자가 약자를 보호한다'는 상생정신"이라고 강조했다.

통큰 관광단지도 있다. 경기 파주시 '프로방스마을' 일부를 운영하는 프로방스가든은 지난달 말 입주한 16개 업소에 "2월 임대료 전액을 공제한다"고 알렸다. 합치면 5000만원이 넘는 거금이다.

중기중앙회는 중소기업 단체·조합 657개, 노란우산공제 가입 17만명 임대사업자에게 참여를 독려할 계획이다. 먼저 코로나19가 급격히 확산한 대구시와 협의해 대구중소기업전시판매장 입점업체들의 임대료를 50%까지 인하할 계획이다.

프랜차이즈 9곳(또봉이 명륜진사갈비 더벤티 피자마루 맘스터치 커피베이 이디야커피 CU GS25)도 가맹점 임대료 인하나 방역, 물류지원 등을 하고 있다.

◆젠트리피케이션 극복 대안 될까 = 민간의 자발적 움직임에 정부도 화답했다.

정부는 임대료 부담을 덜어주는 임대인들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착한 임대인들의 임대료 인하 절반을 정부가 분담한다. 임대인 소득이나 인하 금액 등에 관계없이 임대료 인하분의 50%를 소득세·법인세에서 감면한다.

이와함께 중앙정부 소유재산의 소상공인 임차인 임대료율을 연간 재산가액 3%에서 1%로 인하키로 했다. 국유재산을 민간에 맡겨 개발한 시설의 경우 임대료를 50%로 감면한다. 인하 한도는 2000만원이다.

103개의 공공기관은 소유 재산의 중소기업·소상공인(소상공인법 제2조상 기준) 임차인에 대해 6개월간 임대료를 20~30% 인하한다. 임대료를 매출액에 연동해 계약한 경우 낮아진 임대료를 6개월간 납부 유예한다. 지자체의 경우 현재 재산가액 5%인 임대료율을 최저 1%로 80% 가량 낮춘다

착한 임대인운동을 고질적인 젠트리피케이션 극복의 계기로 삼으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달 18일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더 많은 착한 임대의 물결로 이어지길 기대한다"며 국회에 계류 중인 '지역 상권 상생발전법' 제정을 촉구했다.

김형수 기자 hs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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